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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NLL 협상 알고보니 북측 입맛대로


입력 2012.11.30 22:09 수정         김소정 기자

김명섭 “NLL은 정전협정에 근거를 둔 휴전선”

서해 북방한계선(NLL)은 한국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연합군과 중국·북한 간에 체결한 7.27정전협정에 근거를 둔 휴전선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30일 한국국제정치학회 연례학술회의에서 발표한 ‘6.25전쟁 휴전체제의 재고찰과 평화체제의 모색’이란 연구 논문에서 “NLL은 7.27정전협정문에 포함된 지도 위에 표시되지는 않았지만, 확정 후 유엔군사령부가 공산 측에 정식 통보했고 공산 측은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논문에서 한반도의 휴전 체제를 불러온 7.27정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 NLL을 포함한 휴전선의 체결 과정을 당시에 작성된 여러 기록물을 토대로 분석했다.

논문에선 특히 육상의 휴전선인 군사분계선(MDL)과 달리 해상의 군사분계선인 NLL이 쟁점이 되고 있는 것과 관련해 공산군측과 유엔군측의 협상 과정을 상세히 기술했다.

김 교수는 “군사분계선의 위치를 놓고 공산군측과 유엔군측이 정전협상을 통해 서로 밀고 당기는 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육상에서 ‘소유한 대로 소유한다’는 원칙이 적용된 것과 달리 해상의 휴전선에선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채 공산 측에 양보됐다”고 했다.

북한과 중국은 해상 휴전선을 전쟁 전 상황으로의 복귀 원칙을 주장해 관철시킴으로써 38도선 이북의 서해와 동해에서 유엔군을 철수시킨 것이다.

김 교수는 “정전협정 체결 당시 유엔군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정전협정이 규정하고 있는’ 1950년 6월 24일 북한이 통제하고 있던 도서였던 38도선 이북의 도서들인 서해 남포 서쪽의 ‘초도’, 청천강 서쪽 ‘대화도’와 동해 원산 인근 영흥만에 위치한 ‘여도’를 차지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해상의 휴전선은 정전협정에 첨부된 지도에 명기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상의 휴전선이 정전협정과 무관한 선은 아니었다”면서 “육상의 휴전선에 ‘소유한 대로 소유한다’는 원칙이 적용됐다면 해상의 휴전선에는 공산 측의 주장에 따라 전쟁 전 상황으로의 복귀 원칙이 부분적으로 적용됐다”고 설명했다.

이런가 하면 해상 일부는 전쟁 전 상황이 아닌 ‘소유한 대로 소유한다’는 원칙대로 북한에 귀속되기도 했다. 즉 해상의 휴전선은 북한 측의 주장대로 이중잣대가 적용된 것이다.

김 교수는 “정전협정 당시 북한이 차지하고 있던 옹진반도 인근의 기린도, 선위도 등은 모두 38도선 이남에 위치한 도서들로 1950년 6월 24일 대한민국이 통제하고 있었지만 공산 측에 양보됐다”고 했다.

게다가 “유엔사 측은 정전협정 제2조 제13항에 명기된 서해 5도를 잇는 선과 공산 측 관할의 연안선 사이에 위치한 북방한계선(NLL)을 38도선 이남으로까지 하향 설정해 모든 병력을 철수하는 조치를 취해 주었고, 그 결과 남포에서 38도선까지는 물론 38도선 이남의 기린도 및 선위도와 옹진반도 사이의 해면이 유엔군에서 북한 측에 넘어가게 됐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만약 NLL을 유엔군사령관이 설정한 선이라고 해서 이를 부정하게 되면 이런 북한 연안의 해면은 ‘소유한 대로 소유한다’는 원칙(uti possidetis: as you possess)에 따라 유엔사 관할이 되고, 북한은 해양봉쇄적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유엔군사령관이 정전협정에 근거해 설정한 NLL은 북한이 오히려 고마워했던 선으로 북한 조선중앙통신사는 1959년 ‘조선중앙년감’에 황해남도의 남쪽 한계선을 NLL로 명기해놓았다”고 그는 설명했다.

당시 유엔군사령부는 NLL을 북한과 중국 측에도 정식 통보했다고 한다. 이후 북한과 중국 측은 상당 기간 서해상의 NLL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논문에선 북한이 NLL을 인정해온 실례로 1963년 5월에 개최된 군사정전위 제168차 회의에서 북한간첩선의 침투·격퇴 위치와 관련해 유엔사 측이 ‘간첩선이 북방한계선을 침범하였기 때문에 사격했다’고 주장했을 때 북한 측은 ‘북한함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어간 적이 없다’고 언급한 대목도 언급했다.

북한이 NLL에 대해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한 것은 1973년 서해사태를 통해서였다. 1973년 10월부터 약 두 달간 북한의 NLL 침범 횟수가 40회 이상일 정도로 급격히 늘어났다.

‘서해사태’로 명명된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12월에 개최된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북한은 연해(沿海)의 권리를 주장하며 처음으로 NLL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어 1977년 7월에는 ‘200해리 경제수역’을, 8월에는 ‘해상 군사경계선’을 발표했다.

북한은 그 후에도 독자적으로 설정한 서해 해상경계선을 제시했다. 1999년에는 새롭게 설정한 ‘조선 서해해상 군사분계선’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서해 5개섬 통항질서’라는 이름으로 분쟁이 되는 NLL 지역에서 북한의 허가를 받아야지만 통행이 가능한 2개의 수로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3년 공식적인 문제 제기를 한 이후에도 북한은 1984년 북한적십자가 수해물자를 남측에 전달할 때 NLL을 기준으로 인계, 인수한 사례도 있다.

무엇보다 1992년 체결 발표된 남북기본합의서 제11조는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1953년 7월 27일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해온 구역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기본합의서 불가침 부속합의서 10조에서 ‘남과 북의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도 계속 협의한다’면서 ‘해상불가침 구역은 해상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해온 구역으로 한다’고 명기했다.

한편, 김 교수는 7.27정전협정문에 한국인의 서명이 없다는 이유로 ‘한국이 7.27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북한은 물론 한국의 일각에서 제기돼 온 것에 대해서도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한 서명자가 없었기 때문에 한국이 정전협정의 체약 당사자가 아니라는 주장은 얼핏 그럴 듯 해보이지만 알고 보면 성립될 수 없는 주장”이라며 “당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은 유엔군 사령관에 임시 이양돼 있었으므로 7.27정전협정문에 유엔군 사령관과 별도로 한국군대표가 서명할 필요는 없었다”고 말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경우에도 1918년 11월 11일 11시부터 발효된 정전협정의 연합군 측 서명주체는 연합군 총사령관 포쉬(Ferdinand Foch, 프랑스) 원수와 그를 보좌했던 웨미스(Rosslyn E. Wemyss, 영국) 제독이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7.27정전협정문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마오쩌둥이 아니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가 서명했던 것도 교전 중이던 군사령관의 자격으로 서명했던 것”이라면서 “따라서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 정전협정문에 서명하지 않은 것은 미국도 아이젠하워대통령이 아니라 유엔군사령관이 서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김소정 기자 (bright@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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