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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회암사지 (檜巖寺址), 고승대덕의 숨결 (II)


입력 2007.02.15 08:49 수정        

한 곳에서 고승대덕 3명의 부도탑을 보게된 행운으로 겨울 추위에서도 입안에 침이 괸다

조선 건국의 이데올로기는 유교였다. 새 왕조의 정통성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고려의 숭불정책을 대신하는 새로운 건국이념으로 무장해야했고 성리학 중심의 왕권확립이 절실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조 자신이 자신의 정신적 운명을 불교에 의탁했음은 아이러니이기도하다. 아마도 고려의 백성이고 신하였던 그의 성정은 이미 고려의 불교사상에 맥이 닿아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조선왕실의 숭불은 태조에 머무르지 않는다. 대대로 왕과 왕후, 그리고 왕의 친족들은 그들의 구복(救福)을 불교를 통해 얻으려고 했던 것 같다. 양녕대군과 살아있는 생불이라 칭송 받았던 효령대군, 그리고 문정대비(중종의 비, 명종의 어머니)가 죽고 난 후 억불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던 명종 대에 이르기까지는 불교를 금했던 민간과 달리 왕실중심의 불교는 고려시대와 다름이 없었던 듯 하다.

회암사지 흩어진 절의 기억들 속에서

봉건시대의 종교는 언제나 왕실의 정치적 역학관계나 이데올로기에 맞물려 돌아감을 많은 역사는 증명해 보여준다. 조선시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유교임에도 불교가 왕실의 비호를 받고 성장하는 것이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권력을 쥔 사대부에게는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조선건국에 관계하면서 나라의 정치적 법적 토대를 마련했던 사대부의 대표 정도전이나 여기 이 절터에 주석하고 정도전과 대칭점에서 태조의 왕사노릇을 하면서 정신적 스승이었던 무학대사는 이런 종교적 갈등이 나중에라도 문제가 될 것임을 알지 못했을까?

절터에서 발을 옮겨 다시 전망대에 서서 아래의 빈터를 보면서 이 절이 불탔을 그때를 생각해본다. 이 절은 명종 때 문정왕후의 도움으로 전국 제일의 사찰이 되었다가 문정왕후 사 후, 억불정책으로 절이 불타면서 역사를 마감한다. 회암사가 불탔다는 것은 그것으로 조선의 왕실불교가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이고 전국의 모든 사찰들이 패문(閉門)하는 결과로 이어진 신호였다. 이는 문정왕후의 생전까지가 조선불교의 전성기였음을 말해준다.

회암사지 출토 영락장식들

문정왕후 당시 이 회암사에는 지공, 나옹, 무학 등의 고승대덕을 이어 허응당 보우대사가 회암사에 머물며 불교중흥을 도모했다. 보우는 누구인가? 율곡 이이가 그의 저서‘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에서 서술했듯 보우는 유생들에게 요승이자 적승(賊僧)이었지만 세상에 나오지 않고 수도자 본연의 자세를 지키며 주유산천 하던 <숨어사는 현자> 였다.

따라서 권력이 없고 힘이 없는 이 중은 유학자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아니었고 나아가 이런 유학자들에 의해 문정왕후에게 천거되어 급작스레 봉은사 주지로 임명되었다. 이후 보우는 내가 없으면 불교의 중흥도 없을 것이다라는 소신으로 불교중흥을 도모하게 되고 이런 이유로 유교적 이데올로기와 충돌하는 길로 접어들게 된다.

보우는 노골적으로 불교 중흥에 반대하던 유학자들의 의견에 반하여 불교중흥을 도모하여 회암사 중창에 나서 1565년(명종 20) 4월 5일 낙성식을 겸한 성대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었다. 여기까지가 조선 불교의 비등점 이었다. 공교롭게 보우로 하여금 회암사 중창불사를 맡긴 문정대비가 이틀 뒤 사망을 하고 이날 이후 유학자들의 끝없는 상소와 궁궐을 향한 항의는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야할 당위를 갖게 되었고 이 해 사월초파일에 결국 보우는 제주도로 유배되어 그곳의 목사였던 변협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회암사도 유학자들의 방화로 추정되는 불길에 휩싸여 폐사되고 말았다.

