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0년대 중후반, 대한민국에는 ‘인도(India)’바람이 불었다. 그곳을 다녀왔거나 가고자 하는 이들이 다투어 내 놓은 책들이 바로 ‘인도 기행물’들이었다. 너무 많아서 그 예를 들기도 버거울 만큼이나 많았다. 속된 말로 ‘개나 소나’ 다 인도를 말했다.
왜 그때 우리는 하필 ‘인도’를 찾았을까
왜일까. 왜 그 당시 우리들은 ‘인도’를 갈구했을까. 세기말이어서? 아니면 먹고살만해지니까 갑자기 ‘깨달음’에 대한 욕구가 솟구쳐서? 정답은 ‘나도 모른다’이다. 그걸 알면 나는 벌써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을 것이다.
‘깨달음’, ‘도’, ‘명상’, ‘신비’ 따위의 낱말과 짝하여 인도(India)보다 더 맞춤한 말이 있을까?
그런데 이런 생각도 사실은 ‘파블로프의 개’와 다를 바 없다. 다분히 ‘조건반사’의 성격이 짙다. 아니라고 한다면 당신은 신문이나 방송을 전혀 보지 않는 ‘도인(道人)’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당시 우리 사회에 몰아쳤던 ‘인도 바람’은 기성의 종교로는 해결될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일상의 소소하거나 커다란 갈등의 결과물이었다. 교회당을 가도, 성당을 나가도, 사찰에 가보아도, 우리네가 진정으로 기댈 존재가 보이지 않았던 탓이다.
작가, 그리고 카피라이터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책을 보지 못했다. 굳이 변명하자면 ‘먹고사니즘’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사실 그보다는 내 자신을 둘러싼 일상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어서였다. 이 말은 다시 표현한다면, 그만큼 게을렀다는 뜻이다.
그러다 내 손에 들어온 한 권의 책. 그 책의 껍데기에는 <검정풍뎅이>라는 다소 낯선 제목이 붙어 있다. 무슨 내용일까. 어떤 삶의 빛깔과 내음을 가지고 있을까. 일단 읽어보는 수밖에.
작가의 이름도 특이하다. 이세벽. 실명인지 필명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작가의 이름에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책의 첫 페이지에는 작가가 “카피라이터로 일해왔다”고 적혀 있다. 사실 카피라이터들 중 상당수는 한때 혹은 평생 문학지망생이었거나 현재 진행형 작가다. 하지만 카피라이터들 중 작가의 꿈을 이룬 이는 드물다.
우선 그들에게 익숙한 문장은 짧은 단문이거나 하나의 형용사로 압축된 묘사체다. 그런 그들이 긴 호흡으로 숨을 골라야 하는 소설이나 온갖 사회 현상과 그 현상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길어봤자 몇 십 줄의 말들의 풍경으로 펼쳐주는 시를 쓴다는 것은 아마도, 우리말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수준의 고통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인 까닭이다.
아무튼 <검정풍뎅이>의 작가 이세벽은 카피라이터 출신이란다. 그것도 이미 몇 권의 시집과 단편집을 발표한 작가라 한다. 더구나 그가 썼다는 ‘죽음 대역배우 모리’라는 작품은 “문제작”이라는 호칭마저 얻었다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내가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책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이런 소설을 써도 되는 걸까
이 책을 낸 출판사의 공식 리뷰는 “이렇게 써도, 이런 걸 소재로 써도 무사할까 염려도 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저 출판사 차원에서 체면치레용으로 쓴 리뷰인 줄 알고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검정풍뎅이>를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가는 동안 저 진술과 동일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자신과 만나게 된다. 무엇이 그러한 질문을 낳았을까.
길을 걷다보면 이따금, 뜬금없이 “도(道)에 관심이 있으세요?”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단의 무리들을 만난다. 글쎄 먹고살기도 바쁜데, 도라니……. 손때 묻은 불경의 한 모퉁이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평상심(平常心)이 곧 도(道)”라고.
