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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마지막 자존심 '미스트라'의 쓸쓸한 자취


입력 2015.08.02 09:57 수정 2015.08.02 09:58        박경귀 (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의 ad Greece 63>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왕국에 꽃피운 문화 예술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박경귀 (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 (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스파르타의 옛 도시 미스트라는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보루였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의 메메드 2세(Mehmed II, 1432~1481)에게 함락되지만, 미스트라는 1460년까지 7년이나 더 오래 독립을 유지했다. 미스트라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스파르타 지역과 아르고스 지역, 메세니아의 일부를 아우르는 모레아의 수도였다. 중세시대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모레아로 불렀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최강의 군사국가였던 스파르타의 영광의 자취가 스러진 이후 천여 년 이후에 스파르타의 남서쪽 험준한 타이게토스 산 기슭에 거대한 성채도시 미스트라가 세워졌다. 미스트라는 그리스인들에게 아픔과 영광의 역사가 교차한 애환이 서린 곳이다.

미스트라의 성채와 도시가 그리스인들의 주체적 활동에 의해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비잔틴 제국이 이슬람 세력의 흥기에 밀려 날로 영토를 잃어갈 즈음 십자군 원정에 나선 베네치아군과 프랑크족의 원정군들에 의해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 당하게 된다. 1204년의 일이다. 콘스탄티노플은 1261년까지 라틴족에게 지배되었다.

이슬람에게 빼앗긴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고 이슬람의 침범을 막아 달라고 원병을 요청했는데, 이들은 정작 성지 탈환은 뒷전에 두고 세상의 온갖 보물이 산적한 비잔틴 제국을 탐했던 것이다. 용병에 대한 대가를 받을 길이 막막할 수 있다고 판단한 십자군이 아예 제국을 통째로 차지해 나누어 가짐으로써 보상 받으려 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라틴인들에 의한 콘스탄티노플의 약탈은 세계사적으로 최대의 문명적 재앙 가운데 하나였다. 이 때 숱한 보물과 문화유산들이 약탈되어 서구 세계로 옮겨졌다.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약탈되어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4두마 청동상이 베네티아로 다시 약탈되어 간 것도 그때의 일이다. 델포이에 봉헌되었던 고대 그리스 최고의 청동 마상은 정복자들에게 연이어 약탈되는 수난을 겪었다.

라틴인들이 식민 지배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그리스 전 지역을 몇 개의 봉건 왕국으로 나누어 가진 것도 이 시기다. 이에 따라 테살로니카, 아테네, 모레아에도 전제군주국이 들어섰다. 이곳 모레아에는 프랑크족인 윌리앙 드 빌라르두앵(William de Villehardouim)이 전제군주가 되어 다스렸다. 빌라르두앵은 1246년경에 미스트라에 성채를 건설했다. 미스트라의 아크로폴리스가 빌라르두앵 성채로 불리게 된 사연이다.

미스트라의 아크로폴리스에 구축된 빌라르두앵 성채이다. 미스트라의 아크로폴리스에 구축된 빌라르두앵 성채이다.

빌라드두앵 성채의 서북쪽은 깎아지른 절벽이다. 절벽 너머로 티아게토스 산맥의 눈 덮인 봉우리가 보인다. ⓒ박경귀 빌라드두앵 성채의 서북쪽은 깎아지른 절벽이다. 절벽 너머로 티아게토스 산맥의 눈 덮인 봉우리가 보인다. ⓒ박경귀

빌라르두앵 성채의 내부이다. 군사시설이 있던 건축들이 폐허로 남아있다. ⓒ박경귀 빌라르두앵 성채의 내부이다. 군사시설이 있던 건축들이 폐허로 남아있다. ⓒ박경귀

미스트라의 빌라르두앵 성채에서 동남쪽으로 바라본 모습이다. 멀리 스파르타로 향하는 길과 스파르타 시가지가 보인다. ⓒ박경귀 미스트라의 빌라르두앵 성채에서 동남쪽으로 바라본 모습이다. 멀리 스파르타로 향하는 길과 스파르타 시가지가 보인다. ⓒ박경귀

라틴족의 지배로 비잔틴 제국이 완전히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 비잔틴 제국의 대다수를 형성하고 있던 그리스인들과 정통 계승자를 자처하는 귀족 세력은 라틴족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비잔티움 망명 정부를 세웠다. 1208년 알렉시우스 3세의 사위인 테오도루스 라스카리스는 터키의 서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니케아 제국을 세웠다. 이후 라틴족이 점령했던 콘스탄티노플은 결국 1261년 니케아 제국의 의해 수복되었다. 미스트라는 이보다 이태 전인 1259년 비잔틴 제국의 정통을 계승한 팔레올로구스 황가의 일족인 미카엘 팔레올로구스에게 양도되었다.

