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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일요일 새벽 우리군은 외박중이었다


입력 2011.06.25 08:14 수정         김소정 기자 (bright@dailian.co.kr)

<6.25 61주년 특별인터뷰>참전유공자회 유재식 장인준 박세영 옹

"61년전 전쟁의 기억은 지금도 오늘도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라"

6.25 참전용사 유재식, 장인준, 박세영 옹.(왼쪽부터) 6.25 참전용사 유재식, 장인준, 박세영 옹.(왼쪽부터)

“지금 세대가 북의 무서움도 모르고, 지금 누리는 자유도 그저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은 6.25전쟁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의 목숨과 맞바꾼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61년 전 6.25전쟁이 발발하자 수많은 젊은이들이 군에 자원입대했다. 피난길에 나섰다가도 발걸음을 돌렸다. 실탄장전 한번 해본 적 없던 이들은 허공에 소총 몇 발 쏴보고 곧바로 전쟁터에 투입됐다. 동족끼리의 전쟁이었지만 전쟁터는 마치 도살장을 방불케 했다.

18세의 어린나이에 학도병으로 6.25전쟁에 참가한 유재식 씨는 마치 도살장과도 같았던 교암산 전투를 이렇게 떠올렸다.

18세의 어린나이에 학도병으로 6.25전쟁에 참가한 유재식 옹. 18세의 어린나이에 학도병으로 6.25전쟁에 참가한 유재식 옹.
“그때 산골 후미진 곳에 중공군과 불과 50~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초소를 만들어 대치했어요. 나뭇가지를 꺾어 지지대를 만들어 총을 걸어놓고 적군 한명씩을 겨냥하고 있다가 움직이는 즉시 머리를 관통시키는 겁니다. 낮에는 우리 국군이 중공군의 총탄에 이런 식으로 죽어나갔습니다.”

6.25가 일어난 1950년 당시 충주중학교 6학년으로 21세였던 장인준 씨는 같은 학교 친구 13명과 함께 자원입대를 했다. 등록처에 가니 성명도 적지 않은 증명서 한 장을 손에 쥐어주며 대구에 있는 군부대를 찾아가라고 했다.

군에 들어가기 위해 피난민들과 뒤섞여 걷던 길은 이미 전쟁터였다. 사람들은 이고 지었던 짐들을 살기 위해 하나 둘씩 버렸다. 등에 쌀자루를 지고 그 위에 노인을 얹고 가던 한 남자도 도저히 안 되니까 눈물을 삼키며 쌀자루를 버리고 떠났다.

6.25전쟁 중인 1950년 12월 6일 미국 상선 레인 빅토리호가 동원되는 일명 ‘흥남철수작전’이 시작됐다. 당시 작전에는 남한에서 유일한 전투함이던 ‘백두산호 701함’도 포함됐다. 이 배의 후미 포장을 맡았던 박세영 씨는 “눈보라가 휘날리는 추운 겨울 보름 가까이 배를 타고 이동하다보니 애들과 노인 중에 굶어 죽거나 얼어 죽고, 산 사람도 반쯤 죽어서 부산까지 내려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흥남부두에는 미처 배에 오르지 못한 10만여명이 울부짖었고, 피난민들을 태운 배 안 역시 삶과 죽음으로 뒤엉켰다.

강원도 춘천이 고향인 유재식 씨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직접 포성을 들었다. 당시 북한이 크고 작은 도발을 벌여오던 때라 처음에는 전쟁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침에 보니 벌써 옥산포까지 전차를 앞세우고 북한군이 밀고 내려왔다.

당시 18세였던 유 씨는 처음 산속에서 숨어 3개월을 고생하다 피난길에 올랐다. 9.28 서울수복 이후 피난처에서 돌아온 춘천고 학생 120명 전원은 ‘나라가 없으면 학생도 없다’는 결심으로 학도병을 지원했다.

6사단 수색중대에 들어간 유 씨는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처음으로 중공군의 기습을 당했다. 1950년 10월 25일 밤 하늘에서 새파란 불빛이 왔다 갔다 하더니 갑자기 빠바방하면서 크게 포 쏘는 소리가 들렸다. 큰일 났다 싶은 순간 여기저기서 피리소리, 꽹과리 소리가 빗발쳤다. 순간 어릴 때 ‘서리’하던 기억이 나면서 냅다 북쪽을 향해 뛰었다.

그때 남쪽으로 도망하던 군인들은 거의 죽거나 붙들렸다.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나와서 ‘낙오자선’에 걸려 목숨을 건졌다. 이렇게 죽을 고비를 한번 넘기고서야 유씨는 비로소 국군 이등병이 됐다.

중공군을 코앞에 두고 대치하던 교암산 전투에선 철모가 밥그릇도 되고, 용변을 보는 유일한 도구이기도 했다. 철모에 용변을 모아뒀다가 저녁이 되면 한 군데에 모아 파묻는 식이었다.

당시 군인들이 먹는 세끼 식사는 나이 든 노무자들이 날랐다. 주로 한밤중에 날랐지만 식통에 철쭉 등을 꽂아 아무리 위장을 해도 오다가 포를 맞아 죽어나가기 일쑤였다. 그러면 또 다음 노무자들이 목숨을 걸고 밥을 해서 날랐다.

1953년 7월 13일 초저녁 유 씨는 예전의 그 파란 조명탄이 공중을 날라다니는 것을 목격했다. 즉시 중대본부에 보고했지만 위에선 위기 상황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내 중공군의 포격이 시작됐고, 수색중대 120명 중 최종 7명이 살아남았다.

