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하루가 남긴 길고 맑은 여운 '오늘의 영화' [D:쇼트 시네마(142)]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5.12.07 13:25  수정 2025.12.07 13:25

이승현 감독 연출

OTT를 통해 상업영화 뿐 아니라 독립, 단편작들을 과거보다 수월하게 만날 수 있는 무대가 생겼습니다. 그중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부터 사회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메시지까지 짧고 굵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50분 이하의 영화들을 찾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연기 활동을 쉰 지 5년이 지난 철기(윤지홍 분)는 영화 ‘오늘의 영화’에 캐스팅되며 오랜만에 배우의 자리로 돌아온다. 첫 리딩에 참석한 그는 상대 배우 혜랑(문혜인)과 마주앉지만, 공백기 동안 굳어진 긴장 탓에 쉽게 자연스러워지지 않는다.


리딩을 마친 뒤 두 사람은 어색함을 풀기 위해 점심을 함께하기로 한다. 철기가 제안한 중국집까지 걷는 길은 한여름의 무더위로 가득하고, 그는 혹시 자신이 괜히 이 식당을 고집해 혜랑을 힘들게 하는 건 아닌지 계속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혜랑은 그런 철기의 눈치를 살피며 괜찮다고 말하며 따라나선다.


도착한 중국집은 마침 에어컨이 고장나 있었고, 혜랑이 기대하던 냉짬뽕도 얼음이 다 녹아 주문할 수 없다. 결국 두 사람은 더위 속에서 뜨거운 짬뽕을 먹으며 땀을 뚝뚝 흘린다. 어긋나기만 하는 상황이 반복되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 이상하게도 서로에 대한 동지감 같은 감정이 생기기 시작한다.


식사 뒤 그냥 헤어지기엔 아쉽다는 마음이 동시에 싹트고, 이번엔 혜랑이 가보고 싶던 카페로 향한다. 20분 이상 걸어야 하지만 철기는 지금의 분위기라면 더 긴 거리도 마다하지 않을 것 같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 카페 또한 에어컨이 고장 난 상태. 더위 속에서 팥빙수를 나눠 먹던 두 사람은 연기라는 직업의 불안, 공백기 동안 철기가 느꼈던 확신의 결핍, 혜랑이 안고 살아온 두려움과 꿈 같은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차분히 터놓기 시작한다. 서로가 지나온 시간을 천천히 꺼내놓는 동안 마음의 간격이 눈에 띄게 가까워진다.


잠시 후 수리되던 에어컨이 작동하며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두 사람의 표정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번진다. 마치 한낮의 숲속에 들어온 듯한 상쾌함이 그 순간을 감싼다.


전철역 앞에서 번호를 교환하며 오늘이 유독 인상 깊은 하루였다고 나누는 두 사람. 그때 갑자기 감독(변중희)의 “컷!” 소리가 들린다. 이 모든 순간이 영화 촬영의 일부였던 것이다.


촬영이 끝난 뒤 철기는 집으로 향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혜랑에게서 카페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도착한다. 철기의 입가에는 팥이 살짝 묻어 있고, 혜랑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사진을 보며 오늘의 철기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인다.


‘오늘의 영화’가 그려내는 세계는 크지 않다. 두 사람이 더위 속을 걷고, 땀이 흐르는 식탁에 마주 앉고, 서툰 마음을 팥빙수처럼 조금씩 녹여내는 짧은 하루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미세한 시간의 결들이 쌓이며, 영화는 배우라는 직업의 불안과 기대,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과정의 섬세한 온도를 드러낸다.


어긋나는 우연들이 이어지며 불편함을 키우는 듯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불편함이 두 사람의 연결을 만드는 지점이 된다.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영화가 마지막 순간, 관객의 인식을 가볍게 뒤흔드는 방식이다. 그들이 서로에게 솔직해지는 과정이 고스란히 쌓였을 때, 감독의 “컷!” 소리가 등장하며 현실과 연기의 경계가 의도적으로 허물어진다. 연기라는 행위가 삶을 닮고, 삶이 다시 연기를 비추는 순간을 영화는 매우 부드럽게 포착한다.


혜랑과 철기를 바라보는 카메라는 인물의 감정선을 과장하지 않는다. 대신 미묘하게 달라진 말투, 표정,거리감 같은 사소한 변화를 따라가며, 그 속에서 두 인물이 지나온 시간을 조심스럽게 읽어내게 만든다. 팥이 묻은 사진 한 장이 마지막에 남기는 여운 역시, 관계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순간에 더 집중해, 영화의 상쾌한 여운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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