은둔에서 빠져나와 당대 최고의 고승으로 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었던 그 순간을 선택한 날로부터 이런 최후의 날이 올 것임을 이미 보우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다만 불교의 중흥을 위해 유교라는 지배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불교의 이상향을 건설해보고자 했던 그의 판단은 죽음을 무릅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운명을 걸어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니/무엇 때문에 문밖으로 달려갈 필요가 있겠나/경계와 마음, 마음과 경계가 다른 경계 아니니/대지에 가득한 산과 강이 무엇인고/적적한 가을 멧부리에 성긴 비 지나가고/바람 앞에 푸른 풀잎 너울너울 춤을... - 보우국사 오도송 중에서-

이런 회암사의 불타는 최후를 비석이 되고 부도탑으로 남은 지공대사, 나옹선사, 무학대사는 죽은 후에도 볼 수가 있었을까? 가파르지 않은 절터 뒤편을 오르며 별 생각을 다한다. 당대 최고의 고승대덕인 지공, 나옹, 무학대사의 부도탑이 불타 없어진 빈터에 같이 있다는 것도 특별한 예이지만 이들의 부도탑을 보는 것으로도 회암사지의 규모와 옛 영화를 반영하는 다른 증거라 여겨진다.

낮은 언덕배기 올라가니 차지 않은 겨울 바람이 소나무 몇 그루 사이로 불어오고 바람 따라 들어온 햇살이 군데군데 땅위를 비추며 어른거린다. 봄볕이 들거나 가을쯤에는 약간 높은 곳에 앉으면 참 따스한 해바라기가 가능하겠다는 느낌에 아늑해진다.

무학대사비

맨 아래 서있는 무학대사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51호)는 맨 위 지공국사나 나옹화상의 부도까지를 이끄는 척후병처럼 큰 키로 아래 절터를 바라보고 있다. 또한 무학대사비 바로 뒤에는 쌍사자 석등과 무학대사 부도가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원래 부도의 전형은 맨 앞에 비석 석등 그리고 부도탑이 일렬로 자리하는 것이 전형인데 무학대사 부도탑은 그런 면에서 전형적인 양식을 잘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학은 18세에 승려가 되어 용문산의 혜명에게 불법을 배웠고 묘향산 금강굴 등에서 수도한 후 고려멸망이후 조선 최초의 국사(國師)로 태조 이성계의 이념적 정신적 스승이 된다. 태조가 왕이 될 것이라 꿈풀이를 해 준 것과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로 나중에 태조로부터 묘엄존자(妙嚴尊者)라는 칭호를 받는다. 이 비는 무학이 사망한 후 태조10년(1410년) 왕명에 의해 변계량이 지은 글을 공부가 글씨를 써서 만들었어나 순조 때 파괴되어 이후 다시 조성되었다. 비석 옆에는 원래의 비석에 쓰였던 지붕돌이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쌍사자석등과 무학대사 부도탑

회암사지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은 땅속에 거의 파묻힌 장방형의 받침돌과 복련이 새겨진 아래받침돌이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있고 윗받침돌에는 같은 형태의 팔엽(八葉)의 앙련이 조각되어 있다. 그 사이 중간받침돌은 배를 서로 맞댄 사자 두 마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볼륨감이 없고 사실적인 요소가 많이 축약되어 있다. 가까이 가서 보면 거의 직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머리는 하늘을 향해 들고 있으며 가는 팔로 윗받침돌과 화사석을 받쳐들고 있어서 마치 무게에 눌리는 듯한 모습이다.

그러나 석등의 전체적인 모양이 단순화되어 있음을 감안할 때, 필요 이상의 세부적인 묘사를 한 조각보다는 나름대로 전체적인 조화를 맞추는데는 나름대로 어울려 보인다. 화사석도 단순하게 공간을 마련하고 있는데 좌, 우에 두 개의 판석을 세워 앞, 뒤가 트인 상태를 그대로 이용하고 있으며 두터운 지붕돌은 처마선에 굴곡을 두어 사방의 끝이 약간 들려 보이도록 하였고 지붕돌에는 단순하게 보주(寶珠)를 올린 모습이다.