그들의 ‘도’를 선전하는 거리에는 “믿음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사람들도 있고, 불전함을 앞에 놓고 목탁을 두드리는 이들도 있다. 이들이 정말 자신들이 외치는 교리에 충실한 종교인들인지는 관심 사안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속한 종교(라고 그들이 주장하는)의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거리에까지 나와서 ‘전도’나 ‘포교’라는 이름의 행위를 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될 뿐이다.
일부 사이비성 종교의 해악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종교라는 것이 지니고 있는 근원적인 존재 의의를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검정풍뎅이>의 등장 인물들은 다소 충격적이다. 세속의 관점에서 볼 때 ‘타락’한 것이 틀림없는 목회자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 그리고 그 목회자의 삶이 보여주는 교단의 실제 모습은 아마도 신실한 신앙심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메피스토’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흔한 이름 한 번 등장하지 않고 그저 ‘그 남자’나 ‘그’로 지칭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나는 김성동의 장편소설 <만다라>에서 만났던 땡추중 ‘지산’의 형상을 떠올렸다.
세속에 찌든 사람들은 <검정풍뎅이>의 ‘그 남자’와 <만다라>의 ‘지산’에게 주저 없이 손가락질을 할 테지만,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여다본다면 문득 우리 자신의 내면에 잠복해 있는 ‘진리를 찾는 나’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남자’가 찾아 나선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 책 <검정풍뎅이>의 주인공 ‘그 남자’는 항상 자신이 속해 있다고 세간에서 규정한 그 종교의 교리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 남자’는 세속이 외치는 ‘종교적 진리’에는 관심조차 없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진리 혹은 진실’을 찾는다.
그 과정에서 ‘그 남자’는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퇴폐와 우울과 눈물과 마주친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영혼 안에 육화(肉化)시킨다.
작가는 말한다. “나는 이 꽃에서 저 꽃으로 꿀을 찾아다니는 꿀벌이 아니다. 오히려 한 송이 장미꽃 품속에 틀어박혀 있는 검정풍뎅이다. 그 속에서 살다가 기어이 장미꽃의 꽃잎이 아물어버리면, 이 마지막 포옹 속에서 질식하여 제가 선택한 꽃에 안기어 절명하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작가의 저러한 진술은 오늘의 우리 종교가 안고 있는 무자비한 현실 즉, 기복신앙에 안주하고, 주기적으로 신도들의 주머니를 털며, 보다 큰 성전이나 사찰이 신앙의 척도라 여기고, 목회자와 신을 혼동하게 만드는 이 잔인한 현실을 아프도록 떠올리게 한다.
진정한 종교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가장 낮고 어두우며 축축한 곳으로 내려가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라는 명제를 모르는 교인이나 목회자는 없다. 하지만 세 살짜리 어린아이도 아는 이 진리를 나이깨나 먹었다는 우리들은 정작 안 지키고 있다. 못 지키는 게 아니고 안 지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 각자의 종교가 무엇이든, 기성의 종교는 너무 겉늙었거나 형식미에 빠져 있다는 심증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이 책 <검정풍뎅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멍들고 파편화된 삶 다시 말해 ‘지지리도 궁상을 떠는’ 삶의 한 골목에 진한 알콜내음을 풍기며 쓰러져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 된다.
그러나 이 책의 마지막 장(章)을 덮는 그 순간, 그들의 그러한 모습 대신 우리들의 망막을 적시는 것은 주인공 ‘그 남자’의 행방이다. 그는 자신을 비롯한 ‘지지리궁상족’들을 거두고 먹이며 그들의 삶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던지다가 마침내는 저 광활한 어딘가로 사라져버린다.
‘그 남자’는 그런 면에서 자신이 진리요 진실이라 믿고 있는 한 선지자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그의 최후는 십자가였지만, ‘그 남자’의 최후는 길을 떠나는 것이 다를 뿐이다.
길이 끝났다고 보일 때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길은 시작된다. 이것은 누구나 아는 진리다. 그나저나 ‘그 남자’가 찾아 나선 것은 과연 무엇일까.
©(주)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