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패러디칼럼에 낚이고, 기자는 엉터리 IP조회 폭로했다 망신
‘예언자’, ‘선지자’, ‘아고라의 현인’, ‘인터넷 경제대통령’ 등등. 얼굴 없는 인터넷 경제 논객 ‘미네르바’에게 네티즌들이 붙인 별칭이다. 포털사이트 ‘다음’의 토론광장인 ‘아고라’의 경제토론방에 그가 올린 글들은 하나같이 폭발적인 조회수와 댓글, 그리고 각종 반론과 재반론이 따라붙었다.
한국 경제에 대한 그의 예측은 매우 시니컬하고 얼핏 보기에는 암울하기까지 하다. 단순 비교는 곤란하겠지만, 마치 미국 부시 행정부 기간 내내 ‘글로벌 경제위기’를 경고해 온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의 그것과 흡사하기도 하다.
굳이 이 두 사람 사이의 차이를 꼽으라면, 크루그먼 교수가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사람인데 비해 미네르바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인터넷 논객이라는 것이다.
미네르바의 예측은 대개 우울한 표정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인터넷 경제대통령’이라는 칭호가 따라다니는 것은 그의 예측이 단순하게 반(反)이명박 진영에 속한 이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예측은 읽는 사람의 기분에 상관없이 적중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언론에서 미네르바의 글에 주목하고 그의 실체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은 물어보나마나이다.
그런데 한국의 무수한 언론 매체 중, 유독 미네르바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곳이 하나 있다. 바로 <조선일보>다. <조선일보>는 지금까지 자체 기사로만도 2개 이상 다른 매체의 ‘미네르바 낚시질’에 걸렸다. 또 최근에는 이 신문의 기자 한 명이 미네르바의 IP를 추적한 결과라며 그의 정체를 ‘폭로’했다가 ‘인터넷의 I자도 모른다’는 망신을 당한 적도 있다.
곽인찬 파이낸셜뉴스 논설위원의 “내가 미네르바다”에 홀려
가장 최근의 사건부터 되돌아가보자. 지난 2일 오후 <조선일보>의 홈페이지인 ‘조선닷컴’은 이날 오후 4시경 <파이낸셜뉴스>의 곽인찬 논설위원이 ‘미네르바 자술서’라는 기명 칼럼을 올리자 이를 냉큼 받아 “미네르바는 파이낸셜뉴스 곽인찬 논설위원”이라는 기사를 머리기사로 내보냈다.
<조선일보>는 기사에서 “인터넷 논객으로 화제가 됐던 ‘미네르바’가 파이낸셜뉴스 곽인찬 논설위원으로 밝혀졌다고 2일 파이낸셜뉴스가 보도했다”면서 “곽 위원은 2일 파이낸셜뉴스의 ‘곽인찬 칼럼’을 통해 ‘미네르바 자술서’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자신이 미네르바라고 고백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 기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닷컴은 물론이고 각 포털사이트에서도 모조리 삭제됐다. <파이낸셜뉴스>가 곽 위원의 칼럼이 ‘패러디’임을 밝혔기 때문이다.
또 곽 위원 본인도 칼럼에서 자신이 미네르바라는 증거로 “나는 부엉이 한 마리를 애지중지 키운다”는 문장을 넣어 글 자체가 ‘패러디’임을 강하게 암시한 바 있다.
결국 <조선일보>의 이번 해프닝은 곽 위원의 칼럼을 꼼꼼하게 읽지 않고 서둘러 기사를 작성하면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다시 말해, <조선일보>가 미네르바의 정체에 대해 그만큼 몸이 달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네르바 경제관료 기용설”에 확인 없이 낚인 조선일보
미네르바와 관련한 <조선일보>의 오보 소동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조선일보>는 지난 11월 20일에도 <한국일보>의 서화숙 편집위원이 “정보당국이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를 찾은 것은 경제 관료로 기용하기 위해서”라는 내용을 담은 패러디칼럼을 썼을 때도 사실에 대한 확인 없이 “靑 ‘미네르바, 처벌 아닌 경제관료로 기용’ 주장 진위 여부 주목”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한 바 있다.
당시 서 위원은 칼럼에서 “익명의 (청와대) 소식통이 ‘미네르바를 기용해서 정확한 현실 진단을 한 뒤 향후 대책을 세울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천연덕스럽게 주장했다.
하지만 서 위원은 글 말미에 단 ‘주석’을 통해 “이명박 정부 들어 청와대의 주요 보직을 맡은 비서관들은 정부 정책에 대한 논평과 해설에서 ‘청와대 핵심 관계자’라는 익명을 남발한다”며 “현실 공간에서 익명을 즐기는 그들이 사이버 공간의 익명을 가장 심하게 단속하는 이유는 알려진 것이 없다”고 자신의 글이 ‘패러디’라는 암시를 강하게 남겼다.
서 위원은 또 글에서 소개한 발언자들을 “청와대 핵심관계자라고 주장하는 익명의 소식통”, “재야의 비공개 소식통”, “청와대 소식통”으로 표현해 사실상 확인된 것은 없음을 시사했다. 결국 서 위원의 ‘낚시질’에 다수의 언론이 ‘낚였고’, <조선일보> 역시 제대로 걸려든 셈이다.
