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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혜는 왜 불행포르노라고 했을까


입력 2019.12.16 08:20 수정 2019.12.16 08:06        하재근 문화평론가

<하재근의 이슈분석> 단어 때문에 이슈의 폭발력 아주 커져

<하재근의 이슈분석> 단어 때문에 이슈의 폭발력 아주 커져

ⓒKBS2 화면캡처 ⓒKBS2 화면캡처

배우 윤지혜가 개봉 예정인 영화 ‘호흡’에 대해 ‘불행포르노’라며 감독과 당시 촬영실태에 대해 극언을 해 크게 논란이 일었다. 누리꾼들은 이 폭로에 공분하며 감독과 영화계를 비난하고 있다. 한 매체는 윤지혜가 촬영장의 ‘만행’을 폭로했다고 기사화하기도 했다. 감독이 만행을 저질렀다는 뜻이다. 이러니 누리꾼들이 더욱 분노한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윤지혜가 올린 글에 따르면 그 만행의 내용이란 이렇다. ‘현장 통제가 안 돼서 배역에 몰입할 수 없었다. 컷을 안 하고 모니터만 보는 감독 때문에 도로 주행 중인 차에서 내린 일이 있었다. 지하철에서 도둑촬영하다가 도망다녔는데 제작진은 재밌는 추억이 될 듯 눈치 보며 멀뚱거렸다. 행인 통제를 못해 카메라 앞으로 행인이 지나갔다. 촬영 도중에 휴대폰 등이 울렸다. 지인들로 섭외된 단역들이 잡음을 많이 냈다. 주인 없는 현장에 감독은 레디액션을 외쳤다. 욕심만 많고 알량한 자존심만 있는 아마추어 감독이었다.’

이런 내용에 ‘만행’이라고까지 하며 신인 감독에게 낙인을 찍는 건 과하다. 일반적인 영화가 아니라 한국 영화 아카데미 졸업작품으로 제작비가 7000만 원 대였다. 학생작품은 보통 최소한의 실비 정도만 제작비로 확보하고 나머지는 동료의 품앗이나 ‘지인찬스’ 노력봉사로 이루어진다. 거기에 연기 경험과 인맥을 쌓으려는 신인 배우가 무료로 출연하거나, 때로는 비상업적인 작은 영화의 신선함 등을 경험하려는 기성배우가 무료로 출연하기도 한다.

학생들은 미숙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현장은 엉망진창이다. 수억대를 투입한 상업영화도 현장은 열악하기 짝이 없는데, 수천만 원 대의 학생 영화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 속에서 사람이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용한 극한의 스트레스 상황이 되기 십상이다.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지는데, 미숙한 학생 감독 입장에선 아직 작품을 완전히 장악할 능력이 없는 처지에 최종 완성품을 머릿속에 필사적으로 그려가며 작업을 지휘해야 하기 때문에 대단히 열악한 상태가 된다.

제대로 돈을 주고 일을 시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품앗이나 지인찬스로 온 스태프들을 엄격하게 통제할 수도 없고, 역할분담이나 지휘계통도 명확하지 않다. 곳곳에서 사고가 터진다. 감독은 최종 완성본을 염두에 두고 한 조각씩 컷을 찍어가는 과정 속에 이미 정신이 반쯤은 나간 상태라서 더욱 더 이 사람들을 통제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런 사정도 있을 수 있는데 지나치게 사람들이 신인감독에게 낙인을 찍고 있다. 윤지혜는 두 번째 글에서, 처음엔 노개런티 섭외를 받았다가 자신이 백만 원을 요구했다고 설명했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열정페이를 연상하면서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이 사건에 투영해 더욱 분노를 키웠다.

“양아치같은 영화판 꼰대들하고 싸우고 있군요. 힘내세요”
“돈은 주고 영화를 찍어라. 감독이 개념이 없다.”
“문화부 장관님 그리고 노동부 침묵하시지 말고 좀 나서서 대안을 내셔야 할 텐데요.. 촬영환경과 갑질 보고만 계실 건가요?”
“열정페이라고 너무 이용해먹고 버리는 예술”

이런 반응들이 그래서 나온 것인데, 맥락이 조금 잘못됐다. 학생영화에 기성 상업영화판을 대입하고 있다. 감독이 꼰대가 아니라 이제 영화판에 발을 딛는 졸업생이었다. 갑질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고, 원래 학생은 기성 영화처럼 정상적으로 돈을 다 줘가면서 영화를 찍는 것이 힘들다. 학생영화의 ‘지인찬스’를 일반 사회의 열정페이라고만 보기는 힘들다.

물론 학생영화라고 마냥 무책임하고 이기적으로 작업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최대한 사회적 상식에 맞게 촬영장 관리를 하려 노력해야 하고, 자신의 작업에 참여해준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염려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특히 안전과 관련된 부분은 최우선적으로 챙겨야 한다.

일부 감독들은 출연자에게 힘든 요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그것을 예술이라고 한다. 안전도 도외시한다. 도와주러 온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지도 않는다. 돈도 안 주며 밤 새라고 한다. 이런 행태가 일부 영화계 병폐인 건 맞고, 당연히 비판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거론되는 감독이 이제 막 기성영화계에 발을 내딛는 신인이라는 점과 학생영화의 특수성도 감안해야 한다.

윤지혜가 불행포르노라는 단어를 써서 언론에 더 크게 기사화되고 논란도 더 커졌다. 사람들이 이 단어에서 더욱 부정적인 인상을 받았다. 불행포르노는 빈곤 아동을 내세운 기부 광고처럼 타인의 불행을 전시하는 걸 가리키는 말인데, 이 영화가 그런 내용이란 얘기는 없다. 그래서 왜 불행포르노라는 단어를 썼는지 의아하다. 말하지 않은 속사정이 있는 것일까? 어쨌든 이 단어 때문에 이슈의 폭발력이 아주 커졌다. 이런 단어가 나오니 ‘만행’이란 표현의 기사까지 터지고 감독에게 만행을 저지른 사람이란 낙인이 찍히게 된 것이다. 그 감독과 윤지혜 사이에 무슨 일이 더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윤지혜가 올린 글로만 봤을 땐 지금의 질타는 과도해보인다.

글/하재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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