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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31>] 야화


입력 2022.08.17 14:08 수정 2022.08.17 11:09        데스크 (desk@dailian.co.kr)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영화 속 한 장면ⓒ 영화 속 한 장면ⓒ

제31화 야화


이윽고 방선희가 석양에 물든 노을을 등지고 달동네를 내려왔다. 맑고 건조한 봄바람이 방선희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문득 향기로운 냄새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방선희는 큰길가로 나가 정차해 있는 택시에 탑승했다. 이철백도 부리나케 택시를 잡아타고 방선희를 뒤쫓아 갔다. 방선희는 유흥업소가 밀집한 거리에 하차한 다음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규칙적으로 내며 ‘야화’라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이거 낭패로군. 어떡하지? 한동안 근처를 배회하며 이철백이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야화에 들어가 확인하는 것도 뭣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돌아서는 것 역시 남자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 고민하는 사이 어스름이 지고 어둠이 내렸다. 유흥가는 네온사인으로 휘황찬란해지고 여급들이 야한 옷차림으로 호객을 위해 거리로 나왔다. 이철백은 불현듯 방선희와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주춤주춤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이철백이 불콰한 얼굴로 대낮부터 막걸리를 마셔대고 있었다. 며칠 동안 방선희를 잊으려 무진장 애를 썼지만 이제껏 가슴에 묻어둔 그리움이 임계점을 넘어버린 것만 같았다. 하필이면 학교 앞 분식집에서 점심으로 라면을 먹으며 막걸리를 입에 댄 게 화근이었다. 그렇잖아도 이철백의 머릿속은 방선희에 대한 연민과 함께 이제 그만 잊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뒤죽박죽 갈등이었는데 별안간 막걸리로 인한 취기가 기폭제로 작용하여 온통 연민으로만 가득 차버렸다.


이철백은 해질 무렵까지 하이에나처럼 학교 앞 술집을 돌아다니며 막걸리에 소주에 맥주를 닥치는 대로 마셔댔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어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가게 되었는데 이철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야화’ 앞에 우두커니 서있는 것이었다. 그게 어젯밤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새벽에 머리가 아프고 속이 쓰려서 눈을 뜨긴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철백은 모텔방의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옆에는 놀랍게도 방선희가 모로 누워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이철백은 당혹스러운 광경에 한동안 머리를 싸매고 생각에 잠겼다. 어제 만취한 채로 야화에 가서 방선희를 만나러 왔다고 큰소리를 치다가 누군가와 시비가 붙어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렇게 폭행당하다가 바닥에 쓰러져서 얼핏 방선희를 본 것도 같았다.


온몸이 쑤시고 아파 상체를 일으켜 몸을 살펴보았다. 군데군데 시퍼런 멍이 들어있었고 옆구리와 가슴은 뜨끔거리고 결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말 그대로 가관이었다. 눈두덩이 시퍼렇고 입술이 터져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방선희가 자신을 부축해 모텔로 데리고 온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이 방선희의 옷을 벗겨 관계를 가진 것 같기도 했다. 간밤의 상황이 꿈결처럼 긴가민가했다.


방선희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유난히 뽀얀 방선희의 목덜미와 굴곡진 몸매가 이철백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철백은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방선희의 육감적인 뒤태에 얼굴을 묻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야릇한 기분에 저절로 침이 꿀꺽 삼켜졌다.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우며 방선희의 육체를 탐닉한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철백은 숨이 턱턱 막히는 황홀경에 빠져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철백은 방선희를 바로 눕힌 후 그 위에 조심스럽게 자신을 포개 올렸다. 그리고는 불끈 용솟음치는 몸을 방선희에게 밀어 넣었다. 결합이 제대로 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이철백은 원초적인 동작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방선희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이철백은 반사적으로 몸이 굳어버린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방선희가 놀란 표정으로 한동안 이철백을 응시했다.


