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세기말 기술로 '혁신 서비스' 자랑 바쁜 오픈뱅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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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의 눈] 세기말 기술로 '혁신 서비스' 자랑 바쁜 오픈뱅킹
    'IT 강국 무색' 요란한 뒷북에 씁쓸한 韓 금융
    우물 안 개구리 넘어 생존 경쟁력 고민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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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 : 2019-11-15 07:00
    부광우 기자(boo0731@dailian.co.kr)
    'IT 강국 무색' 요란한 뒷북에 씁쓸한 韓 금융
    우물 안 개구리 넘어 생존 경쟁력 고민할 때


    ▲ 최종구 전 금융위원장이 4월 15일 오후 서울 중구 은행회관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성공적인 오픈뱅킹 도입을 위한 향후 과제' 세미나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뉴시스

    "오픈뱅킹을 혁신이라고 떠드는 현실 자체가 우리 금융권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하나의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에서 모든 은행들의 계좌를 조회하고 송금도 할 수 있게 해 주는 오픈뱅킹에 대해 IT업계 관계자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오픈뱅킹을 가능케 한 배경 기술이 이미 등장한 지 십 수년도 더 된 이른바 세기말 방식이란 자조 섞인 설명과 함께였다. 의지만 있었다면 한참 전에 내놓을 수 있었던 서비스를 갖고 소비자 편의를 운운하는 모습이 가식적이란 반응에는 뼈가 담겨 있었다.

    오픈뱅킹의 핵심은 오픈 응용프로그램인터페이스(API)란 기술이다. 우리말로 풀면 이름은 다소 장황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리 어려운 내용은 아니다. 우선 API는 어떤 프로그램에서 데이터를 주고받기 위한 방식을 의미한다. 오픈 API는 말 그대로 이를 공개한다는 의미다. 즉, 오픈 API는 서로 다른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는 이들끼리 각자의 정보 전달 형식을 공유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도록 해보자는 약속인 셈이다.

    결국 오픈 API는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끼리 소위 말해 서로 들고 있는 패를 열어보자는 합의와 서로가 지켜야 할 약속만 갖춰지면 가능한 일이다. 이 때문에 공식적으로 오픈 API라는 개념이 정확히 언제 등장했는지도 명확치 않다. 1970년대 중반부터 일어난 카피레프트 운동에서 그 기원을 엿볼 수 있는 정도다. 카피레프트는 지금도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독점적 저작권인 카피라이트 개념에 반대하고, 자유로운 저작물의 공유를 시작했던 세계 프로그래머들 사이의 도전이었다.

    그리고 현재 오픈 API는 더 이상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게 됐다.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등 굴지의 IT업체들이 제공하는 인터넷 지도 서비스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은 해당 지도를 일반에 공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프로그램 소스까지 오픈하고 있다. 이를 활용한 시장은 2000년대 초반부터 천문학적인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미국의 부동산 정보 사이트인 질로우(Zillow)는 2006년 마이크로소프트 지도 서비스의 오픈 API를 사용해 창업된 회사다. 이를 통해 질로우 사용자는 집 안에 앉아 매물로 나온 부동산의 실제 사진을 원하는 방향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일정 가격대 안에서 범죄율이 낮은 지역이나, 특정 학교에서 30분 거리 내에 있는 집을 검색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다양한 오픈 API가 반영돼 있다. 이에 질로우의 시가총액은 7조원을 넘어선 상태다.

    몇 년 전 국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휴일마다 사람들로 하여금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게 했던 스마트폰 게임 포켓몬 고 역시 오픈 API가 바탕이 됐다. 출시 당시에는 현실의 배경에 가상의 이미지를 겹쳐 보여주는 증강현실 기술로 더 주목을 받았지만, 포켓몬 고 역시 구글 맵 오픈 API가 없었으면 탄생이 불가능했다. 개발사인 나이언틱은 2016년 하반기 출시 이후 올해 10월까지 포켓몬 고로만 3조원이 넘는 돈을 쓸어 담았다.

    이렇게 오픈 API가 세계를 휩쓸고 있음에도 금융권에서 이제야 첫 발걸음을 떼게 된 이유는 구시대적인 규제와 기존 사업자들의 배타성에 있다. 사실 은행들의 오픈 API 시도는 3~4년 전부터 이뤄져 왔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이제야 오픈뱅킹을 위해 관련법 손질에 들어갔다. 2007년 전자금융업이 도입된 이후 10여년 만이다. 아울러 은행들이 독자치한 채 운영돼 온 금융결제망도 변화를 막는 요인 중 하나였다.

    지난 세기 말부터 우리나라의 최대 성장 기반은 IT였다. 남들보다 한 발 앞섰던 선택이 새로운 세기의 풍요로움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금융권은 수 십년 전 기술을 들여와 자랑을 늘어놓는 실정이다. IT 강국의 간판을 무색케 하는 초라한 단면이다.

    ▲ 부광우 데일리안 시장경제부 기자.ⓒ데일리안

    제레미 다이아몬드는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인 '총, 균, 쇠'에서 중국 문명이 유럽에 뒤처지게 된 원인으로 폐쇄적인 태도를 지적한다. 기원전부터 정치적 통일을 이룩한 응집력으로 급속 성장하며 종이, 화약, 나침반, 인쇄술, 항해술 등 선진 기술들을 섭렵했지만 경쟁할 대상이 없어지자 스스로 문호를 닫음으로써 조금씩 발전에서 멀어졌다는 얘기다.

    역설적이게도 중국의 옛 철학자인 장자는 '우물 속 개구리에게 바다를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좁은 곳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라고 꼬집었다. 흔히 우리가 속담으로 쓰는 우물 안 개구리, 정저지와(井底之蛙)의 유래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비교적 덜 알려진 장자의 충고는 우리 금융권이 새겨야 할 섬뜩한 경고다. '여름철 벌레에게 얼음을 얘기할 수 없는 이유는 한 계절에만 살기 때문이다.'[데일리안 = 부광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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