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차 시장서 현대차‧기아와 경쟁 역부족
국산 완성차 업체 이미지로는 수입 판매 한계
한국색 빼고 브랜드 정체성 강화해 '수입차화'
한국에 생산라인을 갖춘 완성차 기업이라는 점이 예전엔 내수 판매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됐지만 지금은 핸디캡이 됐다. 한국GM과 르노코리아 얘기다.
외국계 완성차 기업 한국GM과 르노코리아가 ‘한국색 빼기’에 나섰다. 사명과 엠블럼, 마케팅 포인트까지 브랜드 본연의 경쟁력을 살리기 위해 ‘수입차화’를 꾀하고 있다.
르노코리아는 지난 3일 르노의 새로운 브랜드 전략 ‘일렉트로 팝’의 국내 시장 적용 계획을 밝혔다. F1노하우에 기반한 전동화 기술, 첨단 인포테인먼트를 중심으로 한 커넥티비티 기술, 안전을 앞세운 휴먼 퍼스트 프로그램 등 르노가 전세계 사업장에서 펼치는 마케팅 캠페인을 한국에서도 전개하겠다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기존 르노코리아자동차였던 사명에서 ‘자동차’를 뗐다. 과거 르노삼성자동차에서 ‘삼성’을 뗀 지 2년 만이다. ‘르노코리아’로 단순화된 명칭은 프랑스 르노의 한국사업장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해준다.
30년 가까이 사용하던 삼성자동차의 유산 ‘태풍의 눈’ 엠블럼도 르노가 100년 넘게 사용한 다이아몬드 형상의 ‘로장주’로 바꿨다.
차명에도 변화가 생긴다. 주력 모델인 XM3는 글로벌 모델과 동일한 차명을 적용해 ‘뉴 르노 아르카나’로 변경했다. 르노코리아의 마지막 세단 SM6는 현재로서는 후속 모델 개발계획이 없는 상태다. QM6만 글로벌 차명인 ‘꼴레오스’를 사용하지 않고 기존과 같이 유지한다. 국내 소비자들에게 익숙한 차명이라는 이유에서다.
앞으로 중국 지리그룹과 합작으로 르노코리아 부산공장에서 생산하는 오로라1과 오로라2 등 오로라 프로젝트 차종들, 그리고 르노 본사에서 수입해 판매하는 세닉, 르노5 등이 차례로 출시되며 SM(세단), QM(SUV), XM(CUV) 뒤에 차급별 숫자를 붙이는 법칙은 과거의 역사로 남을 예정이다.
르노코리아의 이같은 움직임은 같은 외국계 완성차 기업인 한국GM의 과거 행보와 오버랩된다. 한국GM은 지난 2011년부터 일찌감치 쉐보레 브랜드를 도입하고 기존 GM대우에서 ‘대우’를 떼는 등 한국색을 빼는 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국내에서 해외 브랜드로 어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급기야 지난 2022년부터는 글로벌 GM 내 RV 브랜드인 GMC를 도입해 쉐보레와 이원화하며 ‘정통 아메리칸 브랜드’임을 어필했다. 사명도 법인명은 ‘한국지엠’을 유지했지만 대외적으로는 ‘제너럴모터스(GM) 한국사업장’이라는 명칭을 앞세웠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도 가입해 ‘해외 브랜드’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
두 회사 모두 한국색을 빼고 그 위에 ‘125년 역사를 자랑하는 프랑스 브랜드’와 ‘정통 아메리칸 브랜드’를 덧씌운 것이다.
르노코리아와 한국GM의 이같은 움직임은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두 회사가 처한 ‘애매한 포지션’과 무관치 않다.
국내 완성차 시장은 형제 회사인 현대자동차와 기아가 장악하고 있다. 지난해 완성차 5사 내 현대차‧기아의 점유율은 91.5%에 달했다. 나머지 10%도 안 되는 시장을 중견 3사가 나눠먹는 구조다.
그나마 4.4%는 또 다른 토종 브랜드 KG 모빌리티가 가져갔다. 한국GM은 2.7%, 르노코리아는 1.5%의 초라한 점유율에 머물렀다.
