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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㊽] 미국 남북전쟁과 신미양요


입력 2021.09.28 14:01 수정 2021.09.28 12:59        데스크 (desk@dailian.co.kr)

1871년 미국은 5년 전에 벌어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공격됐다. 미국의 아시아 함대를 총동원한 공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5년간의 준비를 거쳐 전쟁을 시행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나도 초라한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단지 조선을 공격하기 위한 빌미였다고 하더라도, 역시 미국의 전쟁 결정이 너무나도 자의적이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남북전쟁으로 갈라진 미국을 수리하는 링컨과 존슨을 풍자한 삽화ⓒJoseph E. Baker(1865) - Library of Congress 남북전쟁으로 갈라진 미국을 수리하는 링컨과 존슨을 풍자한 삽화ⓒJoseph E. Baker(1865) - Library of Congress

그렇다면 왜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신미양요를 일으키기까지 5년이나 걸렸을까?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 미국의 정치 상황은 상당히 불안정했다. 미국은 링컨 대통령 암살 사건을 비롯해 남북전쟁 이후 재건 사업 등 내부에 각종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링컨 대통령은 1864년 재선되었으나, 이듬해인 1865년 4월 14일 남부 지지자에게 암살당했다. 그리고 부통령이었던 앤드루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링컨이 미국 역대 대통령 중 부동의 1위 평가를 받는 반면, 그 후임인 앤드루 존슨은 프랭클린 피어스, 제임스 뷰캐넌과 함께 만년 꼴찌 중 한 명이다.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전후 재건 정책에 집중했다. 그는 재건 정책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전쟁은 끝났지만 남북 간의 갈등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남부 주의 미연방 복귀를 비롯해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의 복구, 그리고 링컨 대통령이 선언한 노예 해방에 따른 노예들의 지위와 권리에 대한 문제 등은 심각한 갈등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전후 재건 문제뿐 아니라, 미국은 대외적으로도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멕시코의 상황이었다. 당시 멕시코는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미국은 멕시코를 프랑스의 지배하에 내버려둘 경우, 멕시코가 유럽인을 미국으로 진출시키는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프랑스의 멕시코 지배는 미국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 정부는 프랑스의 멕시코 간섭을 반대하였고, 심지어 공개적으로 미국의 군사 개입까지 선언했다.


멕시코 입장에서는 똑같은 간섭일 수 있지만, 미국의 멕시코 간섭은 이른바 ‘먼로주의’에 기반한 개입이었다. 1850년대 멕시코는 내전으로 막대한 채무가 발생했다. 결국 1861년 10월 프랑스, 영국, 스페인 등은 부채 상환을 요구하며 멕시코에 군대를 보냈다. 당시 미국은 먼로 선언에도 불구하고 남북전쟁 때문에 이에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프랑스, 영국, 스페인 군대는 멕시코에 상륙해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결국 멕시코 정부는 부채 상환을 약속하고, 다만 어려운 재정 상황을 고려하여 상환 기간을 유예해 달라고 요청했다. 영국과 스페인은 멕시코가 부채 상환을 약속하자 1862년 4월 군대를 철수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멕시코 정부의 약속만으로는 부족하다면서 계속 군대를 잔류시켰다.


이후 프랑스는 멕시코에 병력을 계속 증원하며 주요 도시를 장악했다. 결국 1863년 6월 프랑스군은 멕시코시티까지 점령했다. 프랑스군이 1863년 말까지 아카풀코를 비롯해 주요 저항 거점까지 손에 넣으면서 멕시코는 사실상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는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의 동생인 막시밀리안을 멕시코 황제로 내세웠고, 그는 프랑스의 꼭두각시 군주로 즉위했다.


하지만 멕시코에서는 반군의 저항이 계속 이어졌다. 반군은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남북전쟁을 치르고 있던 미국은 대외적으로는 멕시코 문제에 중립을 취했지만, 비공식적으로 멕시코 반군을 지원했다. 미국 남북전쟁에서 북군의 승리가 분명해지자 1864년 4월 미 국무장관 시워드는 멕시코의 군주제 시행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멕시코의 군주제가 미국의 공화제 유지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이는 미국의 정책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남북전쟁이 끝나갈 무렵이 되면 멕시코 반군은 미국에서 채권을 판매해 군자금을 모금했고, 이를 통해 대규모 무기와 보급품까지 조달했다. 그리고 미국은 프랑스가 멕시코에서 철수하지 않을 경우 군사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위협했다. 미국과 프랑스 간의 군사적 충돌 위기는 결국 프랑스가 철군을 결정하면서 해소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군사적 위기는 프랑스군의 철군이 완료되기 전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문제가 미국에서 중요한 이슈가 되기는 어려웠다.


결정적으로 앤드루 존슨 대통령이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 의회와 충돌하면서 정치적으로 심각한 혼란이 계속되었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미 하원을 통과하면서 존슨 행정부는 사실상 레임덕 상태에 빠졌다. 대통령 탄핵안은 상원에서 3개월 가까이 논의가 지속된 끝에 결국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그는 대통령의 지위는 회복할 수 있었지만, 정치적 영향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연임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졌다.


여기에 멕시코 뿐만 아니라 파라과이, 브라질, 아르헨티나에서 전쟁이 계속되었고, 그 외에도 중남미 각국의 정치적 불안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1868년 8월 13일에는 페루와 칠레 북부에서 진도 8.5~9.0의 지진이 일어나면서 에콰도르, 볼리비아 등 인접한 국가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이 지진으로 인해 태평양 전역에 쓰나미가 일어났고, 일본까지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중남미 국가의 위기는 유럽의 개입을 불러올 수 있었다. 미국은 불안이 자국으로까지 확대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중남미에 함대를 파견하는 등 아메리카 대륙 문제에 집중했다.


1869년 그랜트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랜트 대통령은 취임 직후 연두교서에서 대외 팽창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여력이 없었다. 결정적으로 미국 정부는 남북전쟁 이후 재건에 집중하면서 군사비를 대폭 감축한 상태였다.


1867년 미 해군은 278척의 군함과 2,351문의 함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복무 중인 미 해군은 총 13,600명이었다. 하지만 1868년에는 군함은 206척으로, 함포는 1,743문으로 줄어들었다. 이 중 실제 운용 가능한 군함은 81척에 불과했다. 복무 중인 해군도 견습생 포함 8,500명으로 감소했다. 사실상 해군 예산의 상당 부분은 기존 함정을 유지·보수하는 데 쓰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신미양요 당시까지 계속되었다.


미 아시아 함대가 관할하는 해역은 아시아의 모든 해역을 아울렀고, 희망봉에서부터 아프리카 동부 및 북동부, 그리고 태평양 해역의 서편 경계까지 포함했다. 이 넓은 해역을 불과 8척이 담당하고 있었다. 심지어 함대를 재편성하면서 2척은 미국으로 복귀했고, 군축으로 2척은 판매했다. 여기에 한 척은 영국 배와 충돌하면서 침몰한 상태로 항구에 방치되었고, 한 척은 수리가 필요한 상태였다. 따라서 신미양요 이전 실질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군함은 2척뿐이었다. 즉 전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아시아 함대의 전력을 보충한 이후 처음 투입한 전쟁이 바로 신미양요였다. 그 결과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군의 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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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soothhistory@nahf.or.kr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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