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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대의 은퇴일기⑱] 부쩍 자라 존댓말 하는 손자와 어른스러워진 손녀


입력 2023.01.31 14:01 수정 2023.02.01 10:47        데스크 (desk@dailian.co.kr)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다니던 손주들이 미국으로 떠난 후 4개월 만에 다시 만났다. 다섯 살인 손자가 존댓말을 쓰고, 일곱 살 손녀는 동생을 잘 보살펴 주는 모습에 뿌듯함이 느껴진다.


집 앞에서 누나를 껴안고 있는 손자ⓒ필자 집 앞에서 누나를 껴안고 있는 손자ⓒ필자

손주들이 미국 샌디에이고로 떠났다. 한동안 그 모습이 아롱거렸는데 시간이 지나자 조금은 무덤덤해졌다. 아내를 도와 아침저녁으로 손주를 돌봐오다 그런 부담에서 벗어나 마음껏 활동하였다. 아침 일찍 나가는 사진 동호회 출사도 참여할 수 있고, 친구들과 저녁 모임에서도 느긋하게 소주 한잔을 나눌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한번 놀러 오라며 여행 일정표를 보내왔다. 날짜별 상세한 시간계획표와 함께 여행지의 숙소까지 예약해 놓았다고 한다. 일정표를 살펴보니 밤잠 설치며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딸이 있으면 비행기 타고 외국 간다’는 속설이 마음속에 들어왔다.


11시간의 긴 비행시간 끝에 LA 공항에 도착했다. 걱정스러웠던 입국 절차도 무사히 마치고 출국장으로 나가자 딸 내외와 손주들이 기다린다. ‘할아버지’ 부르며 뛰어오는 손자와 손녀를 번갈아 안아 볼을 비비며 해후를 한 후 그제야 딸과 사위와도 포옹해 본다. 손주들의 얼굴이 검고 좀 야위어진 것 같아 ‘적응하느라 힘들어서 그런가?’ 하는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캘리포니아 지역의 강렬한 햇볕을 받아 그렇다고 한다. 4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몇 년 동안 떨어졌다가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집 소파에서 책을 보는 손자ⓒ 집 소파에서 책을 보는 손자ⓒ

손녀는 “입국할 때 직원이 뭐 물어봤냐?”면서 “대답은 어떻게 했느냐?”고 궁금해 한다. 아빠 혼자 자기와 동생을 데리고 입국할 때 질문 내용이 많아 시간이 오래 걸린 적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 손자는 나에게 안기자 “할아버지, 미국에서 영어는 ‘헬로우’만 알면 돼요”라고 이야기한다. 속으로 웃음이 난다. 어린이집에서 그 정도면 소통이 되는 모양이다.


현지에 와서 학교와 어린이집 물색해서 입학시키고 살림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 바쁜 와중에도 우리의 여행 계획까지 짜느라 얼마나 신경을 썼을까 생각하자 고맙기도 하지만 부담을 준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다.


손자는 어린이집에 다녔지만 ‘가나다’나 ‘ABC’도 모른 상태로 미국에 갔다. 처음에는 어린이집 가는 것을 싫어했는데 이제는 신나게 다닌다. 아침에 어린이집에 데려다 줄 때 같이 가 봤더니 선생님과 반갑게 ‘헬로우’하며 인사를 한다. 선생님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친구들하고 장난감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된 것 같다.


얌전히 포즈를 취한 손녀ⓒ 얌전히 포즈를 취한 손녀ⓒ

한국에서 지낼 때는 할아버지에게 평상어를 썼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할아버지 식사하세요”, “할아버지 이거 어떻게 만들어요” 하며 갑자기 존댓말을 써서 깜짝 놀랐다. 고집부리고 떼쓰던 손자가 야물어지고 의젓해진 것 같아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달라졌을까?’ 하는 의아한 생각에 마음이 아렸다. 어린이집에 다녀와서는 딘, 버핸, 쇼타와 같은 친구들의 이름을 이야기하면서 뭐 하고 놀았는지, 어떤 공부를 했는지 자랑스럽게 이야기해 준다. 다양한 나라의 친구들과 잘 지낸다니 여간 다행스럽지가 않다.


하루는 애플파이 가게에서 갑자기 큰 소리로 “Hey! My apple juice where it go!”라고 이야기한다. 깜짝 놀라 다시 한번 더 말해 보라고 했더니 똑같이 되풀이한다. 어린이집에 다니지만 아직은 의사소통조차 어려울 텐데 영어가 은연중에 스며들어 문장이 튀어나온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하더니 대견하고 사랑스럽다.


어느 날은 둘이 앉아 누나가 “What’s your name”하고 물어보면 “My name is do hyun kim”이라고 하는 식으로 묻고 답하기를 한다. 집에서 특별히 가르쳐주지 않는데도 어린이집에서 친구나 선생님과 지내면서 영어가 배어든 모양이다.


동생의 어깨를 감싸고 걸어가는 오누이 모습ⓒ 동생의 어깨를 감싸고 걸어가는 오누이 모습ⓒ

외국어는 억지로 가르치기보다는 또래들과 어울려 놀면서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것이 효과가 크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동안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하고 싶은 말이 통하지 않아 얼마나 심적인 부담이 컸을까?.


손녀는 훨씬 어른스러워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생트집 잡거나 고집을 부리기도 했는데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셨어요”라며 인사를 한다. 동생하고 다투면 화가나 울기만 하던 누나였지만 이제는 동생의 두 손을 꼭 잡고 큰 소리로 타이르면 누나의 매서운 눈초리에 풀이 죽어 뒤로 물러선다. 소파에 앉아 동생을 껴안고 책을 읽어주며 설명하는 모습을 보자 ‘많이 컸구나’하는 생각에 흐뭇해진다.


한국에 있을 때는 떼쓰다 엄마·아빠한테 혼나면 할아버지 할머니께 달려와 안기곤 했는데 이제 온전히 부모하고만 지내다 보니 독립심과 강단이 생기고 오누이 간의 정도 돈독해졌다.


LA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한 손주들ⓒ LA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한 손주들ⓒ

미국 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 9월 학기에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갔지만, 다행히 친구들과 어울리며 잘 적응한다. 외국에서 온 학생들은 듣고 말하는 것이 부족하면 방과 후 보충수업을 해 주는데 손녀는 수업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한국에서 영어유치원 1년 다닌 것이 효과가 큰 것 같다.


한번은 와이너리에 손녀를 데리고 갔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으니 이곳저곳 그냥 구경만 하는데 손녀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한다. 그럼 네가 사 오라고 했더니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요구한 맛의 아이스크림까지 사 왔다.


여행 중에 공연을 관람할 기회가 있었다. 사전에 사회자 안내가 있었지만, 빠른 목소리로 이야기하여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옆에 있던 손녀가 “할아버지 공연 중에 사진을 찍으면 안 된대요”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몇 컷 촬영하려고 했었는데 손녀가 아니었으면 창피를 당할 뻔했다. 말하는 것을 알아들을 뿐 아니라 선진국의 문화 환경에 자연스럽게 동화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와는 많이 달라진 손주들을 보자 대견했다. 처음에는 ‘어린 나이에 낯선 곳에 와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되어 애처로웠지만, 우려와는 달리 잘 적응하면서 지내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 간섭하기보다는 지켜보면서 자립심을 길러주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자녀들을 과보호하는 우리나라의 풍토도 바뀌어야 할 것 같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손주들과 이별하고 돌아오자 환하게 웃는 모습이 눈에 선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귀에 쟁쟁하다. 다음에 만날 때는 부쩍 자라 있겠지?.


ⓒ

조남대 작가 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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