IP 조회 기본도 모르는 기자까지 가세, 망신살
<조선일보>의 이러한 ‘미네르바 숨은 그림 찾기’에는 이 신문의 기자도 동참했다. 하지만 문제는 해당 기자가 인터넷의 기본도 모르는 상태에서 성급하게 미네르바의 정체를 ‘폭로’씩이나 했다는 데 있다.
지난 11월 20일 새벽 2시 14분 경, 조선닷컴 내의 한 기자 블러그에는 “사이버 논객 ‘미네르바’ 추적”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자신을 ‘조선일보 48기’라고 소개하고 있는 양 모 기자는 글에서 “다음 아고라에서 온라인 경제대통령이라고 불리는 미네르바가 실제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 장장 2시간의 온라인 추적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양 모 기자는 미네르바의 IP인 ‘211.49.***.104’를 근거로 IP 검색 사이트인 후이즈에서 해당 IP를 검색했다. 양 기자는 “그 결과, 그곳은 약간의 TV, 약간의 인터넷 어쩌고 하는 ‘SK브로드밴드주식회사 여의도 본점’이었다”며 “아마도 미네르바는 저 회사 제공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여기까지는 맞는 말이다. 이어 그는 미네르바가 지난 11월 14일 “여기는 아동병동”이라면서 아고라에 올린 글 “침묵이 금이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에 주목한다. 양 기자는 “아동병원에서 글을 올린다는 미네르바의 IP는 ‘211.178.***189’다. 이 IP는 SK브로드밴드 여의도점 제공 IP”라면서 “이건 뭔가. 과연 미네르바는 늘 진실만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심각히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양 기자의 ‘추적’은 여기서부터 본격화된다. 그는 구글에서의 검색 결과를 바탕으로 “‘211.178.***189’이라는 IP가 ‘MLBPARK’라는 사이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하 모씨”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양 기자는 자신의 추측을 근거로 미네르바를 “SK브로드밴드주식회사 여의도 본점 제공 IP를 쓰는 30대 남성으로, 메이저리그 특히 뉴욕양키스를 좋아하며 차는 렉서스GS350에 관심이 있다”고 주장했다. 양 기자는 한 발 더 나가 “잠 안자고 좀 더 인터넷을 뒤진 결과 결국 나는 미네르바의 실명까지 알게 됐다”며 “미네르바는 71년생 남자로 추정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양 기자의 이러한 ‘폭로’는 ‘특종’이 되기는커녕 네티즌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해 결국 양 기자의 블러그는 일종의 ‘성지순례’ 장소로 전락했다. “KT 사용자 IP를 검색하면 거의 절반이 분당구 정자동으로 나온다. 모든 사람이 고정아이피를 사용한다고 해도 동일한 IP를 쓰는 사람이 256명이 존재한다”는 게 주된 이유다.
네티즌들은 양 기자에게 “초딩(초등학생을 가리키는 인터넷 용어) 같은 짓 그만두라”, “하나로통신(현 SK브로드밴드)을 쓰면 다 미네르바냐”, “전체 공개도 되지 않는 IP를 가지고 소설을 써놨다”는 등의 조롱성 댓글을 남겼고, 양 기자는 결국 해당 글을 자신의 기자 블러그에서 삭제했다.
삼고초려 아닌 삼고초려가 되어버린 조선일보의 숨은 그림 찾기
미네르바의 정체에 대해 네티즌들과 언론이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의 예측이 불길한 내용을 담고 있건, 희망의 메시지를 함유하고 있건 간에 우리 경제 상황과 맞물린 미네르바의 예측은 ‘불행하게도’ 거의 다 맞아떨어진 까닭이다.
하지만 그의 정체를 정확히 안다고 해서 ‘특종’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네르바라는 인터넷 경제논객 자체보다는 그가 예측하고 전망하는 우리 경제의 앞날에 대한 대비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관중의 역사소설 <삼국지>에는 ‘삼고초려’라는 유명한 일화가 나온다. 이 일화의 주인공 유비는 당시 의지할 곳도 변변치 않았고, 세력조차 미미했다. 장수라고는 의형제들인 관우와 장비, 그리고 조운뿐이었다.
나라를 경영할 수 있는 책사가 필요했던 유비는 제갈량을 찾아 도움을 청하기로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한 마디로 ‘날은 저무는데 묵을 주막은 보이지 않는’ 형국이었다.
경제상황이 악화될수록 더 많은 ‘미네르바들’이 나올 수도 있다. 자칭 ‘1등신문’인 <조선일보>의 세 번에 걸친 눈물겨운 ‘미네르바 숨은 그림 찾기’가 어떤 의도인지는 <조선일보>의 데스크 외에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 의도가 어떻든 간에 이제는 미네르바가 자신의 실체를 스스로 공개하는 것도 그의 예측에 대한 신뢰도 쌓기 측면에서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지적도 있다.
삼고초려 아닌 삼고초려가 되어버린 <조선일보>의 ‘미네르바 정체 찾기’ 기사. 영화 ‘올드보이’에 나오는 명대사 하나를 빌려온다면, <조선일보>가 미네르바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이런 게 아닐까.
“누구냐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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