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총장 설득과 박근혜 대통령 자진 하야' 시나리오
6·29 선언 당시 '직선제 개헌' 과실은 노태우 후보 차지
반 총장, 박 대통령 '하야' 받아내고 대권 비단길 확보
6·29 선언 당시 '직선제 개헌' 과실은 노태우 후보 차지
요즘 여의도 정가에는 ‘최순실 정국’의 흐름을 확 뒤엎을 만한 반전 시나리오가 나돌고 있다. 원래 음모론이나 각종 ‘설’이 많이 나도는 곳이라 호사가들이 꾸며낸 얘기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현 시국과 맞물려 워낙 그럴싸한 내용이라 짚어보고자 한다.
시나리오의 두 주인공은 박근혜 대통령과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다. 얘기의 단서는 박 대통령이 자신의 끝없는 추락을 그대로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란 점이다. 목전에 국회 탄핵안 가결을 앞두고 있고 또 길어야 6개월 헌법재판소 심판기간을 감안하더라도 내년 중반쯤에는 경매로 집이 넘어가는 집주인처럼 청와대에서 쫓겨나야 할 판이다. 지난 2004년 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처럼 민심의 극적 반전을 기대하기에는 지금은 여건이 너무 다르다. 혹 주변에 그런 감언이설로 대통령을 안심시키고 버티기를 권하는 참모가 있다면 바로 해고할 것을 조언한다. 이제는 모든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선 절반 이상은 포기할 생각을 해야 한다. 그래야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반 총장 입장에서도 최순실 정국을 태평양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는 없다. 사실상 대권도전 의사를 피력한 마당에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상승세에 대응할 수 있는 비책이 필요하다. 더욱이 그간 자신의 국민여론 지지율 1위를 지탱해온 힘의 원천이 박 대통령 지지세와 상당부분 중첩돼 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최순실 사태 이후 대통령 국정지지도와 반 총장의 지지율이 동반 하락하고, 급기야 문 전 대표에게 1위 자리를 내준 현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4% 선까지 추락했고 새누리당 지지도가 10%대에서 국민의당보다도 밑도는 상황에서 반전 동력을 얻기는 쉽지 않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6․29 선언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지난 1987년 4월13일,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한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조치가 발표되자 시민들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 은폐사건과 6․10 항쟁을 거쳐 국민 분노가 절정에 이른 6월29일에는 전국에서 100여만 명의 시민들이 가두시위에 참가해 호헌 철폐를 외쳤다. 여당 대선주자였던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8개항의 요구사항을 전 대통령에게 제시했다.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대선후보 등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결국 전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 호헌조치 철회 입장을 밝혔고 10월27일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다. 외견상 호헌 철폐, 직선제 개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노 대표가 6․29 선언의 과실을 대부분 가져갔다. 그해 12월16일 13대 대선에서 정권은 전 대통령에게서 노 후보에게 승계됐다. 노태우 36.6%, 김영삼 28%, 김대중 27%. 야권후보 단일화 실패도 뼈아픈 패인으로 작용했다.
26일 5차 촛불대회에서 전국의 190만 국민이 박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촛불을 들었다. 박 대통령이 퇴진을 거부함에 따라 야권은 합법적인 퇴출을 위해 ‘탄핵’이라는 우회로로 돌아가고 있다. 박 대통령의 자진 사퇴, 즉 하야를 이끌어내고 혼란한 정국을 하루속히 수습할 수 있는 정치인이 있다면 국민들로부터 큰 환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의 시나리오에는 반 총장이 바로 그 역할을 수행하기로 돼 있다. 반 총장은 당초 올 연말까지 임기를 마치고 내년초에 귀국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내 정세를 감안, 크리스마스 휴가를 이용해 귀국 날짜를 앞당긴다는 것이다.
