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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라 독설의 종말과 셀레브리티의 사회


입력 2008.07.13 11:11 수정 2013.05.22 16:34        김헌식 문화평론가 (codessss@hanmail.net)

<칼럼>독설의 역학과 셀레브리티의 한국사회

얼마 전 한 논객의 행보의 변절(?) 혹은 말과 행동의 변화에 대한 한 칼럼니스트의 논평을 육성을 통해 들을 기회가 있었다. 수십년동안 많은 저서를 낸 그 칼럼니스트는 비주류 매체에서 활동을 하던 그 논객이 왜 그렇게도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던 매체에 넘어갔는지 그 원인에 대해 분석을 시도 했다. 그것은 한국사회가 유명해지면 끝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단 한국사회에서는 유명해지기만 하면,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 속성을 지녔는데, 그러한 속성을 그 논객은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지에 따르면, 셀러브리티(Celebrity)같이 아무런 실체 없이 단지 유명하기 때문에 유명한 유명인사가 창궐하는 것이 한국사회다. 이른바 노이즈 마케팅이 한국만큼 잘 통하는 곳도 없다는 것이다. 단지 유명하기 때문에 매체와 광고를 장식한다. 따라서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하기 때문에 그러한 태도가 별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논객뿐만 아니라 교수들도 그렇다는 것이다. 맨 처음에는 글 쓰는 매체가 없다보니 군소매체에 글을 쓰면서 그 매체의 논조에 맞춰주다가 어느 정도 이름을 얻으면 바로 주류매체에 가서는 과거 자신이 군소매체에 쓰던 논조는 모두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는 행태를 보인다는 것이다.

최근 김구라가 연일 사과 퍼레이드를 계속하고 있다. 사과대상은 이효리, 김선아, 문희준, 신애, 김정욱 등에 이르고 있다. 자신이 과거에 한 독설들에 대한 사과다. 사실 김구라를 만든 것은 과거의 독설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약간 표현은 애매해졌지만, 김구라를 대중적으로 인식하게 만든 것은 가차없는 연예인에 대한 독설이었다. 그가 현재의 큰 인지도를 얻게 된 것은 이를 기반으로 한 그의 입담 능력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현재의 방송 포맷은 김구라가 출연하고 있는 프로에 과거에 김구라가 독설을 퍼부었던 스타나 연예인들을 게스트로 초대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 과거 독설을 퍼부었던 그 상대자에게 김구라가 난처해하면서 사과를 하는 모습이 방송되고 그것이 인터넷을 장식한다.

생각해보면 왜 사과할 일을 했을까 싶다. 김구라를 좋게 보았던 이들 중에는 그의 독설을 정말 진정성 있게 받아들인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결국 그러한 사과는 이들에 대한 배반이 아닐까. ´먹고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많이 들어 본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른바 유명해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정신이 작용했을 것이다.

김구라는 잃을 것이 없지만, 다른 스타들은 잃을 것이 많으니 처음부터 판은 김구라에게 유리했다. 얼마나 신랄하게 다른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독설을 퍼붓는가가 중요해진다. 물론 그렇다고 먹고 살기 힘들다고 마음에도 없는 독설을 퍼부어가면서 먹고사는 사람은 드물다. 먹고살기 힘들다고 다 도둑질 하는 것은 아닌 것과 비슷하다.

김구라의 사과 퍼레이등도 무조건 한국사회에서는 우선 유명해지고 볼 일이라는 사실을 환기 시킨다. 만약 김구라가 유명하지 않았다면 사과할 일도 사과를 받아줄 일도 없을 것이며, 방송국에서 새삼 김구라의 과거 독설을 방송 내용으로 제작하지도 않고 기자도 그것을 받아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셀레브리트가 만연하는 한국사회와 같은 곳에서는 단지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지만 김구라는 사과를 하지 말았어야 한다. 사과하는 순간, 소신과 진정성은 무너지기 때문이다. 어차피 김구라는 오랫동안 주류에 둥지를 틀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풍천노숙의 기간은 길었다. 하지만 김구라의 코드와 생명성은 따뜻한 난로앞의 재담이 아니다. 추운 곳에서 날리는 진정성이다. 만약 사과를 하는 것이 옳다면, 김구라는 진정성의 독설이 아니라 뜨기 위해 가식의 직설적 수사를 날린 인물에 불과해진다.

이후가 문제일 수 있다. 독설을 한 사람이 나중에 유명해져서 독설을 당한 사람에게 사과를 한다면 대중을 우롱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로써 스타 권력을 진지하게 가감 없이 비판하는 행태는 더 이상 생존성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물론 김구라의 독설이 그러한 경지를 보여주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독설이‘개그콘서트’의 왕비호처럼 희화화된 형태만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사과를 통해 확증시켰다. 김구라의 진지한 독설이 아니라 왕비호의 우스꽝스러운 우회성이 각광받는 놀이성의 시대이기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독설은 유명해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성을 담고, 애써 감추는 진실을 드러내며, 그것을 계속 간직할 때 존재적 사회적 의미가 있다.

어디 대중문화계만 그럴까. 진실을 말하던 수많은 독설가들은 정치에 들어간 이상 과거의 진정성 담긴 독설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렸다. 독설은 유명해지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들은 단지 유명하기 때문에 유명한 셀레브리티로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정치권력에도 진출했다. 그러나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면서 정치적인 역량을도 잘 보이지 못하고 오히려 국민에게 폐를 끼치는 셀레브리티가 많았다. 개원한 제18대 국회는 의원 가운데에 단지 유명세로 등원한 함량 미달 셀레브리티가 없었다는 평가를 들어야 할 것이다.

김헌식 기자 (codess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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