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북한군 특수부대 투입됐다"
북한군 특수부대 출신 탈북자 ´자유북한군인연합´ 기자회견
"5.18 광주사태는 김정일 정권의 대남전략 증명시키주는 현장"
광주5.18민주화항쟁에 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투입됐다는 주장이 북한군 출신 탈북자들에 의해 제기돼 충격이 예상된다.
북한군 특수부대 출신자들로 구성된 자유북한군인연합은 20일 오전 서울 정동 세실세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5.18광주사태는 (북한의)자유민주주의체제에 대한 백색테러이자 김정일 정권의 대남전략을 증명시켜 주는 현장”이라고 말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 임천용 대표는 “광주사태의 발단과 시발점은 민주화봉기였다고 인정하지만 수많은 인명이 무참히 살상되고 끔찍하게 도륙당한 유혈적인 사건은 김정일 정권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테러행위”라고 밝혔다.
그는 그 증거로 ▲당시 봉기상황이 북한으로 실시간 생중계된 것 ▲봉기자들이 뒤에서 총에 맞아 죽은 것 ▲현재까지 미해명으로 남아있는 신원 미상자 ▲전기톱에 의해 두개골이 파괴된 시체 ▲봉기군이 봉기군을 사살한 것 ▲봉기군의 아지트와 봉기군이 탈취한 탱크·장갑차·윤전기재 안에서 대량 발견된 술병의 진의 ▲방위산업체·감옥·방송국 등 국가기관 점거와 군 능력을 초월해 전면전을 불사한 것 등을 언급했다.
그는 또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광주사건과 관련한 발언을 했다며 입수내용을 밝히기도 했다.
임 대표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지금까지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세 번 놓쳤는데 그중에서 광주가 제일 아까워. 우리 준비가 너무 부족했고 태만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김 주석이 1986년 1월 6일 평남도 덕천 교도지도국본부에서 열린 지도국산하 여단장 정치위원을 위한 군사정치일군 상학(수업)에서 발언한 내용이며 전 인민군에 배포된 정치상학 자료에서 출처를 얻었다고 임 대표는 밝혔다.
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광주에서 우리는 교훈을 찾아야 한다. 이길 수 있었지만 결과는 진압됐다. 땀이 적었고 훈련부족이다. 교도지도국은 남조선해방의 전초병이다. 언제든지 나가라면 당장 나갈 수 있게 만단의 동원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이는 김 위원장이 1982년 3월 북한특전여단들이 북부지구에서 벌린 쌍방 게릴라 훈련장에서 발언한 것이며 출처는 교도지도국 각 여단 참모부 및 대대참모부라고 밝혔다.
임 대표는 당시 현장에 투입됐다 북한으로 귀대한 참가자들의 증언을 확보했다며 그들의 발언을 다음과 같이 공개했다.
A씨:<내가 참가했던 조는 시위대 쪽에 편입되어 행동했다. 반반씩 나뉘어 절반은 시위대 쪽에서 움직였고 절반은 계엄군 쪽에서 활동했다…우리 대대에서 나갔던 사람들 중에 창석이(당시 중대장), 광만이(정치지도원)를 포함해 세 명만 돌아왔다…생사람 죽이는 일을 처음 해봤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내손으로 죽였다고 생각하니 끔찍할 정도였다…도망가는 여자들 등에다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정말 떨리는 일이었다…우리는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한다는 명령을 따라야 했다. 남조선 사방에서 들고 일어나서 지원세력이 몰려오면 될 수 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 자체는 조직적인 단합이 없고 동내패거리 싸움식이었다. 우리가 드러나게 되면 일이 커지게 돼 있고 봉기의 성격이 바뀌었을 것이다.>
B씨: <우리도 죽었지만 남조선 사람들이 정말 많이 죽었다. 그 사람들은 누구총알에 어떻게 죽었는지 모를 것이다. 양쪽을 교란하고 싸움을 붙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시위대들이 많이 죽이 않으면 일이 그렇게 커지기도 불가능했다. 괴뢰군이건 시위대건 양쪽에 피해가 생겨서 서로의 마찰이 커져야 의도대로 되는 일이었다.>
C씨: <우리도 알 수 없는 별도의 특수조가 움직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우리행동과 좀 다르게 현장의 분위기를 만드는 작업을 했을 것이다…우리가 갈 때는 공해상에 그쪽 애들 두 척의 뜨락선이 마중 나왔는데 사복을 입었고 밤이었기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임 대표는 “허울을 쓴 민주화 인사들이 북한정권과 입을 맞추며 광주의 희생을 자시들의 정치적 자신으로 역이용하고 특정집단의 상징적인 업보로 선동하고 있다”며 “파괴되는 국가사태 앞에서 더 이상 입을 다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기자회견을 열게 됐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이날 북한 사회안전부 대위 출신 김용화 씨는 “봉기 당시에 북한 인민군 중위로 있었고 황해북도 송림에 위치한 사회안전부 연봉부대에서 자동차를 관리하며 인민군의 수송을 담당했었다”며 “그 당시 ‘너구리 작전’이라고 해서 대동강 하류를 따라 남한군의 옷을 입고 자동보총을 들고 나가는 것을 수차례 목격했다. 밤 1, 2시가 되면 10명 정도를 태운 배가 조용히 빠져나갔고 그때는 사격중지 명령이 내려졌다”고 그 때 빠져나간 북한군들이 광주에 가기위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북한에서는 광주사건은 북한에서 계획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여기 와서 그것을 민주화항쟁이라고 하는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북한교도지도국 대위출신의 최준일씨는 “북한특수부대출신들은 광주사태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것을 거의 다 알고 있다”며 “그 당시 나는 완전 전투태세로 무장한 채 광주사건에 대한 24시간 긴급속보 전해 들으며 20여일간 출전명령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야 상관들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대대가 광주에 투입됐고 희생도 많았고 공로도 있었다고 들었다. 3분의 1이 희생되고 나머지 2는 귀대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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