조선 초기에 이르러서는 팔각원당형의 전형적인 부도 형태를 완전히 벗어난 양식이 대세를 이루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로 청룡사터의 보각국사 정혜원륭탑전사자석등(보물 제656호)과 비슷한 양식을 보인다 다만 청룡사터의 석등은 사자가 한 마리로 엎드려서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며 사자의 생김새는 두 곳이 다 비슷하다.

무학대사부도탑 근경

회암사지부도는 무학대사의 묘탑이다. 둘레에는 탑을 보호하기 위한 난간이 둘러져 있는데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부도탑의 경우 이런 형태를 취하는 예는 많다, 대표적으로 비슷한 것이 여주 신륵사에 있는 나옹화상의 또 다른 부도이다. 신륵사보제존자석종(神勒寺普濟尊者石鐘)으로 명명된 이 부도탑의 재질은 화강암이 아닌 대리석으로 만든 것이지만 그 양식이 이것과 동일하다.

8각의 바닥돌에는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모두가 오른쪽 시계방향으로 화전한 나선형모양을 하고 있으며 아랫기단의 상부에는 복련이 조각되어 팔엽의 연꽃이 조각되어있고 사방에는 연꽃잎을 덮은 귀꽃이 솟아있다. 중간돌은 마치 팔 각의 북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각 면에는 꽃 장식이 아름답다. 윗받침돌에는 아랫부분이 앙련의 형태를 취하고 윗부분에는 그 표면에 당초문을 새겼다. 몸돌은 구(求)형으로 표면에 용과 구름이 가득 새겨져 있는데 정면에서 바라다 보이는 용의 얼굴은 근엄하고 앞발을 치켜든 모습이 다소 공격적이다 싶다.

부도에서 가장 중심부이기도 하지만 부조된 모습의 깊이가 뚜렸하고 용의 머리와 몸, 비늘 등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구름무늬가 역동성을 강조해 주는 모습이다. 지붕돌도 8각으로 처마부분에는 목조건축의 양식을 빌어 서까래나 기둥모양이 조각되어 있는데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으며 급한 낙수면에 추녀 끝이 가볍게 들려있어 몸돌 위에 댕강 들어 올려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치 선비가 갓을 쓴 것이 아니라 초립을 얹어 쓴 것처럼. 이것은 조선 전기의 부도 양식을 보여주는 의의가 있고 무학대사묘비의 기록으로 미루어 1407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무학대사 부도탑에 조각된 꽃무늬
무학대사 부도탑 몸돌 조각











바로 위에는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세운 것으로 지공국사의 부도탑과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49호)이 있다. 회암사를 창건한 인도인 승려 지공국사의 사리를 모시고 있는 이 부도는 팔각원당형의 기본양식에 조각들이 생략되어 있으며 바닥돌 위의 3단으로 된 기단 또한 단순한데 가운데 기단만 볼록하게 만들어 변화를 주었다. 몸돌의 경우는 둥근 공모양이며 지붕돌은 두툼하고 단순하지만 여덟 모서리의 각 처마 끝에 얕은 반전을 두어 들려있고 머리장식은 하나의 둥근돌로 소박하게 마감하였다.

아래 나옹화상의 부도탑도 마찬가지지만 팔각원당형 부도에서 팔각은 팔정도(八正道, the Noble Eightfold Path)를 의미한다. 팔정도는 다시 말해 불교에서 참된 수행을 하기 위한 8가지 덕목을 이르는데 이런 과정을 완전히 이루어냄으로서 공(空)의 상태 즉, 아무것도 없는 완전한 수행의 완성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부도탑의 몸돌을 구(求)형으로 만든 이유는 팔정도의 수행을 거쳐 수행이 완성된 고승을 기리는 의미가 숨어있다.

