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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누구] 신군부 핵심…간접선거로 11~12대 대통령


입력 2021.11.23 12:04 수정 2021.11.23 12:05        정도원 기자 (united97@dailian.co.kr)

23일 오전 향년 90세를 일기로 별세

1931년 일제 때 경남 합천서 태어나

육사 11기…5·16 지지 시위로 주목

월남 참전, 청와대·중정 파견 근무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지난 1995년 12월 고향인 경남 합천의 선산을 찾아 조상들의 묘소에 성묘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있다. ⓒ연합뉴스

23일 향년 90세를 일기로 별세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1~12대 대통령을 지낸 군인 출신의 정치인이다. 1961년부터 1979년까지 집권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軍部)에 대비해, 신군부(新軍部)의 중심 인물로 분류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31년 일제 강점 치하에서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에서 태어났다.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11기로 입교했는데, 육사는 10기까지는 4년 과정을 이수하지 못하고 전쟁에 투입된 반면 11기부터는 제대로 4년 과정을 거쳐 학사학위를 인정했으므로 이들 11기들은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4년 과정을 마치고 1955년 육군 소위로 임관한 전 전 대통령은 1961년 당시 육군 소장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5·16 군사정변이 터지자 이를 지지하는 육사 생도들의 시위를 만들어내면서 기획력을 인정받아 군사정권의 눈에 들었다.


이에 1963년 대선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갓 생겨난 중앙정보부에 파견근무를 했으며, 군으로 돌아온 뒤에는 요직은 육군본부 인사과장을 지냈다. 수도경비사령부 대대장을 지낸 전 전 대통령은 1969년 육사 11기 중에서 처음으로 대령으로 진급했다.


1970년 베트남 전쟁에 9사단 29연대장으로 참전하며 야전과 실전 경력을 쌓은 전 전 대통령은 1973년 육군 준장으로 진급해 별을 단 뒤, 1976년에는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의 발탁으로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기용됐다. 이듬해에는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1978년 1사단장에 임명됐다.


보안사령관 시절 10·26 터지며 기회
정승화 계엄사령관 연행해 권력 장악
국보위 체제서 국회·기존 정당 해산
민정당·관제야당 만든 뒤 대통령 당선


육군사관학교 축구부 주장 시절의 전두환 전 대통령(왼쪽에서 두 번째). 이 때에는 아직 머리숱이 많았다. ⓒ연합뉴스

1979년 보안사령관으로 있던 시절, 10·26 사태가 터지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은 권력 장악의 호기를 맞이했다. 보안사령관으로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게 되자 전 전 대통령은 10·26 사태 당시 사건 현장에 있었던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조사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12월 12일 병력 6000여 명을 동원해 정 사령관을 불법 연행하고 육본과 국방부 등을 불법 점거했다. 이른바 12·12 사태다.


이듬해 '서울의 봄'의 상황 전개를 주시하던 전두환 전 대통령은 5월 17일 전격적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조치하고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 등 이른바 '3김' 세력을 제압했다. 국회 또한 위헌적으로 해산됐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근거지인 광주광역시에서 김 전 대통령의 즉각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나자 전 전 대통령은 계엄군과 공수특전단을 투입해 유혈 진압을 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하며 권력을 공고히 한 전 전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대체하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와 국회를 대체하는 국가보위입법회의 등의 위헌 기구를 임의로 설치했다.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는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입법해 집권여당 공화당과 야당 신민당 등을 임의로 해산하고,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이는 5·16 군사정변 직후 박정희 전 대통령 등 군부 세력이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정치활동정화법을 입법해 정치인들의 손발을 묶은 것을 본받아 신군부 또한 똑같은 수순을 밟은 것으로 평가된다.


거칠 것이 없어진 전두환 전 대통령은 육군 대장으로 스스로 진급한 뒤 예편해서 민간인이 된 뒤에 최규하 전 대통령도 몰아냈다. 대통령이 궐위가 되자 전 전 대통령은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 선거로 11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듬해 제5공화국 헌법안이 마련되고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이 의결되자, 전두환 전 대통령은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과 관제 야당인 민주한국당(민한당), 한국국민당(국민당) 등 3개의 정당을 임의로 만든 뒤, 민정당 총재로 취임했다. 이후 5공 헌법에 따른 '체육관 선거'로 12대 대통령에 다시 당선됐다.


