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으로 앞선 2회 무사 1루에서 요미우리 6번 타자 이승엽(31)이 타석에 들어섰다. 히로시마의 선발투수는 왼손 아오키 다카히로. 아오키는 초구부터 133km 직구를 한가운데로 던졌다.
10일간 홈런포에 굶주렸던 이승엽이 먹잇감을 놓칠 리 없었다. 이승엽은 오랜만에 그답게 시원하게 방망이를 돌렸고 타구는 그대로 오른쪽 담장을 넘겼다. 일본프로야구 진출 후 기념비적인 100호 홈런을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승엽은 평소처럼 담담히 베이스를 돌았다. 덕아웃으로 돌아온 뒤에도 옅은 미소만 지을 뿐,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승엽의 100호 홈런은 그냥 그렇게 보내기에는 너무나도 값졌다.
▲ 일본행 그리고 좌절·불운
2003년 12월11일. 이승엽의 지바 롯데 입단결정 기자회견이 열렸다. 하지만 이승엽의 표정이 밝지 못했다. 기자회견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올 때에야 마음의 결심을 할 정도로 진로를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기자회견 마지막에는 눈물까지 보였다.
이승엽은 예전부터 메이저리그에 대한 꿈이 있었고 2003년 아시아 홈런 신기록(56개) 달성으로 그 어느 때보다 메이저리그 진출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있었다.
그러나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이승엽을 홀대했다. 가장 적극적으로 영입의사를 보인 LA 다저스 역시 이승엽에게 마음의 상처만 줬다. 다저스가 제시한 몸값은 총액 100만 달러였지만, 순수 연봉은 50만 달러도 채 되지 않았다. 더블A 취급을 받으면서 메이저리그에 가기에는 이승엽의 자존심도 그렇지만, 한국프로야구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바 롯데 입단식 때에는 달라진 모습이었다. 아시아 홈런왕이라는 타이틀은 미국에서 그저 그런 경력 중 하나일지 몰라도 일본에서는 더없이 화려하고 멋들어진 타이틀이었다. 지바 롯데도 이승엽에게 큰 기대를 걸었고, 마린스타디움을 처음 방문했을 때에도 이승엽은 호기로운 모습으로 남벌을 자신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일본 진출 첫 해부터 허무하게 무너졌다. 개막 한 달 보름여 만에 2군행을 통보받고 1군에서 짐을 싸기도 했다. 일본 특유의 ‘현미경 야구’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었다. 일본 투수들은 초구, 볼카운트 0-2에서도 변화구를 던졌다. 투구 템포도 빠르게 또는 느리게 가져가며 이승엽을 현혹시켰다. 변화구와 수 싸움에 말려 헛스윙하기 일쑤였다. 2004년 성적은 타율 0.240·14홈런·50타점. 초라하기 짝이 없는 성적표였다.
일본 진출 첫 해부터 생애 처음으로 2군의 쓴맛까지 보며 좌절을 경험한 이승엽은 2년차를 맞아 각오를 달리했다. 때마침 지바 롯데는 김성근 감독을 영입, 이승엽의 부담도 한결 덜어졌다. 김 감독은 기술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인 면에서도 이승엽을 강하게 조련했다. 일본야구에 대한 내성을 기르고 적응도를 키운 이승엽은 2005년 타율 0.260·30홈런·82타점을 기록하며 첫 해 부진을 씻어냈다.
그러나 바비 발렌타인 감독으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하며 플래툰 시스템에 갇혀야했다. 지바 롯데 시절 이승엽의 타순은 클린업 트리오도 아닌 6·7번이었다. 심지어 8번 타자로 기용된 적도 있었다. 이승엽이라는 이름값을 고려하면 이 역시도 좌절이요, 불운이었다.
▲ 요미우리행과 명예회복
이승엽은 지바 롯데와의 2년 계약이 끝나자마자 ‘명문’ 요미우리로 이적했다. 처음에는 지바 롯데 잔류가 유력했다. 2년 동안 퍼시픽리그 투수들에 대한 적응을 끝마친 이승엽으로서는 따뜻하고 정감 넘치는 팀 분위기의 지바 롯데에 남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계약금이나 연봉도 두둑했다.
하지만 이승엽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요미우리로의 이적을 결정했다. 안정된 지바 롯데를 박차고 가시밭길과도 같은 요미우리를 택한 것. 그러나 주전 1루수를 보장받지 못한 지바 롯데에 머무르는 것은 이승엽에게 시간 낭비였다. 오히려 안정보다 변화가 필요했다. 그곳이 ‘한국인의 무덤’ 요미우리라 할지라도 말이다.
