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브리드차 초창기, 토요타 기술제공 거부하고 독자기술 개발
대등한 위치 올라서자 로보틱스, 수소차, 모터스포츠 등 협력
고(故) 정주영 창업회장 시대의 현대차에게 토요타는 넘을 수 없는 큰 산이었고, 정몽구 명예회장 시대의 현대차에게 토요타는 벤치마킹의 대상이었다. 지금, 정의선 회장 시대의 토요타는 현대차의 강력한 경쟁자이자, 함께 손잡고 모빌리티 패러다임 변화의 파고에 맞설 동맹이다.
현대차가 업계 ‘선배’이자 ‘라이벌’ 토요타를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와 토요타 간 긴밀한 협력 움직임이 여러 방면에서 포착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협력 분야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미래 먹거리 중 하나로 손에 꼽은 로보틱스다. 현대차그룹 산하 로봇 개발사 보스턴다이내믹스와 토요타리서치연구소(TRI)는 최근 인공지능(AI)을 활용한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과 관련해 다양한 연구에 협력한다는 내용의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두 회사는 보스턴다이내믹스의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와 TRI의 거대행동모델(LBM)을 활용해 범용 휴머노이드 로봇의 개발을 가속하는 것이 이번 파트너십의 목표라고 밝혔다.
2족 보행을 비롯, 인간과 유사한 움직임을 구현하며, 양손의 세밀한 조작도 가능한 아틀라스와 토요타의 생성형 AI 기술을 접목시켜 다양한 분야에 활용 가능한 휴머노이드 로봇을 탄생시키겠다는 것이다.
두 회사 공동 연구팀은 우선 아틀라스를 다양한 작업에 투입해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LBM을 심화시켜 더 강력하고 민첩한 기술을 습득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로봇 간 상호작용 및 안전 등에 대한 연구도 수행할 예정이다.
완성된 로봇은 공장 생산라인은 물론, 노인 돌봄 등 가정용 로봇으로도 투입할 수 있도록 기능과 성능을 고도화할 예정이다.
로보틱스는 자동차 업계에서 미래 성장동력으로 각광받는 분야다. 자체 생산라인에 로봇을 투입해 효율을 향상시키는 등 자체 수요도 충분하고, 통합 모빌리티 솔루션 구축 과정에서 라스트마일(최종 배송단계) 분야에 로보틱스 기술을 활용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로봇 시장이 커질 경우 기존 완성차 대량생산체제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차와 토요타 뿐 아니라 테슬라 등 다양한 자동차 기업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고성능 자동차 기술력을 뽐내는 모터스포츠 분야에서의 현대차와 토요타의 협력은 업계에서 큰 화제가 됐다. 두 회사는 오는 27일 용인 스피드웨이에서 ‘현대 N x 토요타 가주레이싱 페스티벌’을 연다.
한쪽이 주관하는 모터스포츠 행사에 다른 한 쪽이 참여하는 게 아닌, 두 회사의 모터스포츠 이벤트를 한 무대에서 펼치는 방식의 협업이다. 이런 방식의 협업은 현대차와 토요타는 물론 다른 완성차 기업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날 행사에는 정의선 회장과 토요타 아키오 토요타 회장도 참석할 예정이라, 둘의 회동에서 양사간 진일보된 협력이 도출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가장 유력하게 점쳐지는 게 수소차 분야다. 현대차와 토요타는 세계 수소차 시장에서 가장 앞선 기술력과 양산 경험을 갖추고 있지만, 더딘 대중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수요 증가→수소차 공급 확대→수소차 가격경쟁력 확보 및 충전인프라 개선→수요 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위해서는 시장을 리드하는 ‘투톱’간 협력이 필수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사실 현대차와 토요타는 이미 비공식적으로 ‘합’을 맞춘 경험이 있다. 10여년 전 하이브리드차 시장 초창기의 일이다. 지금은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을 틈타 하이브리드차가 최고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2010년 전후만 해도 하이브리드차는 대중화에 어려움을 겪었다.
시장을 주도하던 토요타에게는 ‘페이스메이커’가 필요했고, 그 역할을 현대차가 훌륭하게 해줬다. 두 회사는 우선 시장부터 키워놓고 보자는 ‘암묵적 협력’ 그리고 ‘선의의 경쟁’ 과정을 거쳐 하이브리드차 시장 대중화를 이끌었다. 그 결과 둘이 나란히 지금의 하이브리드차 호황을 가장 크게 누리게 됐다.
수소차 분야에서는 ‘암묵적’이 아닌 ‘공개적’ 방식을 통해 시장 대중화를 위한 좀 더 긴밀하고 전략적인 협력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서는 현대차와 토요타의 긴밀한 협력이 가능해진 배경으로 글로벌 시장에서의 ‘현대차의 위상 제고’를 꼽는다.
두 회사간 격차가 컸던 때는 손을 잡더라도 현대차가 토요타에 종속되는 모양새가 될 우려가 컸지만, 현대차그룹이 글로벌 톱3에 오른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실제, 현대차가 하이브리드차 개발에 뛰어들 당시 토요타가 관련 기술과 부품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당시 현대차는 기술 종속을 우려해 어려움을 무릅쓰고 독자 기술 개발에 매진해 토요타를 뛰어넘는 연비의 하이브리드차를 내놨다. 그때의 결정이 현대차를 토요타와 대등한 수준에 올려놓는 중요한 계기 중 하나가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업계 한 관계자는 “토요타는 세계 자동차 시장 1위지만, 현대차그룹 역시 3위로 규모 면에서 대등한 위치까지 올랐다. 기술적 측면에서도 전기차 분야는 현대차가 앞서고 있고, 수소차는 시장 대중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로보틱스는 상호 보완이 가능한 관계”라면서 “서로 얻을 수 있는 게 명확한, 대등한 관계에서의 협력이 가능해진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