미스트라는 프랑크족이 펠로폰네소스 반도, 즉 모레아를 지배하기 위한 중심 도시로 건설되었다. 아크로폴리스에 견고한 성채가 세워졌고 전제군주를 위한 왕궁이 건립되었다. 스파르타의 땅에 이민족의 성채 도시가 세워졌던 것이다. 하지만 팔레올로구스 황가에 의해 비잔틴 제국이 다시 부활되면서, 미스트라 역시 황가의 일족이 전제군주가 되어 다스리는 비잔틴 제국의 전제군주국의 하나가 되었다.

미스트라의 도시 건설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어졌다. 해발 620여 미터의 산 정상에는 빌라르두앵이 성채를 구축했고, 팔레올로구스 황가에 의해 개축되었다. 신의 성역이자 유사시 군사적 시설로 이용되었던 고대 그리스 시대의 아크로폴리스와 달리 프랑크족 지배기와 비잔틴 제국기의 성채는 오로지 군사 방어기지 역할에 충실했다. 즉 성채 내에 군사시설 이외의 신전을 건설하지 않았다.

미스트라는 산의 7부 능선쯤을 중심으로 내성을 쌓아 상부 도시를 형성하게 했고, 3부 능선쯤을 경계로 외성을 두르고 하부 도시를 배치했다. 상부 도시에는 황궁과 귀족들의 가옥, 황실 교회가 들어섰다. 하부도시에는 수도원과 교회, 주요 관청의 건물과 공직자들의 가옥이 형성되었다. 일반 백성들은 외성 밖 산기슭과 가까운 평원에 마을을 형성해 살았다.

미스트라는 비잔틴 제국의 후기에 가장 번성한 지역이었다. 콘스탄티노플에 이어 실질적으로 제국의 두 번째 수도로서 학문과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리스 문명을 계승한 비잔틴 제국의 특성상 그리스인들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펠로폰네소스 지역에 있던 미스트라가 번영했던 것도 자연스럽다. 오스만 투르크 세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험지에 구축된 성채와 스파르타와 아르고스의 비옥한 평원을 곁에 둔 덕에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바다를 통한 상품의 교역이 용이한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미스트라는 그리스 민족의 마지막 자존심과 같은 곳이다. 그리스인의 제국이었던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배출한 곳이고,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보다 더 오래 전제군주의 독립을 지켜낸 곳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비잔틴 후기 문화 예술의 중요한 흔적을 유산으로 남겨 놓은 문화의 보고이기도 하다.

미스트라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거대한 종교도시이기도 했다. 하부 도시에 산재한 숱한 교회와 수도원은 스러져 가는 비잔틴 제국을 그리스도의 힘을 빌려 지켜보려 안간힘을 쓴 팔라이올로구스 황가의 애잔한 노력이 배어있다.

산정 곳곳에 흩어진 유산들을 돌아보는 미스트라의 답사는 최소한 서너 시간이 소요되고 산을 오르내리려면 힘도 꽤 든다. 조금 수월하게 돌아보려면 차로 산 정상의 성채로 오르는 입구까지 이동한 후 도보로 성채와 상부 도시를 답사하고, 다시 차로 이동하여 산기슭의 하부 도시의 유적지를 돌아보는 것이 좋다.

상부도시로 들어가는 후문 입구이다. 성 소피아 교회로 가는 길이다. ⓒ박경귀 상부도시로 들어가는 후문 입구이다. 성 소피아 교회로 가는 길이다. ⓒ박경귀

상부 도시에는 왕실의 교회였던 성 소피아 교회와 성 니콜라오스 교회 유적, 그리고 왕궁 유적이 있다. 왕국 유적은 보수 공사 중이어서 관람할 수 없다. 성 소피아 교회에서 왕궁 유적이 바로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성 소피아 교회는 벽돌식으로 쌓고 중앙을 작은 돔으로 구성한 전형적인 비잔틴 교회 건축물이다. 웅장한 대리석 석주로 바치고 메토프를 정교한 조각으로 수놓은 그리스 신전과는 달리, 편안하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왕실 교회인 성 소피아 교회이다. ⓒ박경귀 왕실 교회인 성 소피아 교회이다. ⓒ박경귀

