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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문학 갖고 노벨상? 고은 버리자


입력 2008.10.11 07:37 수정 2013.05.22 16:30        김헌식 문화평론가 (codessss@hanmail.net)

<칼럼>민족주의 아닌 세계화 시대 보편성 확보한 문학 육성

노벨문학상 집착도 꼴불견…다른 문학위에 군림하려는 완장

노벨 문학상이 발표되었다. 2008년 노벨 문학상은 고은이 장 마리 르 클레지오에게 돌아갔다. 다섯명에게 분산되어 있던 시선들은 모두 르 클레지오에게 향했다. 시인 고은의 집 앞에서 기다리던 취재진도 철수했다. 곧 주민들의 아쉬움의 소리도 정적을 이기지 못했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다. 과연 긍정적 의미의 반복일까.

역시 노벨문학상은 많은 이들이 우려하던 대로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 스웨덴 한림원 사무총장인 호라세 엥달은 "미국문학은 편협하고 무식하다"고 했고, 여전히 문학은 유럽이 중심이라는 말도 했다. 이런 말을 생각하면 유럽작가의 수상은 논랄 일도 아닐 것이다. 이번 수상자를 포함해서 10년 동안 9명의 유럽문학가들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더구나 유럽중심주의만이 아니라 노벨문학상은 소설이 중심이기도 하다. 1996년 폴란드의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시인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하지만 그 이후에 시인 어느 누구도 노벨문학상을 받은 적이 없다. 이때문에 2008년에는 시인에게 노벨문학상이 돌아갈 가능성을 어느 때보다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인위적으로 비유럽 지역의 작가들에게 하나쯤 분배하듯이 주는 것도 좋은 평가를 듣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역안배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문학성 자체에 시상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훌륭한 작품이 아닌 데도 단지 시인이라는 이유로 수상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연히 유럽의 세계관에서 문학을 평가하는 태도는 분명의 개선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이쯤에서 고은이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원인을 다른 데로 돌리는 행위를 그만두는 것은 필요하다. 예컨대 고은의 작품이 제대로 번역되지 못해서 의미가 전달되지 못한다는 이유다. 여기에 비유럽지역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한림원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지적하는 이유는 단한가지 이유 때문이다.

과연 고은은 노벨문학상을 받을 작품을 가지고 있는가. 물론 그의 작품 세계는 하나의 범주화로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대체적인 작품의 경향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 차원에서 보자면 치명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어 왔다. 이러한 점은 민족주의, 혹은 국가 주의 차원에서 제대로 지적하지 않아온 감이 있다. 어차피 내용에 관계없이 노벨문학상이라는 영광의 후광을 취하는 것이 한국에게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르 클레지오는 설렁탕과 붕어빵도 즐기는 지한파로 알려져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어깨가 으쓱할지 모른다. 그런데 정말 대단한 것은 한국의 설렁탕이나 붕어빵이 아니라 르 클레지오 자신이다. 작은 나라 한국의 문화에 대해서도 관심과 배려를 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새로운 문화에 대해서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왔다. 그럼에 따라서 새로운 사유 세계를 가다듬고 그것을 작품으로 꾸준하게 발표해 왔다.

그는 자신을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했다. 아프리카 모리셔스섬 태생의 영국계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를 두었다. 만약 한국에서 자신을 한국인이 아니라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하면 난리가 날듯 싶다. 어떻게 해서든 그 태생을 숨기려 할 것이다. 이는 한국이 너무 민족주의적인 패러다임에만 갇혀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고은의 작품은 바로 이러한 과거 민족주의 틀 안에 대부분 잠겨 있다. 이렇다고 할 때 탈민족적인 보편성을 추구하는 르 클레지오와 비교될 수밖에 없다. 르 클레지오는 선불교를 젊었을 때 접하는가 하면 남미 인디언 문화에도 심취했다. 프랑스라는 조국을 가졌으면서 끊임없이 다른 나라의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사유와 작품의 변화를 추구해왔다.

과연 고은의 작품들이 세계적인 보편성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 지 의문이다. 독재에 대한 저항문학이라는 점과 초기 작품이 지닌 불교적 색채, 여기에 강하게 남아있는 민족적 특징은 그 영역이 좁아보이기만 한다. 고은은 결국 한국 안이라는 공간학적 제한성과 시간적 한정성 위에서 작품을 썼다.

최소한 동아시아의 횡단성이 아니라 한반도에 사유체계가 갇혀 있는 것이다. 단순히 우리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노벨문학상을 받는 것은 타당하지도 않다. 물론 노벨문학상의 시상 기준을 매우 타당하고 공정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계적인 보편성을 내세우기는 하지만 그것은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보편성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노벨 문학상을 받기로 작정했다면, 결국에는 그들의 평가 기준에 맞는 작가와 작품을 가지고 문을 두드려야 한다. 그 문을 두드리기에는 고은이라는 시인이 지닌 한계점은 분명해 보인다. 제3세계 문학인들이 가지고 있는 저항의 코드는 더 이상 중심적 보편성을 확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주 노동자나 다문화 가정을 소재로 한 한 작품들이 세계화 코드에 맞는지 모른다. 어쩌면 한국인 남성과 동남아시아 여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 사이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기대하는 것이 더 타당할지 모른다. 요컨대, 고은 보다는 여러 문화가 교차하는 가운데 사유의 폭을 확장시키고 그 교차의 흐름 속에서 보편적 주제를 탐구하는 작가들을 길러내고 그러한 작품을 발굴하는 것이 더 긴요한 일일 것이다.

정말 문학이 본령을 잡으려면 노벨문학상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다고 한국 문학의 존재유무가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동아시아 문학인들이 서로를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노벨문학상을 통해서만 존재감을 가지려는 태도는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으로 예술을 전투 수단화시키는 것이다. 해외 완장차고 다른 문학 위에 군림 하려는 착오적인 행태임에는 분명하다.

김헌식 기자 (codess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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