지공국사 부도탑과 석등

지공국사의 석등도 조각이나 장식이 없는 단순화된 모양을 보여주고 있는데 모든 부재가 4각으로 되어있는 3단의 받침돌 위에 화사석과 지붕돌을 조성하였다. 화사석은 양옆으로 두장의 돌을 세워 만듦으로서 앞, 뒤 2곳에 창을 만들었고, 지붕돌은 부도에서와 같이 두툼한 돌 하나에 네 모서리 선만 강조하였고 머릿돌에는 머리장식이 단순하고 소담하게 조성되어 부도탑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지공국사비 앞에는 입적 후 나옹화상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회암사지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가 서있던 자리가 있다. 1997년 보호각이 불에 타 비의 몸돌이 파손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를 실시한 후 보존관리상 2001년도에 경기도박물관에 위탁 보관하고 있어서 현재는 비 받침돌인 귀부가 그 자리에 남아있으며, 원형을 본 따서 만든 비가 세워져 있다. 남아있는 귀부는 고려시대부터 보여지던 거북의 모습과 약간 다르다. 대부분의 귀부가 무섭게 그리고 사실적으로 만들어졌던 것에 비해 이 귀부는 단순하고 약간은 표정에서 김장감이 완화되어 다가서는데 일말의 거부감이 안 들어서 좋다.

나옹은 원래 이곳 회암사에서 불교에 입문하였다. 이후 원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은거하다가 나중에 회암사의 중창을 이루었으며 말년에는 또 다른 왕사였던 여주 신륵사에 머물다 57세에 입적한다. 나옹의 부도탑도 지공국사의 것처럼 단순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팔각 기단 위에 팔각 3단의 받침돌을 두었는데 중간돌은 원형에 가까운 팔각이고 몸돌은 구형에 가까운 팔각이다.

지붕돌의 크기는 아래 몸돌이나 지붕장식에 비해 작아 보이고 따라서 경사도 급격하며 여덟 면 모서리에 처마를 만들고 끝 부분은 귀꽃의 형태처럼 도톰하게 들어올려져 있다. 지붕돌의 장식은 마치 몇 개의 보륜을 겹쳐놓고 맨 위에 보주 하나를 올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앞을 지키는 석등은 지공국사의 것과 거의 동일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나옹화상 부도탑과 석등

의문인 것은 나옹의 부도탑이 스승인 지공의 것보다 윗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묘 터를 쓸데에도 그렇지만 윗대보다 위쪽에 묘 터를 잡는 법이 없는데 왜 이렇게 조성된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한 곳에서 고승대덕 3명의 부도탑을 보게된 행운으로 겨울 추위에서도 입안에는 침이 괸다. 또 그만큼 이곳 절에 주석 했던 또 한 명의 국사 보우의 말년과 타의에 의한 죽음이 안타까운 것도 사실이다.

봉건주의 왕조시대에 있어서 불교는 무슨 의미였을까?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저 밥 굶지 않고 아프지 않게 해주며 자식 복 많을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의 대상으로 마치 삼신할머니나 당산나무의 의미나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왕가에 있어서 불교의 의미는 사직의 안녕을 비는 것에 더하며 부처님의 원력을 통하여 통치수단을 공고히 하고자 했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왕권이 부처의 힘과 동일시되는 느낌을 들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에 반해 은둔 수행자의 삶을 살다 현실로 나온 고승들의 의도는 왕과 다른 동상이몽을 했을지도 모른다. 속세에 나와 현실적으로 피폐해진 불교의 중흥을 꾀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기층 백성들에게 불법의 진리를 전하고자 하는 수단으로 왕의 스승 노릇을 하고 신하노릇을 하면서 숨은 목적을 달성하려 하지는 않았을까?

바람이 자고 햇살만 가득한 회암사지를 돌아 나오며 나옹의 시 한 수 기억해 본다.

남과 나를 위해 하는 일 비록 착하다 해도
이 모두 생사에 윤회하는 씨앗이 되니
솔바람 불어오는 칡넝쿨 달빛 아래서
번뇌가 없는 조사선(組師禪)을 닦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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