성 소피아 교회의 지붕 모습이다. 벽돌식 건축의 소박한 미를 보여준다. ⓒ박경귀 성 소피아 교회의 지붕 모습이다. 벽돌식 건축의 소박한 미를 보여준다. ⓒ박경귀

왼쪽에서 바라본 성 소피아 교회의 모습이다. ⓒ박경귀 왼쪽에서 바라본 성 소피아 교회의 모습이다. ⓒ박경귀

하부 도시의 답사는 산기슭의 위아래와 좌우로 흩어져 있는 유적지들을 돌아보기 위해 많이 걸어야 한다. 5월이지만 30도를 넘는 무더위 날씨였다. 다행히 건조한 기후여서 교회 건물이나 나무 그늘에 들어서면 서늘해지며 땀이 쉬이 식는다. 그래도 두어 시간 오르락내리락 걷기 위해서는 생수 한 병은 꼭 들고 나서는 것이 좋다.

상부 도시 답사의 시작길이다. 오른쪽 상단의 왕궁 유적과 산 정상에 성채가 보인다. ⓒ박경귀 상부 도시 답사의 시작길이다. 오른쪽 상단의 왕궁 유적과 산 정상에 성채가 보인다. ⓒ박경귀

상부 도시 답사의 시작길이다. 내부에 골목이 많다. 안내 코스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길을 잃을 수 있다. ⓒ박경귀 상부 도시 답사의 시작길이다. 내부에 골목이 많다. 안내 코스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길을 잃을 수 있다. ⓒ박경귀

제일 먼저 성 디미트리오스 교회와 미스트라 박물관을 먼저 둘러보았다. 이 교회는 1291년에 미스트라에서 가장 먼저 건립되었다. 14세기에 마테오 주교에 복원되었고 이후 대성당으로 사용되었다. 교회의 제단 위 돔에 그려진 벽화가 유명하다. '성모자상'과 그 아래를 둘러싸고 그려진 '12사도의 집회'가 그것이다. 7백여 년이 지나 퇴색되고 손실된 부분이 많지만 장엄한 아름다움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성 드미트리오스 교회모습이다. 연한 황토색 기와를 얹은 성당 지붕이 아름답다. ⓒ박경귀 성 드미트리오스 교회모습이다. 연한 황토색 기와를 얹은 성당 지붕이 아름답다. ⓒ박경귀

성 디미트리오스 교회의 정원이다. 왼쪽이 교회 본당 건물이고 오른쪽이 박물관으로 쓰이는 부속건물이다. 박물관 단체 관람을 온 초등학교 학생들 한 무리가 모여 있다. ⓒ박경귀 성 디미트리오스 교회의 정원이다. 왼쪽이 교회 본당 건물이고 오른쪽이 박물관으로 쓰이는 부속건물이다. 박물관 단체 관람을 온 초등학교 학생들 한 무리가 모여 있다. ⓒ박경귀

성 디미트리오스 교회의 본당 제단 쪽 돔에 그려진 성모상이다. 14세기 프레스코화이다. ⓒ박경귀 성 디미트리오스 교회의 본당 제단 쪽 돔에 그려진 성모상이다. 14세기 프레스코화이다. ⓒ박경귀

비잔틴 제국의 정교회 교회의 내부는 성화로 가득하다. 기독교 신자들의 경우 성경의 주요 내용을 성화로 묘사한 장면들을 쉽게 구분할 수 있을 듯싶다. 그리스 정교회의 전신인 비잔틴 제국의 정교회 그리스도교 신앙은 성상 숭배와 성상파괴 운동을 겪으며 종국에는 성화와 성상이 신앙의 자연스런 수단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비잔틴 정교회는 비잔틴 미술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미스트라에 현존하는 많은 교회와 수도원은 바로 후기 비잔틴 미술의 주목할 만한 작품을 풍부하게 남겼다. 성 테오도리 교회에는 성모 마리아 상과 함께 성모 마리아 앞에 무릎 꿇은 마누엘 팔레올로구스의 조상화가 인상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번 답사에서 이 작품을 볼 수 없었던 게 못내 아쉽다. 내부 보수 중이었는지 관람이 허용되지 않았다.

