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을 집권했지만 돌아갈 집이 없던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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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년을 집권했지만 돌아갈 집이 없던 총리
    <알쓸신잡-스웨덴 69> 합의 민주주의 기초하고 ‘국민의 집’ 완성한 최장수 내각
    올로프 팔메 등용한 정치학자들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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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 : 2019-10-07 08:30
    이석원 스웨덴 객원기자
    <알쓸신잡-스웨덴 69> 합의 민주주의 기초하고 ‘국민의 집’ 완성한 최장수 내각
    올로프 팔메 등용한 정치학자들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


    ▲ 국회의사당(왼쪽)과 그 건너편에 있는 스웨덴 총리 공관인 사게르 저택(Sagerska Huset). 총리의 공관이 별도로 마련된 것은 1996년이다. 그때까지 스웨덴 총리는 따로 공관이 없었다. (사진 = 이석원)

    1969년 68세의 스웨덴 총리 에를란데르는 돌아갈 집이 없었다.

    지난 해 총선거에서 사민당은 사상 처음으로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단독 정부를 구성했다. 물론 에를란데르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총선 직후 그는 1년 안에 총리에서 물러나고 젊고 새로운 지도자가 스웨덴을 이끌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그의 고민은 자신의 뒤를 이을 차기 총리가 아니었다. 이미 자신의 보좌관 출신이며 스웨덴의 떠오르는 샛별인 42세의 올로프 팔메에게 총리 자리를 물려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의 고민은, 퇴임 후 어디에서 살아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정부에서 월세를 내 주던 방 3개짜리 자그마한 임대 아파트가 전부였다. 총리에서 물러나면 그는 새로운 집을 구해야 했다. 아내 아이나는 “스톡홀름은 집세가 비싸니 고향 란새테르(Ransäter)나 아니면 스톡홀름 인근의 아파트를 구하겠다”고 했다. 에를란데르는 아내에게 너무 미안했다.

    이 소식은 사민당 내에 금세 퍼졌다. 곧 여러 언론에서도 보도됐다. 스웨덴 시민들은 놀랐다. 자신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정치인인 에를란데르에게 집 하나가 없다는 사실에.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화제가 됐다. 그는 무려 23년 간 스웨덴의 총리였는데 퇴임 후 살 집이 없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사민당에서는 에를란데르가 말년을 보낼 수 있는 집을 마련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스톡홀름 외곽 봄메쉬빅(Bommersvik)에 있는 청년 연수원 한 쪽에 크지 않은 통나무집 하나를 지어 에를란데르 부부가 퇴임 후 가서 살 수 있도록 했다. 스웨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인으로 꼽히는 타게 에를란데르는 1969년부더 1986년까지 그곳에서 생활하며 생을 마쳤다.

    흔히 스웨덴의 민주주의 정치를 얘기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사람은 올로프 팔메(Olof Palme)다. 현재 스웨덴의 사회 복지 시스템을 완성한 사람으로, 스웨덴 민주주의의 완성자로 추앙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로프 팔메를 이야기 할 때 항상 그의 이름 앞에 등장하는 인물이 타게 에를란데르(Tage Erlander)다.

    팔메가 스웨덴의 사회복지 시스템과 민주주의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에를란데르가 이뤄놓은 협치와 개혁 때문이다. 에를란데르는 전임자인 페르 알빈 한손(Per Albin Hansson)이 제창한 ‘국민의 집(Folkhemmet)’을 스웨덴의 복지 모델로 완성했다. 그 과정에 그는 보수 야당과도 대화하고 협력했으며, 노동조합은 물론 기업가들과 끊임없는 대화를 지속해서 스웨덴의 정치와 경제가 대화와 협조로 이뤄지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래서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팔메의 인기가 더 높지만 정치학자들은 ‘에를란데르 없이 팔메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에를란데르에 대한 평가에 더 후한 점수를 준다.

    스웨덴 사민당의 황금기는 1936년부터 1986년이다. 이 50년 중 1976년부터 1982년까지 6년을 제외한 44년간 집권한 사민당의 총리는 한손과 에를란데르, 그리고 팔메 뿐이었다. 10년을 집권한 한손, 23년을 집권한 에를란데르, 다시 11년을 집권한 팔메는 그 기간 동안 유럽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했던 스웨덴을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복지 시스템과 민주주의 체제로 만들었다.


    그러나 에를란데르는 팔메에 비해 한국 사람들에게는 아직까지도 아주 생소한 인물이다. 그가 이뤄놓은 업적에 비해, 스웨덴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에 비해, 그리고 최근 스웨덴에 대한 우리들의 관심에 비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심지어 인터넷에 그 이름을 검색해도 그 흔한 ‘두산 백과’에도 나오지 않는다. ‘위키 백과’에서나 겨우 찾을 수 있을 정도.

    지방 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스웨덴 남부 룬드 대학교에서 정치학과 경제학을 전공했다. 너무 가난해서 전 인구의 3분의 1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비참한 스웨덴, 게다가 세계 대공황의 어두운 시대의 한복판인 1932년 처음 의회 의원이 되고 스웨덴 부흥의 틀을 만든 한손 총리의 갑작스런 심장마비 사망으로 1946년 45세의 나이에 갑자기 스웨덴 총리가 됐을 때 스웨덴의 기성 정치인과 기업가들은 에를란데르에 대해 심각한 걱정을 했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 직후 스웨덴 정치의 정점이 된 그는 정부와 기업 간의 합의를 통해 국가 경제를 안정적으로 발전시켜 스웨덴을 유럽에서 가장 높은 소득을 창출하는 나라 중 하나로 만들었고, 특유의 중재력과 실용주의 노선으로 좌우의 균형감을 유지하며 경제 번영과 사회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별도의 총리 관저가 없던 시절인 1952년, 당시 스웨덴의 갑부였던 칼 아우구스트 비칸데르가 에를란데르에게 스톡홀름 인근 하르프순드(Harpsund)에 있는 자신의 영지를 스웨덴 총리의 별장으로 기부한다. 사민당 내부의 오랜 숙의 끝에 이 기부를 받아들인 에를란데르는 이곳에서 스웨덴 민주주의에서 매우 유의미한 ‘목요 모임’이라는 것을 개최한다.

    일명 ‘하르프순드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이 ‘목요 모임’에는 특히 노동조합과 경영자협회, 그리고 정부가 참여한다. 지금도 노사정의 중요한 대화는 주로 이곳에서 이뤄지는데, 한손의 ‘살트셰바덴(Saltsjöbaden)’, 팔메의 ‘하가성(Haga Slott)’과 함께 스웨덴 협의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에를란데르는 한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졸지에 총리가 돼 스웨덴을 번영의 길로 이끌었지만, 그는 ‘준비된 후계자’ 팔메를 등용하고 총리의 자리에 앉혀서 스웨덴의 영광에 조력했다. 그가 스웨덴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존경받는 큰 이유 중 하나가 팔메의 중용이었다.

    1986년 3월 암살자의 총탄에 사망한 팔메를 보며 그는 “스웨덴은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잃었고, 나는 가장 사랑하는 ‘좋은 사람’을 잃었다”며 슬퍼했던 에를란데르는 그로부터 석 달 후 사망한다.

    글/이석원 스웨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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