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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인터뷰] 이순재 "연예인 특권의식 안 돼, 본분에 충실해야"


입력 2019.04.01 09:31 수정 2019.04.04 11:32        부수정 기자

영화 '로망'서 치매 노인 연기

"연기는 끊임없이 연구해야"

배우 이순재는 영화 '로망'에서 치매 노인을 연기했다.ⓒ(주)메리크리스마스 배우 이순재는 영화 '로망'에서 치매 노인을 연기했다.ⓒ(주)메리크리스마스

영화 '로망'서 치매 노인 연기
"연예인 특권의식 빠져선 안 돼"


'국민 배우' 이순재(84)는 60여년이 넘는 연기 생활 동안 큰 구설에 오르지 않았다. 여든을 훌쩍 넘는 나이에도 브라운관, 스크린, 무대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역사, 예술, 정치, 사회 등 모든 분야를 뛰어넘는 해박한 지식도 갖췄다. 뛰어난 암기력을 보노라면 감탄이 나온다. '국민 배우'라는 수식어는 그냥 탄생하는 게 아니라는 걸 이순재는 증명한다.

이번엔 치매 노인으로 분해 눈물샘을 자극한다. 영화 '로망'(감독 이창근)은 부부의 '동반 치매'를 소재로 한 영화다. 주인공은 결혼 45년 차인 75세 조남봉(이순재)과 71세 이매자(정영숙) 부부. 이순재는 반평생 택시를 몰며 가족을 성실하게 부양한 가장 조남봉 역을 맡았다.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남편이자 아버지인 그는 아내가 치매가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요양병원에 입원시킨다. 아내가 없는 생활에 불편을 느낄 즈음, 조남봉에게도 치매 증상이 나타난다. 영화는 남봉·매자를 통해 부부의 사랑을 눈물겹게 보여준다.

그간 이순재는 연극을 통해 치매 노인을 여러 차례 연기한 바 있다. 극 중 남봉은 치매에 걸렸다 빠졌다 하는 인물이다. 초기 치매 증세다.

지난달 21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순재는 "치매 연기를 잘못하면 바보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좀 더 신경 써야 했다"며 "섬세한 표정 연기가 어려웠다"고 전했다.

암기력이 뛰어나다는 평가에 배우는 "배우에겐 뛰어난 암기력이 필수"라며 "요즘 친구들은 특히 암기력이 뛰어나더라. 우리와는 또 다르게 훌륭하더라"고 했다.

과거에는 요즘처럼 쪽대본이 없었다. 촬영 일주일 전에 대본이 다 나왔던 터라 대사를 외우는 게 지금보다는 수월했다고. 하지만 대본을 슬쩍 보는 배우들도 있었다. "대본을 보기 시작하면 계속 보게 돼요. 암기력은 대사 연습을 통해 연마할 수 있답니다. 암기력을 타고난 사람이 있지만, 그게 아닌 사람은 끊임없이 노력해서 터득해야 합니다."

영화 '로망'에 나온 이순재는 "연예인은 특권의식에 빠젼선 안 된다"고 했다.ⓒ(주)메리크리스마스 영화 '로망'에 나온 이순재는 "연예인은 특권의식에 빠젼선 안 된다"고 했다.ⓒ(주)메리크리스마스

1956년 서울대 철학과 3학년 때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한 그는 1960년 극단 실험극장의 창단 멤버로 소극장 운동에 참여했다. 1964년 TBC가 개국하면서 브라운관에도 얼굴을 비쳤다.

이후 '사랑이 뭐길래'(1991), '허준'(1999), '이산'(2007), '엄마가 뿔났다'(2008), '지붕 뚫고 하이킥'(2009), '욕망의 불꽃'(2010), '그대를 사랑합니다'(2012), '무자식 상팔자'(2012), '꽃보다 할배 유럽 & 대만편'(2013~2014), '꽃할배 수사대'(2014), '꽃보다 할배 그리스 편'(2015), '그래, 그런거야'(2016), '돈꽃'(2017), '라이브'(2018), '덕구'(2018), '리갈하이'(2019) 등에 나와 왕성하게 활동했다.