문이 굳게 닫힌 테오도리 교회의 외경이다.  ⓒ박경귀 문이 굳게 닫힌 테오도리 교회의 외경이다. ⓒ박경귀

훌륭한 벽화를 간직하고 있는 페리블렙토스 교회도 꼭 들러보아야 할 곳이다. 이 교회는 1348년부터 1380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미스트라 유적지에서 가장 외진 곳에 있다. 서쪽 끝에 멀리 위치해서 대부분의 관광객이 잘 가지 않는 곳이다. 상부 도시와 하부 도시의 경계에 있는 판타나사 수도원을 둘러본 사람이라면 이곳을 들르기 바란다. 판타나사에서 발길을 돌려 다시 동쪽으로 내려오지 말고, 수도원의 서쪽 문으로 나와 서쪽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십분 정도 내려오면 페레블렙토스 교회를 만날 수 있다.

이 교회는 건축 방식도 독특하다. 평지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절벽과 잇대어 건축되었다. 따라서 비잔틴 교회의 전형적인 정방형 구조나 장방형 구조에서 벗어나 약간 변형 구조로 이루어졌다. 장소 자체도 특별하다. 외성의 서쪽 망루가 있는 서쪽 성채의 중요한 지점에 위치해 있다. 외성의 서쪽 성채와 붙어 있어 유사시에는 군사용으로도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교회 내부의 성화 중에 독특하게도 장군 상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페리블렙토스 교회의 모습이다. 오른쪽 상부에 망루의 유적이 남아 있고, 왼쪽 하단에 내성 성채의 일부가 보인다. ⓒ박경귀 페리블렙토스 교회의 모습이다. 오른쪽 상부에 망루의 유적이 남아 있고, 왼쪽 하단에 내성 성채의 일부가 보인다. ⓒ박경귀

교회 안은 조명이 없고 돔 둘레에 난 아주 작은 창을 통해 자연 채광이 들어오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어둡다. 이로 인해 벽화의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기 어렵고 사진 촬영은 더욱 힘들다. 더구나 후레쉬 사용이 허용되지 않는다. 어둑한 실내 상태여서서 중앙 돔과 이어진 볼트에 그려진 벽화들을 사진으로 제대로 잡아내기 어렵다. 더구나 타원형의 곡면에 벽화가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일반 답사객은 도록 화보에서 본 아름다운 모습대로 포착할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한 장면 한 장면 포착하는 것을 아예 포기했다. 공개된 도록 사진으로 감상하는 것으로 아쉬움울 달래야겠다.

이곳의 벽화는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고 작품성 또한 뛰어나 널리 알려진 작품이 여럿 있다. 중양의 돔에 '전능자 그리스도', 동쪽 볼트에 '그리스도의 승천', 남쪽 볼트에 '그리스도의 탄생'과 '세례식', 북쪽 볼트에 '그리스도의 변모', '최후의 만찬' 서쪽 볼트에 '의심하는 도마', '성령강림'이 묘사되어 있다. 페리블렙토스의 아름답고 섬세한 세밀화는 종교화나 회화를 전공하는 이들에게는 특별한 영감을 안겨줄 수 있을 것 같다.

교회의 중앙 돔에 '전능자 그리스도상'이 있다. 상단 오른쪽에 '그리스도의 탄생'의 일부가 보인다. ⓒ박경귀 교회의 중앙 돔에 '전능자 그리스도상'이 있다. 상단 오른쪽에 '그리스도의 탄생'의 일부가 보인다. ⓒ박경귀

페리블렙토스 교회의 남쪽 볼트에 그려진 벽화 '그리스도의 탄생'이다. 추상화 기법이 가미된 탁월한 작품이다. 출처: wikimedia commons  페리블렙토스 교회의 남쪽 볼트에 그려진 벽화 '그리스도의 탄생'이다. 추상화 기법이 가미된 탁월한 작품이다. 출처: wikimedia commons

비잔틴 제국의 탁월했던 장군 상을 묘사한 벽화이다. 성인들이 묘사되는 성화에 군인이 등장하는 것이 이채롭다. ⓒ박경귀 비잔틴 제국의 탁월했던 장군 상을 묘사한 벽화이다. 성인들이 묘사되는 성화에 군인이 등장하는 것이 이채롭다. ⓒ박경귀