이정도 스코어면 열심히 노력해서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근본적인 구조상의 문제다.
국내 소비자들은 중견 3사에 현대차‧기아보다 낮은 가격을 제시해 국내 자동차 시장 전체의 가격 수준을 끌어내리는 역할을 기대한다. 점유율이 떨어지면 싸게 파는 노력이라도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산업 분야에서 가격 경쟁력은 ‘규모의 경제’와 연동된다. 많이 찍어낼수록 더 싸게 팔 수 있다. 현대차‧기아에 비해 판매량이 턱없이 적은 한국GM과 르노코리아가 그들보다 더 낮은 가격을 책정해서는 수익을 낼 수 없다.
고심 끝에 찾은 해법이 생산라인은 수출에 주력하고 내수 판매는 수입 모델로 보완하는 ‘투 트랙’ 전략이다. 한국GM의 경우 공장 일감의 대부분을 트랙스 크로스오버와 트레일블레이저 북미 수출 물량에 의존하고 있다. 르노코리아 역시 르노 아르카나 수출물량으로 부산공장을 돌린다.
문제는 국내 시장에서 수입차를 파는 게 녹록치 않다는 점이다. 해외 시장에서 현대차‧기아와 경쟁하는 대중차 브랜드 폭스바겐과 토요타, 포드는 국내 시장에서 같은 차급이라도 국산차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책정하고도 수용이 된다.
브랜드 자체의 경쟁력과 상품성도 어느 정도 작용하겠지만 근본적인 바탕에는 그들이 ‘수입차’로 인정받는다는 데 있다. 국내 소비자들의 수입차 구매 이유에 ‘하차감(과시성)’이 어느 정도 반영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르노코리아와 한국GM이 파는 차종들은 그렇지 않다. GM은 미국에서 포드와 전통적 라이벌 관계다. 그럼에도 국내 시장에서 GM의 쉐보레 트래버스는 동급 경쟁차인 포드 익스플로러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훨씬 편리한 AS망을 갖추고도 한수 아래로 여겨져 왔다. 포드 머스탱의 경쟁차인 쉐보레 카마로 역시 같은 처지다. 유럽 시장에서 폭스바겐의 맞수인 르노 역시 한국 시장에서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
GM과 르노에 씌워진 ‘국산차’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미국과 프랑스에서 생산된 차를 수입해다 팔아도 동급 수입 경쟁차와 비슷한 가격을 책정하면 ‘국산차가 왜 이리 비싸’라는 소릴 듣는다.
국내에서 오랜 기간 자동차를 생산해 국가 경제에 기여하고 저렴한 가격에 소비자에게 공급하며 쌓아온 친숙함이 오히려 본사의 브랜드 경쟁력을 바탕으로 수입차 시장에서 경쟁하는 데는 독이 된 것이다.
결국 두 회사의 ‘한국색 빼기’ 전략은 르노와 GM 브랜드의 경쟁력을 온전히 살려 다른 수입차들과 경쟁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브랜드명과 엠블럼을 바꾼 르노코리아가 르노 본사로부터 들여와 판매하는 준중형 SUV 전기차 세닉 E-테크와 소형 해치백 전기차 르노5 등이 한국 시장에 안착하려면 이들이 온전하게 ‘수입차’로 국내 소비자들에게 인식돼야 한다.
자동차 업계 한 관계자는 “한국에서 수입차를 사는 소비자들에게 있어 ‘하차감’은 굉장히 중요한 가치”라며 “과거 한국GM이 쉐보레 브랜드를 들여오기 전에도 지엠대우 엠블럼을 떼고 보타이 엠블럼을 달고 다니는 이들이 많았고, 르노코리아 차종들도 이번 엠블럼 교체에 앞서 일찌감치 로장주 엠블럼을 부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모두 수입차의 하차감을 누리기 위한 게 아니겠느냐”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르노코리아가 르노로부터 들여오는 차종들이 국내에서 성공하려면, 폭스바겐, 볼보와 같은 하차감을 제공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르노삼성 시절 쌓아온 이미지를 미련 없이 완전히 걷어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