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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바쳐 민주화했더니 간첩 들어와 넘봐"

  • [데일리안] 입력 2012.05.28 08:19
  • 수정
  • 동성혜 기자 (jungtun@dailian.co.kr)

<인터뷰>통진당 비례 18번 강종헌 질타하는 편지 보낸 '부미방' 김현장 씨

"주사파가 진보? 그나마 진보 싹 무참히 밟아…강종헌 재심? 증인설 것"

<@IMG1>
“예전에 우리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습니까. 젊은 목숨 바쳐가며 민주화를 만들어놓았더니 벌건 대낮에 간첩이 들어와 잡아먹으려 해 화가 안나겠습니까.”

그의 눈은 여전히 이글거렸다. 답답함과 안타까움, 분노와 정권을 향한 날카로운 비판. 하지만 ‘대한민국’에 대한 깊은 애정이 말 한마디 한마디, 표정 하나 하나에 생생히 새겨졌다.

1982년 3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하 부미방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돼 사형까지 선고받았던 김현장 씨.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18번인 강종헌 후보가 현재도 북한 공작원 신분일 수 있다는 문제제기로 주사파에 대한 경종을 울렸던 그다. 그를 만난 것은 지난 23일 강남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다.

“주사파가 진보? 그나마 진보의 싹을 무참히 밟는 것”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선거 의혹을 발단으로 세상에 알려진 경기동부연합이 핵심인 당권파, 이른바 주사파(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과 행동지침으로 내세우는 조직)의 실체. 이와 관련, 그는 “국민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문제점이 없다고 하지만 굉장히 위험수위를 넘었다”며 “그들은 소수지만 그물망처럼 단단하게 조직돼 있기 때문에 힘이 있다”고 우려했다.

또한 그는 주사파를 향해 “진보도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그나마 조심스럽게 터왔던 진보의 싹을 이렇게 무참히 밟으려 한다. 해방 이후 조봉암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이제 40여년이다. 혁신계와 진보정치는 구별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혁신계를 마르크스 이념을 기반으로 한 조직, 진보는 서구 사회민주주의 정도로 나눴다.

그는 “통진당 일부에서 자신들의 정치 이념기반을 3·8선 이북에 있는 평양에 둔 게 문제”라며 “그들로 인해 건전한 진보 전체가 한꺼번에 지탄받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또한 그는 “통진당 내부 일부 젊은 친구들(주사파)이 문제가 있을지라도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한다”며 “1980년대 이후 운동권 내부에서 NL과 PD로 나뉘어 이념논쟁을 벌일 때 그들은 이웃인 북한이 공산주의로 성공했다고 봤다. 당연히 그들과 동맹 혹은 연대를 통해 통일사업과 통일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1980년대 운동권 내부를 회상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PD계열은 자주파로 남한의 힘으로 남한 노동자 계급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쪽이고 북한과의 동맹 혹은 연대를 통한 통일운동을 주장한 쪽은 NL계열이다. 수를 비교한다면 PD계열이 NL계열의 10분의 1도 안된다고 한다. NL계열에 확실한 이론을 제공한 이가 <강철서신>의 작가이자 현재 중국에 구금된 북한인권운동가인 김영환씨다.

그는 “1982년 ‘부미방 사건’ 때까지도 그런 논쟁은 없었다. 유일한 구호가 ‘반독재’였다. 남녀노소나 노동자 계층 할 것 없었다”며 “그러다 84~85년에 사상 투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론만 본다면 철학적으로 몇가지 취할 점이 있을지 몰라도 김일성 사상은 초근목피도 먹지 못하고 유랑하던 시대에나 맞는 이론”이라고 평했다. 1985~1986년이면 우리 사회가 상대적 빈곤이 있을 수 있지만 절대적 빈곤의 시대는 아니기에 1940년대 빨치산식 사회주의 이념이 설득력을 얻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자연스럽게 그가 ‘부미방 사건’을 일으키게 된 이야기가 나왔다.

<@IMG2>“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고 싶었다. 미국이 작전권을 쥐고 있었지만 탱크를 동원할 근거가 없었다. 한미 방위협정에 보면 군인에게 주어진 무기는 3·8선 위에 있는 북한이 남한으로 밀고 내려올 때만 사용하도록 돼 있다. 대학생들에게 총을 쏘라는 내용도 없는데 미국이 스스로를 부정한 게 아닌가. 그에 대한 책임을 물었던 게 ‘부미방 사건’이다. 거기에 레이건이 취임하면서 제일 먼저 외국 원수라고 초청한 게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다. 광주 민중들의 피도 마르기 전에 등을 두드리고 격려하는 모습을 보니...”