놀라움과 민망함이 공존하며 침묵이 이어졌다. 일초가 여삼추처럼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방선희가 먼저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고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이철백의 몸을 이끌어 주었다. 이철백이 당황한 나머지 얼굴을 붉히자 방선희는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감아주었다. 이철백이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방선희의 선홍빛 입술이 벌어지는가 싶더니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철백은 흥분에 못 이겨 격정적으로 온몸을 진동시켰다. 그리고는 단거리 육상 선수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방선희의 가슴 위에 쓰러졌다. 방선희가 마치 어린애 달래듯 이철백을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걱정 마. 책임지란 소린 안할 테니까.”


샤워를 하고 퇴실할 채비를 차릴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쭈뼛거리는 이철백을 보고 방선희가 한 말이었다. 이철백은 어색한 발걸음으로 방선희를 따라 모텔을 나섰다. 그리고 방선희가 사주는 해장국을 먹고 학교에 갔다. 그날 이후 이철백은 다시 방선희와의 만남을 이어갈 수 있었다. 방선희는 이철백을 만나는 날엔 업소에 나가지 않고 모텔에 들어가 함께 밤을 새웠다. 이철백은 방선희를 통해 육체에 눈뜨게 되었고 둘은 불타는 밤을 보내며 정말 뜨겁게 사랑했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방선희가 유흥업소에 나간다는 소문은 조그만 도시에서 금방 주위사람들에게까지 알려졌다. 방선희는 친구들에게 외면당하는 처지가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이철백과의 만남 때문에 결근이 잦아지면서 업소에 내야 할 벌금까지 쌓이게 되자 그만 동생들을 데리고 야반도주를 해버렸다. 이철백은 방선희를 찾기 위해 한동안 미친 듯이 쏘다니며 수소문했다. 학과사무실은 물론 야화와 야화에 근무하던 여급들까지 찾아다녔지만 도시의 어느 곳에서도 방선희의 소재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이철백은 그로부터 한참동안이나 열병을 앓다가 가까스로 방선희를 잊을 수 있었다.


술에 취한 홍 기사를 먼저 귀가시키고 이철백은 블랙&화이트를 나서 방선희와 함께 택시를 타고 가급적 멀리 떨어진 노래방으로 향했다. 인근 노래방에 들었다가는 혹시라도 단골손님의 눈에 띌까 걱정된다는 방선희를 위한 배려였다. 방선희는 먼저 노래해보라는 이철백의 권유에 거절 한번 하지 않고 가수 우연이의 노래 ‘우연히’를 열창했다. 이철백은 곁에 서서 신나게 탬버린을 두들겨 주었다.


나이트클럽에서 우연히 만났네, 첫사랑 그 남자를. 추억에 흠뻑 젖어 함께 춤을 추었네, 철없던 세월이 그리워. 행복하냐 물었지. 아무런 말도 없이 눈물만 뚝뚝뚝 흘리는 그 사람. 난 벌써 용서했다고. 난 벌써 잊어버렸다고. 말을 해놓고 안아주었지. 정말 정말 행복해야 된다고.


가슴을 저며 놓는 애잔한 가사로 인해 매우 신나는 리듬이었지만 구슬프게 느껴지는 이중적인 노래였다. 방선희는 자신이 취입한 노래라 해도 무색할 만큼 아주 멋들어지게 솜씨를 자랑했다. 방선희가 혼신의 힘을 다해 목청을 높이자 거침없이 고음이 올라가더니 어느 순간 얼음장처럼 쩍 갈라졌다. 이철백은 빠른 템포에 맞춰 신나게 탬버린을 치면서도 방선희의 열창에 차라리 가슴 한 구석이 미어지도록 아파오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이철백이 뒤에서 방선희를 꼭 껴안아 주었다. 방선희는 잠깐 몸을 움찔했지만 이철백의 백허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노래를 불렀다.


노래방을 나서니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장마전선이 북상하고 있는 건지 부슬부슬 비까지 내렸다. 두 사람은 촉촉하게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도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맞은편 도로에서 달려오는 자동차 전조등이 내리는 비를 조명인양 비췄다. 전조등에 비쳐진 비가 마치 은빛 안개비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주 오래된 연인처럼 인근 모텔로 들어갔다.


ⓒ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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