갖가지 성화로 가득한 페리블렙토스 교회의 내부 ⓒ박경귀 갖가지 성화로 가득한 페리블렙토스 교회의 내부 ⓒ박경귀

비잔틴인들은 왜 교회를 성화로 가득 채웠을까? 성화는 신앙의 상징이자 수단이다. 그리스도와 성모의 성스런 육신을 바라보면서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고, 성경에 나오는 주요 테마를 성화로 묘사함으로써 대다수 문맹이었던 신자들을 효과적으로 교화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비잔틴 정교회의 성화 숭배는 특정한 우상화를 철저하게 배제하는 개신교의 관점과는 배치되지만, 동방정교회 나름의 교리와 역사성에 기인한 점을 관용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미스트라에 현존하는 수도원은 브론도키우 수도원과 판타나사 수도원이 있다. 이 가운데 판타나사 수도원은 지금도 수녀들이 거주하며 활용되고 있다. 이미 관람용 유적으로 변해 버린 교회와 수도원들이 고적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면, 판타나사 수도원은 고요한 가운데 따뜻한 인간의 체온이 느껴진다.

더군다나 수녀들이 기거하는 여성 전용 수도원이어서 그런지 들어가는 작은 문을 타고 올라간 화목이나 요사채 추녀에 놓인 화초들이 정겹다. 수도원 본당과 그 아래 잇대어 벼랑위에 지어진 요사채 사이의 소박하게 꾸민 작은 통로가 뜰 역할을 한다.

브론도키우 수도원 ⓒ박경귀 브론도키우 수도원 ⓒ박경귀

판타나사 수도원의 전경이다. ⓒ박경귀 판타나사 수도원의 전경이다. ⓒ박경귀

판타나사 수도원의 입구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화목과 화초가 가득한 통로가 뜰이다. ⓒ박경귀 판타나사 수도원의 입구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화목과 화초가 가득한 통로가 뜰이다. ⓒ박경귀

판타나사 수도원에서도 아름다운 성화들을 볼 수 있다. 성모상과 성모와 사도들이 어우러진 상이 고요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더구나 수도원의 정갈하면서도 무언가 엄숙한 분위기는 방문자에게 이런 저런 낯선 상념들을 솟구치게 만든다.

이곳의 수녀님들은 세속의 욕망과 안락함, 쾌락을 모두 내려놓고 신과의 대화로 삶의 고독을 잘 이겨내고 있을까? 타인보다 늘 자신과 마주하는 침잠하는 시간 속에서 이들은 어떤 성찰과 영감을 얻고 또 어떻게 자신의 삶으로 환류하고 있을까? 나는 잠시라도 세속의 열정과 의무감, 욕망과 인연들을 모두 내려놓고 오로지 나 자신과 치열하게 마주한 적은 있는가?

종교와 무관한 답사객에겐 판타나사 수도원의 작은 현관 회랑이 더 반갑다. 넓은 산록에 산재한 미스트라의 유적지를 땀을 흠뻑 흘리며 돌아보는 답사객에겐 이곳이 더할 나위 없는 쉼터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수도원 현관 좌우의 벽체에 나무 벤치를 잇대어 만들어 놓았다. 판타나사 수도원의 회랑에서 땀을 식히며 바라보는 스파르타 평원의 전경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평원 한 가운데 위치한 스파르타는 다른 도시와 달리 높은 산 위의 아크로폴리스도 없었고, 높고 견고한 성채를 두르지도 않았었다. 이제 저 곳이 고대 그리스세계를 두렵게 하던 무적의 전사들이 누비던 스파르타였다는 사실을 웅변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미스트라를 기반으로 비잔틴 제국의 명맥을 잇고자 했던 팔라이올로구스 황가는 왕궁의 창에서 스파르타를 내려다보고 강인했던 스파르타 전사들의 정신력과 용맹했던 전투력을 동경하면서 스러져가는 제국의 앞날을 걱정했을 것이다. 그들이 미스트라 성채 안에 열성적으로 정교회 교회와 수도원을 짓고 성역으로 만들었던 이유도 신의 가호를 통해 제국을 살려보려던 지난한 몸짓이었을 것이다.

수도원 제단 위 돔에 그려진 <성모상>이다. ⓒ박경귀 수도원 제단 위 돔에 그려진 <성모상>이다. ⓒ박경귀

수도원 내벽에 그려진 성모상과 사도들의 상이다. ⓒ박경귀 수도원 내벽에 그려진 성모상과 사도들의 상이다. ⓒ박경귀

서쪽에서 바라본 판타나사 수도원의 모습 ⓒ박경귀 서쪽에서 바라본 판타나사 수도원의 모습 ⓒ박경귀

판타나사 수도원 회랑에서 바라본 스파르타 평원 ⓒ박경귀 판타나사 수도원 회랑에서 바라본 스파르타 평원 ⓒ박경귀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박경귀 기자 (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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