그간 5차 촛불집회에 이르기까지 사퇴를 거부하며 꿈쩍도 않던 박 대통령이 반 총장의 ‘설득’을 받아들일 만한 이유는 무엇인가? 반 총장의 대권가도에 비단을 깔아주기 위해 본인은 희생양이 되길 마다 않는 모양새가 된다. 박 대통령은 반 총장에게 오래 전부터 호감을 보여왔다. 다만 추락하는 대통령의 지지도를 의식해 거리를 둬온 쪽은 반 총장이었다. 반면 최순실 정국에서 박 대통령은 야권 주자들로부터 핍박에 가까운 비난에 시달려왔다. 본인의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그들을 향해 회심의 반격 카드를 날리겠다는 동기가 생길 만하다. 그렇게 해서 반 총장이 대권을 잡는다면 박 대통령 입장에선 정권 승계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사퇴 후 신변 보장 문제에서도 반 총장이 어느 주자보다 나을 것이다.
이 시나리오의 개연성을 높이는 방증으로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사퇴시점을 12월21일로 잡은 점이 꼽히고 있다. 왜 하필이면 12월21일인가? 왜 21일까지 온갖 비난을 감내하며 현 정국 판도가 깨지지 않도록 박근혜 정권의 보루역할을 자임하고 있는가? 그것은 반 총장의 크리스마스 휴가가 그때쯤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 총장이 입국한 뒤 박 대통령의 하야가 성사되면 탄핵정국은 곧바로 대선정국으로 급변한다.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고 60일 이내에 대통령 선거가 치뤄지게 된다.
극적으로 대통령 하야를 이끌어낸 반 총장은 여권 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두 주자로 우뚝 설 것이다. 귀국 전에 미국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와 단독 회담이라도 가진다면 금상첨화다. 새로 출범하는 트럼프 정부와 호흡을 잘 맞출 수 있다는 인상을 심어줘 국민 지지도는 한층 더 올라갈 것이다. 반면에 야권에선 문재인·안철수 후보가 여전히 상대편 양보만 주장하며 후보 단일화에 성공하지 못할 경우 13대 대선의 재판이 될 공산이 높다.
반 총장, 정권승계 원하는 박 대통령 '하야' 받아내고 대권 비단길 확보
이처럼 ‘반 총장의 설득과 박 대통령 하야 시나리오’는 그럴싸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몇 가지 흠결을 안고 있다. 반 총장이 미리 짜여진 각본에 따라 박 대통령과 짬짜미를 한 사실이 확인되거나 적어도 그렇게 국민들 눈에 비칠 경우 반 총장의 정치 생명은 종언을 고한다. 반 총장이 그런 위험부담을 안고서도 박 대통령과 '공연(共演)'에 나서야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인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그런 맥락에서 이런 시나리오는 오히려 야권에서 흘리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시각도 있다. 최근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계엄령’ 발언을 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본다. 청와대가 수세 국면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구로 이용할 만한 여지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실체 여부와 상관 없이 ‘그림자’만 보고도 총기를 난사하는 격이다. 30년 전 ‘죽 쒀서 개 준’ 전철을 되밟지 않기 위해 그런 개연성에 대해선 미연에 쐐기를 박겠다는 의도다.
반면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관점에서도 접근해 볼 수 있다.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지만 한때 실체가 만들어지긴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나리오는 은밀하게, 전격적으로 실행돼야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법이다. 이미 정가에 시나브로 소문이 나서 김빠진 콜라처럼 돼버렸으니 결행되기는 어렵다는 관측이 만만찮다.
‘거사’의 윤곽이 알려졌다고 해서 반드시 포기하란 법은 없다는 반론도 있다. 시쳇말로 ‘골키퍼 있다고 골 못 넣는 게 아니다’는 것이다. 주인공들의 진정성이 담보되고 시대적 소명이 그들 위상과 맞아떨어진다면 미리 잠복 중인 적진에서 총탄이 쏟아지더라도 고지를 탈환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숨막히는 '최순실 정국'이지만 ‘그래도 정치는 살아 움직인다’는 주문(呪文)이 귓전을 때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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