요미우리에서 이승엽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초대 홈런왕(5개)에 오르며 미국은 물론 일본에도 강한 인상을 남긴 이승엽은 당당하게 요미우리의 제70대 4번 자리를 꿰찼다. 입단식 때부터 이승엽을 매우 마음에 들어 한 하라 다쓰노리 감독은 OB들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이승엽을 4번으로 밀어붙였다.
이승엽은 5월 한 때 잠깐 슬럼프를 겪고 시즌 막판 부상으로 고전한 것을 제외하면 시즌 내내 불방망이를 휘둘렀다. 동료들의 지원은 적었지만, 묵묵히 홀로 팀 타선을 이끌었다. 143경기에서 타율 0.323·41홈런·108타점을 기록했다. 시즌 막판 왼쪽 무릎 부상만 아니었더라면 개인타이틀을 하나쯤 건질 수도 있었다.
지바 롯데에서 좌절과 불운으로 점철된 2년을 떠올린다면 지난해 성공은 그야말로 쾌거였다. 그리고 아시아 홈런왕으로서 명예회복에도 성공했다. 마쓰이 히데키(뉴욕 양키스)가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이후 요미우리의 4번은 말 그대로 네 번째 타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승엽은 마쓰이 못지않게 거인군단 4번의 존재감을 어필했다. 더욱이 구단과 코칭스태프에서도 믿음과 신뢰를 아끼지 않았다. 하라 감독은 이승엽의 야구에 대한 자세와 성실함을 높이 사며 그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주전포수이자 주장인 아베 신노스케는 물심양면으로 이승엽의 적응을 도왔다. 요미우리팬들도 거인군단의 명예를 세운 이승엽에게 환호했다.
이승엽은 장고 끝에 메이저리그 진출을 포기하는 대신 일본프로야구 최고연봉(6억5000만엔)에 요미우리와 재계약했다. 완벽한 명예회복이었다.
▲ 계속되는 자신과의 싸움
완벽한 명예회복 뒤 맞은 첫 시즌. 그러나 안타깝게도 올 시즌 이승엽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72경기에서 타율 0.257·15홈런·41타점을 기록하는데 그치고 있던 것. 상대팀에서 앞 타자를 두 차례나 고의4구로 거르며 이승엽과의 승부를 택했으며, 타순은 4번에서 6번으로 떨어졌다. 지바 롯데 시절만큼이나 괴로운 나날이다. 무릎·어깨·손가락 등 안 아픈 곳이 없을 정도로 종합병원인 몸 상태가 부진의 가장 큰 이유라지만, 정상에 오른 뒤 찾아오는 하산의 시간은 더욱더 힘들기 마련이다. 비록 타이틀을 따내지 못했지만, 지난해 어마어마한 위력을 선보인 데다 최고연봉자의 위치에 까지 오른 이승엽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부진이다.
하지만 이승엽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 기록한 324개의 홈런은 결코 이승엽만의 힘이 아니었다. 이승엽의 주위에는 좋은 스승이 많았고, 그 스승들의 보살핌 아래 이승엽은 곱게 자랐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기댈만한 스승이 없었다. 김성근 감독이 인스트럭터로 1년간 함께 했고 하라 감독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일본에서 이승엽은 외국인선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용병’이다. 용병이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리그에 대한 적응, 문화에 대한 적응, 밀려오는 외로움, 높은 기대치, 퇴출 불안감 등 타지에 나와 새로운 환경에서 야구를 한다는 것은 말처럼 결코 쉽지 않다. 더욱이 우리나라처럼 해외파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환경에서는 정신적 부담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새로운 환경과 주위의 기대치에도 불구하고, 이승엽은 일본에서 3년 반 만에 100홈런을 쌓았다. 100홈런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낸 매우 값진 산물이다. 이제는 어느 정도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도틀 튼 듯하다.
부진이 깊어져도 크게 내색하지 않고, 야구장 밖에서는 야구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다스리고 있다. 한국에서는 언제나 챙겨주는 사람이 많았지만, 일본에서는 매일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며 한 단계 더 성숙해진 모습이다. 물론 자신과의 싸움은 현재진행형이다. 그 싸움에서 계속 이긴다면 이승엽의 일본프로야구 200홈런·300홈런도 결코 꿈이 아니다. ☞´대기록 앞둔´ 본즈…더 나은 신변 보호요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