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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 비웃는 서울대? 타당이나 한가


입력 2011.04.11 08:56 수정 2013.05.22 15:31        김헌식 문화평론가 (codessss@hanmail.net)

<김헌식 칼럼>있다는 교육자들이 외려 길을 막는 형국

오바마 대통령은 많은 연설과 인터뷰에서 한국의 교육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출신의 대통령이 이런 주장을 하니 한국의 교육이 뭔가 달라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인의 처지에서 교육 현실을 살피면 기분만 좋아하기에는 뭔가 찜찜하기도 했다. 이번에 카이스트 사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해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오바마 대통령도 결국 한국 교육시스템에서 최종승리한 이들과 주로 어울렸을 가능성이 많으니 이상하지 않겠다.

한 학생이 카이스트에서 영어강의 때문에 괴로워했다는 기사가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개인의 실력에 원인을 돌렸다. 그 학생이 그 괴로움에 목숨을 끊었어도 말이다. 그 학생은 실업계 출신이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극단적 선택에 과학고, 영재고교 출신들은 아직 없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불행한 일이지만 특수한 개인의 심리적 심약함이라 보는 시선도 다수였다. 하지만, 학생들이 연이어 목숨을 버렸다. 그것은 한 개인의 문제는 아니었다. 더구나 교수도 그 뒤를 이었다. 무엇보다 카이스트 출신에 최우수교수가 말이다. 카이스트의 종착이 이런 것인가.

으레 그렇듯이 그간 일등만 했던, 아니 경쟁에서 승리를 해온 전문가들이 처방을 내렸다. 경쟁의 중요성이나 타당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잦아들어도 삶의 의미와 가치, 행복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심리학적 처방은 여전히 난무한다. 자살은 주변에 너무 충격을 주고 개인에게 불행한 일이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말로 미디어를 통해 오히려 자극한다. 강한 금지는 오히려 그 선택을 부추기는 반동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자살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자살을 부추긴다.

자살은 단순히 자신의 괴로움 때문에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 사이드 이펙트(Side effect)를 염두에 둬야 한다.

예컨대 자살은 많은 경우, 시위와 항거의 의미가 강하다. 비록 유서를 통해 구체적인 원인과 동기를 밝히지 않아도 말이다. 카이스트의 사례는 정확하다. 경쟁우위자들은 그 학생들을 아직도 잘못한 애들 취급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그들을 하루 아침에 문제있는 인간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일견 향후 비슷한 사례를 방지하기 위한 심리가 담겨 있겠지만 그들의 행동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다. 즉 무엇인가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단기적으로 많은 사례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단순히 충동이나 모방이라고 규정한다면 그들을 자아의식을 가진 존재로 보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후의 문제는 학생들이 아니라 서남표 총장을 비롯한 의사결정자들에게 있다. 그런데 심리학자들은 개인의 마음자세를 다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카이스트 교수의 자살은 단순히 심약한 학생들의 마음이 문제가 아님을 결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죽음은 항의이다. 이는 결국 한국식 엘리트 교육과 초고강도의 경쟁체제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카이스트와 서울대를 싸움 붙인다. 근거가 없는데 싸움을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울대 교수가 카이스트의 체제를 비판한 것이 그 근거가 되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서울대학교도 자살하는 학생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하지만 카이스트처럼 100% 영어강의 벌점형 등록금제같이 결정적인 제도적 계기가 없기 때문이다. 교육제도의 정점들이 이렇다면 심각한 일이다. 전국의 대학들이 이를 따라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특히 카이스트 체제는 압축성장형 한국경제모델과 아주 닮았다. 서구 사회가 수백년 동안 이룬 과학을 단기간에 따라잡으려 한다. 한국형 발전 모델이 가진 한계의 봉착으로 최근 더 강화되었다. 선진국이 되려면 어쩔수 없다며, 학생들의 골을 짜내고 다리를 찢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처음부터 그러한 골육경쟁의 전선에 동의할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그것은 바로 한국사회의 문화적 기운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구성원이 벗어나면 존재의 가치를 버려야 할만큼 근원적이다. 리처드 도킨슨은 < 만들어진 신>에서 무신론주의 견해에서 모태신앙을 극렬하게 비판한다. 모태신앙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도킨슨이 문제로 보는 것은 선택의 자유다. 종교를 자신의 필요성과 의지로 선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모의 종교를 그대로 자녀에게까지 그대로 강요하는 셈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대학생들이 자신의 학과를 선택하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다. 부모의 교육관이나 직업관이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한국과 같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중요시하는 문화적 행태가 많을수록 대학의 진학은 학생의 적성이나 꿈보다는 부모의 소원이나 사회적 우대를 더 많이 고려한다. 이러한 것은 문화적으로 당연시되기 때문에 문제의식으로 갖지 않는다. 당연한 것이며 그것에 문제제기하는 것은 부질 없는 짓이거나 경쟁에서 진 루저들의 변명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런 문화적인 면은 각 개인들의 욕망과 집단적인 부작용을 지적하는 수준에 머물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의 욕망이나 행태를 줄여 해결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제도적 장치를 어떻게 구축하거나 그것을 바꾸는가에 따라 문화적 행태들이 달라진다고 할수도 있다.

자살은 대입승자 독식문화가 더 악화시킨다. 젊은이들의 일생이 대학에 이미 정해지기 때문이다. 대학은 사실 기초적이고, 일반적인 전공 교양과 소양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대학원은 이를 심화시킨다. 학벙에 관계없이 소양이 쌓이면 전문가로 육성될 기회를 자유롭게 부여해야 한다. 로스쿨이나 의학전문대학원은 바로 전문성과정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

사회가 실력과 경륜에 따라 열린 구조를 가진다면 이는 달라질 것이다. 고시체제와 대기업 체제도 마찬가지다. 한번 고시출신은 영원히 승승장구하고, 대기업 출신은 모두 그곳에서 승승장구한다. 인생이 모두 20대에 결정되는 구조는 21세기 열린 사회에서 매우 한계를 많이 낳을 수밖에 없다.

이런 점들이 왜 젊은이들의 자살과 연관 되는 것인가. 부모의 기대와 꿈을 충족시키는 대학선택, 그리고 사회문화적으로 그럴듯한 평가에 맞추어 그것에 대한 맹목적 돌진과 방조의 문화가 부정적인 결과를 심화시킨다. 대학 인생 결정시스템은 폭넓은 인생 행로들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좁은 길이 불투명하게 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될 수 있다.

자신의 꿈과 적성을 모른채 사회적 평가와 부모의 기대, 문화적 분위기는 어느순간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데, 그것 가운데 하나가 자신의 장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이 들 때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앞으로 돌진하는 소와 같다. 아니 경주말이다. 오로지 앞만 보게 만들어 경주에서 이겨야 하는. 그들은 경쟁에서 지면 도태된다는 불안에 있다. 그러한 선택에서 경주말은 스스로 커다란 부상으로 죽음을 유도시킨다.

하지만 경주장이 아닌 환경에 놓인 말들은 더 넓은 세상을 본다. 트랙을 벗어나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간다. 트랙에 빠진, 앞만 보도록 통제된 경주말들에게 마음을 굳게 잡고 행복과 삶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자아를 충만 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된다.

길이 여러가지라는 점을 제도나 문화, 교육시스템이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러한 환경에 익숙하지 않는다면 트랙의 끝은 비참한 결과들을 낳을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겸손해야한다. 길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교육자들은 오히려 길을 막는다. 더구나 21세기 문화융합의 시대에 이전의 길을 어떻게 확신하고 앞만 보게 하겠는가.

글/김헌식 문화평론가

김헌식 기자 (codess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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