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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편안하고 만족하게 만드는 힘 ‘라곰’


입력 2018.11.10 06:00 수정 2018.11.10 05:49        이석원 객원기자

<알쓸신잡-스웨덴㉒> ‘적당히’ 하면 모든 게 만족스럽다는 지혜

바이킹의 만찬서 유래 ‘모두가 만족하고, 누구도 부족하지 않은’

'스웨덴 왕궁' -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사람들의 품성을 설명하는 말로 '라곰'이라는 게 있다. 스웨덴어 사전에는 '알맞은, 적당히'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사진은 스웨덴 왕궁 전경 (사진 = 이석원) '스웨덴 왕궁' -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사람들의 품성을 설명하는 말로 '라곰'이라는 게 있다. 스웨덴어 사전에는 '알맞은, 적당히'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사진은 스웨덴 왕궁 전경 (사진 = 이석원)

‘얀테의 법칙(Jantelagen)'과 함께 스웨덴을 포함한 북유럽 사람들의 품성으로 일컬어지는 말이 라곰(Lagom)이다. 스웨덴어로 ‘적당한, 알맞은, 딱 들어맞는’이라는 뜻의 형용사이자, ‘적당히, 알맞게’라는 뜻의 부사로도 쓰인다.

라곰은 원래 ‘라겟 옴(Laget om)’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말인데, 라그(lag)는 팀(Team)이라는 뜻이고, 뒤에 붙은 ‘에트(et)’는 정관사, ‘옴(om)’은 ‘~을 둘러싸고’ 정도의 뜻인 전치사. 그러니까 ‘~에 둘러싸인 팀’ 정도의 뜻일 게다. 근데 왜 라곰이 ‘적당한, 알맞은’이라는 뜻의 형용사가 됐을까?

8~11세기 유럽은 물론 서아시아까지도 두려움에 떨게 했던 게르만족 중 바이킹은 스웨덴을 비롯해 노르웨이와 덴마크, 그리고 아이슬란드 사람들의 조상이다. 그들에게는 뿔 모양의 전통적인 술잔이 있다. 그들이 함께 술을 마실 때 규칙이 하나 있다. 커다란 뿔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은 전사들이 그 뿔 술잔의 술을 한 모금 씩 나눠 마신다. 맨 처음 사람부터 맨 마지막 사람까지 뿔 술잔이 돌아야 한다.

중간에 누군가가 많이 마시면 맨 마지막 사람이 마실 술이 남지 않는 경우도 있고, 중간 사람들이 술을 아껴 마시면 맨 마지막 사람이 혼자 많은 술을 마셔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맨 처음 사람부터 중간 사람들은 적당한, 그리고 알맞은 양의 술을 마셔야 한다. 바이킹들은 언제나 둘러앉은 모든 사람들이 알맞게, 적당히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추측컨대, ‘~에 둘러싸인 팀’인 ‘라겟 옴(Laget om)’이 ‘알맞은, 적당한’이라는 뜻의 ‘라곰(Lagom)’이 된 데는 둘러앉아서 뿔 술잔의 술을 나누어 마시던 바이킹 전사들의 전통이 이유인 듯하다.

스웨덴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개인의 삶을 희생하지 않는다. 더 출세하기 위해 낮밤을 가리지 않고 시간을 몰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휴일이나 명절에 일을 하면 두 배, 세 배의 수익을 얻을 수 있지만, 그들은 본래 자기가 일해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자신을 위해, 또는 가족을 위해 시간을 사용한다. 새로 아이가 태어나면 일부러 일을 적게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정규직을 포기하고 비정규직 시간제 노동자가 되는 일도 허다하다.

동양의 ‘중용’과도 어느 정도 의미가 상통하는 말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한자 성어와도 비슷한 뜻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일상에서 이야기하는 ’적당주의‘나 ’딱 중간‘이라는 의미와는 많이 다르다. 지나치지 않기 위한 ’적당함‘이라고 할까? 제대로 하지 않기 위한 ’대충‘의 의미는 아니다.

'바이킹 디너' - '라곰'이라는 말은 오래 전 바이킹의 만찬 문화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사진 = 미국 드라마 '바이킹스' 화면 캡처) '바이킹 디너' - '라곰'이라는 말은 오래 전 바이킹의 만찬 문화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사진 = 미국 드라마 '바이킹스' 화면 캡처)

스톡홀름 제2의 도시인 예테보리에 사는 에릭의 11살 아들 토미는 그 학교에서 배드민턴을 잘 치는 학생이다. 학교 선생님은 물론 주변에서 배드민턴 선수로 성장하는 것이 어떠냐는 권유를 많이 한다. 에릭이 토미에게 물어봤다. 하지만 토미는 나중에 커서 컴퓨터 게임 개발자가 되고 싶다고 한다. 에릭은 동의했다. 토미의 배드민턴 실력이 아깝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금 딱 이만큼 그 아이가 좋아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토미에게 배드민턴은 여기까지다”고 말한다.

‘라곰’의 전형이다. 무언가를 시작했고, 필요한 만큼의 성과를 얻었다. 물론 더 할 수도 있다. 선수가 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또 토미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다른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토미의 선택은 거기까지였다. ‘적당한, 알맞은’ 성과를 얻은 그들은 그 다음의 일을 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유익한 일이라고 믿었다. 그게 스웨덴 사람들의 ‘라곰’이다.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는 ‘라곰’의 정의를 ‘야심찬 계획보다는 충분히 실현 가능한 계획을 세우고, 삶의 작은 성취를 축하하며, 나를 아끼고 거절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라곰’을 프랑스의 ‘오캄(au calme)’, 덴마크의 ‘휘게(hygge)’, 그리고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확행(小確幸)’과 같은 개념이라고 말한다. 중국의 ‘중용(中庸)’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 사전적 의미가 무엇이든, 스웨덴 사람들에게 ‘라곰’은 굳이 인지되는 규범이거나 습성이 아니다. 그냥 삶이다. 세월이 지나고, 사회적 환경이 변하면 조금 씩 달라질 수도 있지만, 달라진들, 달라지지 않은들 의식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이다. 누구에게도 설명되지 않고 설명할 이유도 없는 자기 자신들이다.

‘라곰’의 의미를 장황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그건 아마도 스웨덴 사람이 아닐 것이다. 이제껏 만난 스웨덴 사람 중 “라곰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을 때 한결같이 돌아오는 반응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한 쪽으로 기울이는 것 뿐. 그게 ‘라곰’이다.

이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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