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류근일 칼럼´"과연 모든 것이 계산한대로 돼줄까?"
[조선일보는 9일 ´류근일칼럼´에 "두 토끼 몰아가는 ´노무현식 승부수´"란 제목의 류근일 전 주필 글을 실었습니다. 네티즌들의 활발한 토론을 위해 소개합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말이 있다. 불법 도·감청 정국이 꼭 그런 꼴로 가고 있다. 불법 도·감청 같은 천하의 나쁜 짓을 박정희·전두환 두 ‘군사독재 정권’만이 했다면 “그러면 그렇지” 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넘어갈 사람이 많을 것이다. ‘못된 정권이 못된 짓을 했다’는 것은 앞뒤가 너무나 잘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짓을 저 신성한 척했던 YS ‘문민정부’도 했고, 그보다 더 거룩한 척했던 DJ ‘국민의 정부’도 했다니, 이거야말로 기가 찰 일이 아닐 수 없다. ‘초원 복집 사건’의 피해자를 자처한 YS,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는 DJ―이 두 ‘민주정권’이 자행한 불법 도·감청은 스스로 ‘도덕적’임을 자처한 정권들이 한 짓이라, 그 도덕적 파탄성은 그만큼 더 클 수밖에 없다.
일부에서는 “YS와 DJ는 전혀 모르는 일이고, 정보기관이 몰래 한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고, 실제 그의 측근들은 펄쩍 뛰고 있다. 하기야 그렇지 않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YS·DJ가 알았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앙정보부의 ‘DJ 납치 사건’도, 박정희 대통령이 그것을 직접 지시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박정희 몸통설(說)은 아예 꺼내선 안 된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그런 식이라면 4·19 직전의 ‘3·15 부정선거’는 최인규가 총지휘한 것인데, 왜 이승만 대통령까지 물러나야 했다는 것인지도 알 수 없게 될 판이다.
도·감청의 내용과 관련해서도, 이제는 어느 한 당사자만 벌벌 떨 일이 아닌 것으로 돼가고 있다. YS 때의 도·감청이 DJ 쪽을 엿듣지 않았을 턱이 만무하고, 오늘날 열린우리당의 내로라하는 ‘진보’ 정치인들도 그때는 DJ쪽 돈을 받아가며 정치를 했기 때문에 벌벌 떨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DJ의 ‘큰손’ 권노갑씨는 언젠가 “하도 징징거려서…” 돈을 집어주었다는 투로 빈정거린 적도 있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 싸움은 어느 한쪽만의 완승, 완패로 가긴 어려울 듯싶다. 질(質)과 양(量)의 차이는 혹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결국은 오십보백보로 끝날 것이다. “상대방이 한 짓의 10분의 1만 넘어도 나도 함께 죽어주겠다”고 한 어느 권력자의 유권적인 원칙이 이미 나와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모두가 다 “화투장 까자”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핵전쟁’에서는 나만 속절없이 죽는 법은 없다는 계산이 선 모양이다.
대중관객의 눈에는 이런 총체적 공멸의 ‘빅 뱅(Big Bang)’만큼 장관(壯觀)인 것은 없다. 그러지 않아도 밉던 차에 “이 × 저 ×, 다 망해라” 하는 심정이 충분히 들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누가 말리려 해도 말릴 수 없는 ‘스페인 내란’ 식 ‘전면전’으로 가버린 것이 오늘의 우리 내부 사정이기도 하다. 종래의 여·야 싸움과는 다른, 대한민국을 건국 본래의 모양 그대로 놔두느냐, ‘변혁’하느냐의 더 큰 ‘빅 뱅’이 함께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갈 데까지 간 시국을 어떻게 요리하느냐는 이제 정계의 몫이 되었다. 제대로 된 나라 같으면 당연히 정계 아닌 검찰, 사법부가 헌법과 실정법에 따라 냉정하게 다루면 그뿐이다. 그러나 DJ가 일찍이 ‘낙선운동’이라는 불법사태를 두고서 법무장관한테 “왜 법으로 묶으려 하느냐?”고 일갈한 뒤로는 이 나라에는 헌법이고 무엇이고 개떡신세가 되었고, 매사에 아스팔트 ‘군중권력’의 정치적 노림수가 판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노무현 정권 이후 이 ‘제도 밖 권력’은 아예 ‘제도 안 권력’을 점거, 위압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열린 우리당이 “제3의 기구가 도청 테이프 공개 여부를 결정짓게 하자”고 한 것은 바로 그 ‘군중권력’을 또 불러들여 정계의 ‘빅 뱅’을 휘몰이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빅 뱅’이 와봤자 남들은 다 죽지만 자기들은 살아남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핵전쟁에서 과연 모든 것이 계산한 대로 돼줄까? ‘노무현식 승부수’는 ‘별놈의 보수’와 DJ, 두 토끼를 동시에 때리고 있다. 판갈이든 부메랑이든, 그는 ‘결전 2007’을 이미 시작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