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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이 상시청문회 어떻게 열지는 안봐도 비디오다


입력 2016.05.25 11:01 수정 2017.10.16 10:03        데스크 (desk@dailian.co.kr)

<칼럼>대통령의 의회 지배 안되듯 의회의 대통령 지배 있을 수 없어

“자유여, 너의 이름으로 사람들은 무슨 죄를 범하고 있는가.”

프랑스 혁명 때 지롱드 내각의 내무장관이었던 장 마리 롤랑의 부인 ‘마담 롤랑’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 남긴 말이라고 전해진다. 자코뱅파는 국민공회 안에 설치된 공안위원회와 보안위원회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단두대에 세웠다. 기요틴은 마침내 자코뱅파의 두 거두, 당통과 로베스피에르까지도 차례로 삼키고 말았다. ‘단죄’의 불가피성을 강변하면서 말도 안 되는 숱한 죄를 범한 것이다. 자유의 이름 아래!

흉내 내어 말하자면 이렇다.

“권력이여, 너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져 왔던가.”

먼데서 예를 찾을 것도 없다. 북한 3김의 세습 폭정을 가리키는 것만으로도 설명은 충분하다. 권력은 언제나 허기져 있다. 권력, 그 ‘치명적 매력’에 빠져들면 아무리 가져도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권력은 갈수록 비대해지고, 마침내 제 덩치에 짓눌려 질식하고 만다.

권력의 속성을 ‘다모클레스의 검’이라고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눈이 가려진 채 질주하는 말과 같다고 할 수도 있다. 율 브리너, 지나 롤로브리지다 주연의 영화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은 킹 비더 감독의 1959년 작이다. 시골의 소년 관객은 특히 솔로몬의 군대가 방패로 적을 무찌르는 장면에 압도됐었다. 방패에 반사되는 햇빛으로 말이 앞을 못 보게 되자 이집트의 대군은 절벽 아래로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전멸했다.

달리고 싶더라도 멈출 때를 먼저 알아야 한다. 권력에 도취되어 내달리기만 하면 언젠가는 절벽 위에 서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 거대권력은 물론이려니와 작은 권력에도 절제가 있어야 한다. 왕조시대 권력만의 경우도 아니다. 이른바 ‘민주적 권력’에도 치열한 자기 절제가 요구된다. 그 이유는 아주 분명하다.

무엇보다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국민에 의해 일시 위임된 것이다. 둘째 그것은 국리민복을 추구하는 ‘선한 의지’의 자기 구현 수단일 것이 요구된다. 셋째 당연히 그것은 보유자 자신의 이익 확보나 위세 과시를 위해 쓰여서는 안 된다. 넷째 어떤 권력이든 중독성을 가졌다. 화려한 명분으로 장식될수록 그 정도는 더 심해진다. 그 맛에 취하면 절제력은 마비되게 마련이다.

다모클레스의 칼 1812년 리처드 웨스탈 작. ⓒ데일리안DB 다모클레스의 칼 1812년 리처드 웨스탈 작. ⓒ데일리안DB

과거에는 통치권자의 ‘절제 없는 권력행사’가 문제였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쨌든 이젠 거의 극복되었다. 지금 대통령의 권력은 제도 안에서 효과적으로 제어되고 있다. 대통령이 국정운영과 관련해서 여론에 맞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없지 않다 해도 그것은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스타일 혹은 방법론의 문제라는 것을, 다들 속으로는 인정하고 있을 것이다.

반면에 정당과 정치명망가들의 권력획득 및 행사 욕구는 갈수록 더해지는 것 같다. 이들은 끈질긴 선전을 통해, 정부는 강압 세력, 의회는 저항 세력이라는 구시대적 구도를 대중의 의식 속에 고착시키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여론이 간과한, 혹은 눈치 채지 못한 측면이 있다. 국회는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보다는 정당의 이익대표부 역할과 기능에 더 충실해 왔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상시 청문회법’이 주는 느낌도 다르지 않다. 정의화 의장 주도로 발의되어 국회 본회의까지 통과한 국회법 개정안은, ‘국회, 특히 상임위 활성화’를 표방하고 있다. 그렇지만 핵심은 ‘상시 청문회’ 조항이다. 청문회 요건에 ‘소관 현안’ 4자가 추가됐을 뿐이지만 표현이 아주 모호하고, 대상에 제한도 없다. 과문한 탓이겠으나 이런 법조문이 있을 수 있는지 의아하다.

국회가 정부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라는데 ‘입법부의 행정부 통제’가 무조건적인 선(善)은 아니다. 권력분립은 상호 대등한 위상을 전제로 한다. 입법부는 행정부에 국정운영, 행정행위에 대한 제도적 틀을 제공하는 것, 그러니까 법 만들기를 주 임무로 한다. 직접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해도 제한적이어야 한다. 어느 일방의 우월적 지위가 구조화된다면 권력분립의 의의는 그만큼 퇴색된다.

미국 의회의 청문회와 비교 되곤 하지만 우리의 정당제도와 미국의 그것은 사뭇 다르다. 우리의 경우, 거대하고 강고한 조직력을 갖춘 중앙당 중심의 정당체제와, 당리당략 위주의 정쟁적 정당정치 관행이 의회정치의 과정을 매우, 그리고 자주 왜곡시키곤 한다.

이미 정부 통제 장치의 하나로서 청문회 제도가 있는데, 그 범위와 대상의 제한성을 해제해버리는 것은 입법부에 의한 행정부 지배 체제를 구축하겠다는 의도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이제까지의 국정감사, 국정조사 및 청문회를 돌아보면 상시 청문회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는 명약관화하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차기 원내대표는 일전에 “상시 청문회를 남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바로 이 말이 개정 국회법의 문제성을 더 뚜렷이 드러내주고 있다. 야당 원내대표의 결심과 약속이 제도의 정당성 및 적절성을 뒷받침할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은 법이 아니다.
국회의 위상과 힘은 국민의 선거를 통해 확보된다. 그래서 국민의 대표라는 칭호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삼권분립의 권력구조는 대통령에게도 국민대표성이 부여된다는 특징을 갖는다. 대통령이 의회를 지배할 수도 없지만, 의회 또한 대통령을 지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시의 당리당략적 유‧불리가 입법의 동기 및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야당은 마치 앞으로도 영영 집권을 하지 못하리라 예견하고 있는 것처럼 정부 옥죄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인상이다. 정부를 국민의 울분 속으로 집어던져버리기는 쉽다. 그런데 이는 국민적 자해행위나 다를 바 없다. 정부의 실패는 바로 국민의 고통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종일 ‘나무아미타불’만 외는 어머니가 있었다. 어느 날 아들이 연거푸 어머니를 불러댔다. 할 말도 없으면서 자꾸 부르자 어머니는 불같이 화를 냈다. 아들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기껏 서너 번 부른 걸 가지고도 어머니는 그처럼 귀찮아하시는데, 아무 용건 없이 하루 종일, 날이면 날마다 부르는 소리를 듣는 부처님은 오죽하시겠습니까?”(중국풍류골계담, 이주홍)

국민이 짜증나게 ‘국민’을 입에 달고 사시는 대신, 정말 국민을 위하는 일이 무엇인지(당이나 자신을 위하는 일이 아니라)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정치인이 되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필요이상으로 힘자랑하는 습관도 고치시고요.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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