재임중 '3S 정책' 펼쳐…프로야구 창설
올림픽 유치 …아시안게임 성공 개최
6월 항쟁 거세자 6·29 선언 기획연출
노태우에 권력 넘긴 뒤 백담사 유폐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1년 5공화국 헌법에 따른 '체육관 선거'로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된 뒤, 그해 3월 3일 대통령 취임식을 갖고 있다. ⓒ연합뉴스

5공 헌법은 대통령 7년 단임을 규정하고 있었다. 7년 임기 동안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이른바 '3S 정책'의 일환으로 프로야구를 창설하고 '국풍 81'을 개최했으며, 서울올림픽 유치를 확정지었다. 1985년에는 학원자유화조치를 실시하는 등 유화 국면으로 접어들었으며, 아웅산 테러로 냉각됐던 남북 관계도 이산가족 상봉 등을 계기로 풀어가려는 모습을 보였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개최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전 전 대통령은 2년 뒤의 올림픽 개최에도 자신감을 갖게 됐으나, 1987년 대선을 한 해 앞두고 야당의 직선제 개헌 요구가 거세지자 전 전 대통령은 4·13 호헌 조치를 통해 5공화국 헌법에 따른 '체육관 선거'로 후임자에게 권력을 물려주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6월 들어 '6월 항쟁'이라 표현되는 범국민적 저항 운동이 거세지고,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등 통치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 군을 투입해 시위를 진압할 수도 없었으며, 미국도 이에 반대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전두환 전 대통령은 민정당 대표최고위원이자 권력을 승계할 예정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과 상의해, 노 전 대통령으로 하여금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겠다는 6·29 선언을 발표하게 하고 자신은 이튿날 이를 수락하면서 정치적 반전을 꾀했다.


이러한 승부수가 통하면서 1987년 대선에서 집권 민정당의 대선후보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 1988년 2월 전두환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에게 대통령직을 넘긴 뒤, 일해재단과 국가원로자문회의 등을 통해 수렴청정을 할 생각이었지만 그해 총선에서 집권 민정당이 참패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원내 과반 의석을 차지한 통일민주당(민주당)·평화민주당(평민당)·신민주공화당(공화당)은 '5공 청산'을 요구하며 국회에 관련 특위들을 설치하고 국정조사와 청문회에 돌입했다. 전 전 대통령은 스스로 백담사로 칩거해 유폐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현실정치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자신이 만든 민정당에서도 탈당해야 했다.


2년여 동안 백담사 유폐 생활을 하던 전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민자당)이 출범한 뒤에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문민정부서 '역사바로세우기' 대상 돼
5·18 특별법으로 기소…1심서 사형
무기징역 감형된 뒤 DJ 요청으로 사면
별세 직전 회고록 둘러싼 송사 휘말려


민정당 대표최고위원이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1987년 6·29 선언을 기획하고 수락하는 모습을 연출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그해 노 전 대통령이 민정당 대선후보로 지명된 직후 힐튼호텔에서 열린 축하연에서 대선 필승을 기원하며 건배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1993년 김영삼정부가 들어서자 '역사 바로세우기' 압박이 거세졌다. 1994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가족들이 전 전 대통령을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 혐의로 고소했다. 5·18 특별법이 입법돼 공소시효 문제가 해결되자 전 전 대통령은 전격 구속됐다.


재판 과정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항소심에서 '항장은 불사'라는 이유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1997년 상고심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된 뒤, 대선에서 승리한 김대중 당선인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사면을 요청하는 형태로 전 전 대통령은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이후 전두환 전 대통령은 김대중정부 시절 청와대에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몇 차례 초청을 받은 것 외에는 이렇다할 공개적 대외 활동을 하지 않으며 눈에 띄지 않는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지난 2017년에 출간한 회고록에 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표현이 있다는 이유로 전 전 대통령은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다시 고소를 당했다. 광주에서 진행되던 재판에 출석과 불출석을 반복하던 전 전 대통령은 지난 8월 항소심 재판에 출석하는 과정에서 수척해진 모습으로 충격을 줬다. 이 때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을 앓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암 투병을 하던 전두환 전 대통령은 23일 오전 90세를 일기로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군과 정치권에서 경력을 함께 쌓았던 '친구'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지 한 달여 만의 일이다.

정도원 기자 (united97@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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