그는 여전히 당시 상황이 생생한 듯 감정을 억누르며 다소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회상했다.

이어 그는 “우리가 공산주의이기 때문에 불을 지른 게 아니다. 불을 질렀기 때문에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라고 되뇌었다.

게다가 그때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워컴이 한국인을 향해 “한국인은 들쥐와 같다. 들쥐의 습성은 한 마리가 앞에서 뛰면 덮어놓고 뒤따라가는 것이다”는 발언이 논란이 됐던 때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는 미국의 외교정책을 반대한 것이지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반대한 게 아니다. 경제대국인 미국을 도외시하고 경제활동이 가능하겠느냐”며 “북한도 미국과 거래를 하려고 저 난리인데. ‘미국놈’을 반대했지 ‘미국사람’을 반대한 건 아니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부미방 사건’으로 그는 사형이 선고됐고 집행을 기다리던 중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대전 중촌동 교도소로 이감됐다. 거기서 서울대 의과대학에 재일교포 유학생 신분으로 재학중에 ‘서울의대 간첩단 사건’으로 체포된 통진당 비례대표 18번 강종헌 후보자를 만나게 됐다.

“강종헌은 김일성 이름으로 ‘나라 도덕질’, 나는 민주화 위해 ‘정권 도덕질’...”

그는 “대전 교도소에는 강종헌 그가 먼저 와있었다. 전두환 취임 기념으로 감형됐더라. 서부 병사라고 제일 끝방에 그가 있었고 바로 옆방에 내가 있었다”며 “감옥 안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다. 거기서 강종헌은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나라 도덕질’, 나는 민주화를 위해 ‘정권 도덕질’하려다 들어온 셈”이라고 했다.

특히 그는 강 씨에 대해 “아주 근엄하고 입이 무겁고 무서운 친구”라며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을 많이 봤지만 그처럼 철두철미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또한 그는 “무기수로 날마다 보면서 북한으로 공작선을 타고 간 이야기 등을 들었다”며 “처음에는 깜짝 놀랐지만 공산주의라고 적대시 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는 그의 입장이 있고 나는 내 입장이 있는 것이고 그 외 나머지 생활은 공유하며 살았다. 3년을 같이 살았다”고 말했다.

강 씨의 북한과 관련한 이야기는 대전 교도소에서 다른 정치범들은 다 나가고 둘이 남았을 때 대부분 들었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거지”라며 “그는 여기서 생활할 사람도 아니고 1988년 12월 대구교도소에서 함께 출소한 이후 만난 적이 없다. 나도 이제 그를 만날 입장도 아니고 그러나 우정은 남았다”고 다소 씁쓸해했다.

<@IMG3>이제 와서 다시 강 씨의 이야기를 꺼낸 게 궁금했다.

그는 “사람이 나설 때가 있고 물러설 때가 있듯 진퇴를 할 줄 알아야 망신을 당하지 않는다. 박희태나 전여옥 봐라. 얼마나 개망신인가”라며 “사람은 두가지 유형이 있더라. 아침밥을 먹고 집을 나서면 다시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는 난세형 인간과 치세형 인간이 있는데 나는 난세형”이라고 자평했다.

이어 “나같은 놈은 그렇게 어두운 시절을 불태우고 징역이나 살라고 있는 거다. 나같은 유형이 국회 들어가면 최류탄 터트리고 기계톱 들고 난장판 만든다. 아는 게 그것 밖에 없어서다”라며 “우리 자식들 가르치는 이유가 뭐냐. 그 정도는 구별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조용히 살아왔다”고 최근까지의 상황을 더듬었다.

그러다 우연히 신문을 보던 중 통진당 비례대표 18번에 강종헌이라는 이름을 봤다고 한다. 설마 본인이 알고 있는 그 강종헌이라 생각도 안했다는 것. 하지만 그에 대한 프로필을 보고 깜짝 놀라 잠시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그는 “그때서야 통진당이 공식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지 않고 ‘님을 위한 행진곡’만 부르고 어떤 결의사항이 있을 때 명패를 드는 모습이 이해가 됐다”며 “아무리 자유 대한민국이라도 현재 북한과 휴전상태인데 북한이 장사장포를 쏘면 분당까지 떨어지는 상황에서 그들의 행동이 북한과 너무 흡사해 도무지 이해가 안됐었는데 강종헌이라는 이름을 보고 깨달은 것”이라고 했다.