'돈키호테', '아버지', '사랑별곡', '세일즈맨의 죽음', '사랑해요 당신', '앙리 할아버지와 나' 등 연극 무대에도 올랐다. 지금까지 연극·영화·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300편에 가까운 작품에 출연한 이순재는 교단에도 서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방송, 영화계는 과거에 비해 엄청난 성장을 일궈냈다. 이순재는 "한국은 공연 역사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공연·예술인은 인정받지 못했다"며 "뿌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직종에 대한 역사가 없기 때문에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예술로 평가받지도 못한 상황에서 연기를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딴따라'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천직이 됐죠. 경제적으로 취약한 직종이라서 주변에서 다 반대했습니다. 전 무언가 발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했어요."

대학교 2학년 시절 '햄릿'을 본 이후 소름이 끼쳤다. '저건 예술이다' 싶었다. 하지만 연기를 하는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네까짓 것들이 뭘 이런 걸 하느냐', '왜 딴따라들이 나서냐'는 얘기를 숱하게 들었다.

최근 여러 연예인은 도덕적 해이와 특권의식에 빠져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국회의원으로도 지낸 바 있는 이순재는 "특권의식이라는 건 의식에 달린 것이다. 연예인은 특권의식에 빠져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권력은 개인적으로 행사하면 안 되고, 국익을 위해서 써야한다는 게 그의 철칙이다. "연예인은 행위 자체가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공인이라는 개념에 포함됩니다. 조심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자유분방하게 살면 곤란하죠. 요즘 같은 사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자기 본분에만 충실히 하면 되는데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안 돼요."

영화 '로망'에 나온 이순재는 "연기란 끝이 없는 일"이라고 했다.ⓒ(주)메리크리스마스 영화 '로망'에 나온 이순재는 "연기란 끝이 없는 일"이라고 했다.ⓒ(주)메리크리스마스

그러면서 그는 "특히 아이돌은 청소년의 우상이 되어 있다"며 "팬들의 관심을 기꺼이 수용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한다"고 했다. "연기는 노력과 의지와 필요한 작업입니다. 단순히 대사를 암기하고, 감독이 하라는 대로 하면 중간에 도태돼요. 열심히 하는 사람만 살아남았죠. 저는 58년도부터 연극을 시작했는데 78년도에 처음 월급을 받았습니다. 20년 동안 대가 없이 연기한 거죠."

이순재와 함께한 배우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연기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하루에 영화 네 편을 찍은 적도 많았다. 당시에는 방송국에서 공채 탤럭트를 뽑았기 때문에 배우의 기본적인 자세, 태도, 기본법 등을 배울 수 있었다.

선배들과 후배들이 함께 발전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됐던 거다. 하지만 요즘은 상황이 다른다. 자기 연기만 하고 가버린다.

이순재는 "예전에는 감독의 실력도 뛰어났다"면서 "배우들의 연기가 제대로 안 되면 반복해서 촬영했다. 근데 지금은 대사만 처리하면 그냥 넘어간다"고 지적했다.

배우의 기준인 외형도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훤칠한 연예인들을 보노라면 '글로벌' 수준이다. 주목하는 배우를 꼽아달라고 하자 "다들 잘한다"면서도 "역할을 위해서 자기를 버리는 배우와 그렇지 않은 배우로 나뉜다. '베토벤 바이러스' 때 김명민과 같이했는데 김명민이 잘하더라"고 설명했다.

최민식, 송강호, 이병헌 등도 훌륭한 배우로 꼽았다. 과거 배우들은 출연료 외에 들어오는 수입이 없었다. 하지만 요즘엔 떴다 하면 수억을 번다. 이순재는 "인재를 활용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며 "대충하지 말고,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이순재는 배우도 공부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정상을 찍은 배우가 좋은 방향으로 내려가기란 쉽지 않다. 언젠가는 내려가야 하는데 연기력이 달리거나, 주인공만 해야 한다는 의식에 시달리면 곤경에 빠진다.

이순재는 연기야말로 나이와 상관없이 끝까지 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강조했다. "배우는 연기에만 집중하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전문적으로 파고들어 가면 끝까지 할 수 있는 게 배우이지요. 이게 배우의 희열이자 보람입니다. 연기는 끝이 없고, 완성이 없어요. 나이와 상관 없이 계속 도전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 수 있죠."

다시 태어나면 배우가 하고 싶냐고 묻자 "당연하다"고 웃었다. "배우는 자유로운 직업이에요. 제가 젊었을 때는 좋은 직종과 반대 직종이 완전히 나뉘었어요. 그런데도 선택한 건 천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국민 배우의 '로망'은 무엇일까. "끝날 때까지 건강하게 연기하는 겁니다. 제 나이와 어울리는 진지한 연기를 하고 싶어요."

부수정 기자 (sjboo71@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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