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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용산기지, 금단의 땅에서 벚꽃 물든 ‘역사의 산실’로


입력 2019.04.10 12:00 수정 2019.04.10 12:47        이정윤 기자

서울 속 여의도 크기의 ‘미국마을’…‘지리적 요충지’이자 ‘역사의 산실’

작년 말 용산공원조성계획안 용역 마무리…하반기 국민 공론화 예정

서울 속 여의도 크기의 ‘미국마을’…‘지리적 요충지’이자 ‘역사의 산실’
작년 말 용산공원조성계획안 용역 마무리…하반기 국민 공론화 예정


DO NOT ENTER라고 적힌 표지판을 넘어서면서 용산기지 버스투어가 시작된다. 용산기지 14번 게이트 모습. ⓒ이정윤 기자 DO NOT ENTER라고 적힌 표지판을 넘어서면서 용산기지 버스투어가 시작된다. 용산기지 14번 게이트 모습. ⓒ이정윤 기자

‘DO NOT ENTER’라고 적혀있는 표지판을 지나자마자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느껴졌다. 영어마을에서나 볼 법한 1층에서 3층짜리의 높이가 낮은 주택들이 늘어져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주상복합 아파트들이 빽빽한 바깥 풍경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이렇게 1950년대 지어진 미군관사 풍경을 시작으로 지난 9일 오후 기자들을 실은 봄날의 ‘용산기지 버스투어’가 시작됐다.

금단의 땅 용산미군기지 개방은 작년 11월 처음 시작됐다. 용산기지를 찾은 방문객은 현재까지 약 700명에 달한다.

용산기지 버스투어는 이달부터 매회 버스를 기존 1대에서 2대로 증편 운영된다. 특히 ‘봄맞이 벚꽃길 투어’ 등 봄‧가을에는 특별투어를 각 1회씩 증회한다.

이날 투어는 SP벙커(일본국작전센터)→121병원(총독관저터)→위수감옥→둔지산 정상→한미연합사령부→한미합동군사업무단→병기지창 순서로 진행됐다.

용산기지의 규모는 어떨까. 약 80만평, 243만㎡로 일반적인 축구장 340개 또는 여의도 면적에 육박한다고 한다. 정확한 규모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야 용산기지의 주요시설 몇 곳만 들르는 일정에도 불구하고 약 3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투어가 납득이 갔다.

영어마을을 연상케 하는 용산기지 내 미군관사 모습. ⓒ이정윤 기자 영어마을을 연상케 하는 용산기지 내 미군관사 모습. ⓒ이정윤 기자

용산기지는 ‘지리적 요충지’와 ‘역사의 산실’로 요약된다.

투어 담당자는 “용산기지에는 동서남북 방향으로 총 21개의 게이트가 있는데, 이걸 이용하면 그야말로 사통팔달 그 자체다”며 “예를 들면 후암동에서 이촌까지 5분 만에 이동이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용산기지는 러일전쟁 이후 1906년에 지어지기 시작해 1908년에 완공됐다”며 “이후 남산한옥마을에 있던 일본군사령부가 이곳으로 옮기게 되면서 식민지배의 심장부가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해방 이후에는 일본군이 철수하고 미군이 용산기지를 재활용하게 된 것”이라며 “이후 1949년에는 미군이 철수하면서 을지로에 있던 우리나라 육군본부가 이곳으로 이전해 6.25전쟁 직전까지 한국군이 용산기지의 주인이 된다”며 이곳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전했다.

버스를 타고 둘러본 용산기지는 서울 속의 또 다른 세상이었다. 이 마을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도록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미국 초‧중‧고등학교, 놀이터, 주유소, 마트, 스타벅스, 버거킹 등 웬만한 생활인프라가 모두 있었다.

투어 담당자는 “지금 옆에 보이시는 ‘COMMISSARY’라는 대형 식료품점은 (평택 미군기지 이전으로) 현재 50% 정도의 식자재가 빈 상태다”고 상황을 전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감옥으로 사용되다 광복 이후 미7사단 구금소로 사용된 '용산위수감옥' 입구 모습. ⓒ이정윤 기자 일제강점기 일본군 감옥으로 사용되다 광복 이후 미7사단 구금소로 사용된 '용산위수감옥' 입구 모습. ⓒ이정윤 기자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일본군 감옥인 ‘용산위수감옥’은 봄날답지 않은 흐린 날씨 때문인지 더욱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용산위수감옥은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군 감옥으로, 일제가 패망한 후에는 미군 감옥으로 사용됐다.

시신을 바깥으로 내보내는 문이 있던 용산위수감옥 벽돌담 모습. ⓒ이정윤 기자 시신을 바깥으로 내보내는 문이 있던 용산위수감옥 벽돌담 모습. ⓒ이정윤 기자

용산위수감옥 한쪽에는 시신을 바깥으로 내보내는 문이 자리해 있었다. 벽돌담 위에 덧바른 시멘트가 부식돼 군데군데 보이는 빨간 벽돌은 지나온 긴 세월을 그대로 드러냈다.

용산기지 내 만초천과 돌다리 모습. ⓒ이정윤 기자 용산기지 내 만초천과 돌다리 모습. ⓒ이정윤 기자

투어를 한창 하다보면 아주 얕은 물이 흐르는 만초천이 나온다. 이곳 돌다리 역시 많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투어 담당자는 “이 돌다리는 예전에 일본군 보병연대의 입구로 상징적인 곳이다”며 “이 돌다리를 이용해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이 용산역으로 이동해 만주까지 갔단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군뿐만 아니라 징병제가 있던 1944~1945년에는 우리나라 청년들이 총알받이로 끌려갔던 장소다”고 덧붙였다.

용산기지의 등줄기를 이루는 둔지산 꼭대기에서 바라본 서울 모습. ⓒ이정윤 기자 용산기지의 등줄기를 이루는 둔지산 꼭대기에서 바라본 서울 모습. ⓒ이정윤 기자

용산공원 예정부지의 공원조성계획안 용역은 지난해 말께 마무리된 상태다. 연구용역 과정에서 주안점을 둔 부분은 역사문화적 가치다. 이밖에 지형과의 조화, 공원운영관리상 필요성 등을 고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용역결과 공원예정부지 내에 있는 총 975동의 건물 중 53동 존치, 81동 판단유보, 나머지 841동은 철거로 나타났다.

권혁진 국토부 도시정책관은 “해당 결과는 연구용역 업체들이 정부에 제안한 내용이므로 아직 확정된 사안은 아니다”며 “구체적인 내용은 올해 하반기에 국민 공론화 과정을 거칠 예정이다”고 말했다.

낮은 건물들로 이뤄진 용산기지와 높은 건물들이 빽빽한 바깥 풍경이 대조적이다. ⓒ이정윤 기자 낮은 건물들로 이뤄진 용산기지와 높은 건물들이 빽빽한 바깥 풍경이 대조적이다. ⓒ이정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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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윤 기자 (think_uni@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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