일주일을 고민한 끝에 그는 편지를 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기자회견 할 수도 없고 사법기관에 뭐라고 신고할 수도 없고 그래도 사랑하는 친구인데 이건 아니다 싶은 심정에 몇날 며칠 밤을 새우다 토요일인 지난 12일 밤 11시부터 밤새워 편지를 쓴 게 14일 공개한 ‘못 잊을 나의 친구 종헌에게’이다.

그리고 나서 한강 다리를 넘어 집으로 향하는 당시 심정에 대해 그는 “사람이 죽을 자리에서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사형을 받았을 때 죽었으면 종헌이 지도 괴롭지 않고 나도 그렇고. 살다 보니 이렇게 끼어든다는 생각이 들더라. 못 볼 것 보고 못할 일 하고”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국이 허물어 가는 데 방관못해, 진보란 이름으로 대한민국 짓밟으면 안돼”

하지만 그는 결연했다. 이내 “눈에 흙이 들어가 소나무 밑에 한줌 먼지로 살아도 내 조국이 이렇게 허물어져 가는 데 방관할 수 없다”며 “진보란 이름으로 이렇게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농락하고 대한민국을 짓밟으면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강기갑, 노회찬, 심상정, 유시민 씨가 잘했으면 좋겠다. 더 이상 과격한 소리만 하지말고 국민 생각하고 이 나라의 장래를 생각해줘야 한다”며 “보수라는 사람들보다는 그래도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느냐. 어떤 미래를 생각하고 보여주느냐가 중요하니까 자신들이 했던 말을 책임도 져야 한다”고 착잡한 심정을 밝혔다.

강 씨가 최근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반박한 것에 대해서는 “근거없는 말장난”이라며 대구교도소에 있을 때 강 씨의 어머니가 일본에서 면회와서 같이 만난 이야기, 1973년 북한이 아니라 홋카이도 여행을 갔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도 “본인 말로도 변장하고 북에 가서 김일성을 보고 왔다고 했다”고 재반박했다.

특히 그는 강 후보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2010년 말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한 것을 두고 “재심 재판중에 청원하려고 한다”며 “내가 증인으로 나가 평양에서 내려온 지도위원 신분이었던 것을 밝힐 것”이라고 강조했다.

<@IMG4>
그는 “난 반공주의자도 꼴보수도 아니고 정권에 빌붙어 밥 한끼 먹은 것도 없다. 나라가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느냐. 20여일 동안 손을 뒤로 묶인 상태에서 물고문 받았고 부모님은 홧병에 돌아가시고 가족은 산산조각났다”며 “그렇지만 ‘홧김에 서방질한다’고 북한을 지지할 수는 없다. 내가 민주화를 위해 싸웠고 후손들에게 자유스러운 사회를 물려줘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힘줘 말했다.

또한 그는 “대통령부터 파출소 순경까지 썩어 빠졌다. 차라리 이럴 거면 북한에 나라를 바쳐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잠시 숨을 고르더니 “내가 좀 과격하게 표현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권력을 닭벼슬 만큼도 못하게 생각한다. 그런 정신 자세가 있어야 민주화, 민족운동을 올바르게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는 자신이 편지를 발표한 그날 오후 김영환 씨가 중국에서 구금됐다는 기사를 보고 더 괴로웠다며 “나보다 어린 후배도 이렇게 고생하는데 더러워서 피한다는 식으로 내가 몸을 사리고 침묵하면 되겠느냐”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우리가 정신 차려야 한다. 자주 하는 이야기지만 저쪽 사람들은 사상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한다면 하는 사람들이다. 공동목표를 위해 하루 한끼 굶자면 하고도 남을 사람들”이라며 “하지만 아마 대한민국에서 한끼 굶자고 하면 아이들 성장발전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발표부터 공청회한다고 2년도 더 걸릴 것이다”고 꼬집었다.

“앞으로 어디든 강연요청이 들어오면 다 찾아다닐 것”이라는 그는 현재 광주에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조만간 서울에 사무실을 둘 계획이다.[데일리안 = 동성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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