당시 충주중학교 6학년으로 21세였던 장인준 옹. 당시 충주중학교 6학년으로 21세였던 장인준 옹.
장인준 씨는 군에 입대한 처음 2개월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굶으면서 진격했다. 갑작스럽게 발발한 전쟁 탓에 군도 미처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탓이었다.

전쟁은 방어선을 뺏고 빼앗기는 싸움이었다. 한번 뺏기게 되면 그 다음 유리한 방어선까지 후퇴를 해야 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다. 인제군 원통리 서화리지구 전투 역시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국군과 인민군이 올라갔다 내려왔다를 몇 달째 반복하는 것이었다.

장 씨는 1951년 한해를 서화리지구에서만 싸웠다고 한다. “산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11사단과 8사단이 맞붙어 진을 쳤는데, 한밤중에 양 사단 사이 물이 흐르는 골짜기에 인적이 느껴지면 십중팔구 간첩이었어요. 양 사단에서 내몰면 도망을 치다 지뢰를 밟아서 일대가 불바다가 되기 일쑤였어요.”

유재식 씨가 사지나 다름없는 교암산 전투지를 헤쳐나와 낙오자선에 모이자 곧바로 중대 편성이 이뤄지면서 406고지 탈환을 위한 진격 명령이 떨어졌다. 화천에서 금성으로 가는 길목에 높은 지대인 406고지는 주변의 보급로를 감제할 수 있는 곳으로 이곳을 장악하면 반경 2.5㎞를 후퇴 또는 전진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남과 북이 오랫동안 서로 대치하며 뺏고 빼앗기를 반복했다.

중대장이던 유 씨는 3번의 돌격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적의 수류탄과 소총에 당해내지 못했다. 남은 인원이 30여명 남짓 전멸에 가까운 희생을 치르면서 연대장에게 불려가 주먹다짐도 받았다.

다시 고지 탈환의 순간 미군 비행기가 나타났지만 빙빙 맴돌다 폭격을 하지 않고 사라졌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적이 점령하고 있는 고지 정상에 앞서 점령했던 아군의 대공포판이 놓여 있었다.

이제는 사생결단을 낼 때. 유씨는 ‘진지 하나 점령해서 군신이 되어보자’는 각오로 수류탄을 집어 들고 정상을 향해 뛰어들었다. 흩어지는 중공군들 사이에서 대장 한명과 백병전을 펼쳤다.

칼빈총으로 적의 심장부를 쐈다고 생각하는 순간, 중공군의 따발총 소리가 울렸다. 팔과 어깨뼈, 갈비뼈 8개가 부러졌다. 뼈를 맞고 튕긴 총알이 심장 가까이 박혔으나 다행히 심장을 뚫지는 못했다. “피를 토하며 쓰러진 나에게 부하들은 후송갈 수 있는 ‘행복탄’을 맞았다며 용기를 주더군요.”

406고지는 여러 날에 걸쳐 여러 부대가 몇 차례씩 주인을 바꿔가며 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유 씨의 수색중대가 완전 탈환했다. 유씨는 “만일 이때 406고지를 점령하지 못했더라면 휴전선의 판도는 2㎞ 이상이나 남쪽으로 그어져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6.25전쟁이 발발할 당시 연세대 1학년이던 박세영 옹. 6.25전쟁이 발발할 당시 연세대 1학년이던 박세영 옹.
6.25전쟁이 발발할 당시 연세대 1학년이던 박세영 씨는 “6.25전쟁 발발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일요일 새벽 4시를 전쟁 발발 시점으로 잡은 것은 전날인 토요일 군대에 외박이 유독 많다는 점을 노린 것”이라며 “앞으로도 북한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초등학교부터 다시 학교에서 반공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씨는 6.25전쟁 직전 우리가 미 해병부대에서 사들인 전투함인 ‘백두산호 701함’의 활약상도 소개했다. 상대적으로 해군 병력이 없던 북한에 비해 포함이 구비된 우리 해군은 주로 해안선을 따라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봉쇄작전을 펼쳤다.

박 씨는 6.25 당일 북의 기습공격으로 하마터면 최대 피난처인 부산까지 잃을뻔했던 대한해협해전에서 북한의 수송선을 침몰시켜 첫 승리를 이끈 장본인이기도 하다. 당시 인민군 700여명이 타고 있던 북의 수송선에는 박격포 등 전투 준비가 완벽히 갖춰져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도 북한은 이번 연평도 포격을 했던 서해 무도와 동해 흥남 입구에 가장 큰 포대를 갖춰놓고 남한을 공격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소련이 준 배의 움직임에 따라 자동 발사되는 신식 자동포대가 갖춰져 있었다.

우리 지대함은 미국 항공모함의 보호를 받으며 전투를 치렀다. 미 항공모함은 호랑이 귀 끝에 위치한 한반도의 최북단인 웅기에 위치해 있으면서 격전지에 전투기를 띄워 지원 사격을 하는 식이었다.

우리 해군은 동해안과 서해안을 두루 다니다가 진해에서 보수를 마치고 다시 파견되는 식이었다. 서해에선 주로 백령도에 위치해 일제히 쌍안경으로 간첩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당시 한 표적만 놓쳐도 후방에는 바로 비상이 걸릴 정도로 철두철미했다.

이번에 <데일리안>이 만난 유재식, 장인준, 박세영 할아버지는 일본의 식민지 시대에 태어났다. 이후 1945년 8.15 해방을 맞았지만 너무 어려 광복의 기쁨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꽃다운 젊은 나이에 6.25전쟁을 맞아 100만여명에 가까운 전우를 잃었다.[데일리안 = 김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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