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산성(강원도 기념물 17호)
신라 최후의 경순왕, 그의 아들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가슴에 안고 성을 쌓았다는 한계산성은 천연 자연보호구역인 내설악 안산 깊은 곳에 숨어있다.
산성답사는 동행자가 필요할 만큼 험준한 곳이며, 한계령이 시작되는 옥녀탕 휴게소에서 출발한다. 한계천을 건너 가파른 오르막을 넘으면 옥녀탕이다.
그 계곡을 타고 30분 오르면 고색창연한 성벽이 반긴다. 천년풍파를 견딘 석축이 장엄하다. 육중한 성문을 사이에 두고 50여m의 성벽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높이도 6m에 달한다. 성벽위 여장이 세찬 바람를 막아준다. 병사와 말이 동시 드나들기 충분한 성문 끝부분에는 성안을 볼 수 없도록 6단의 계단을 설치해 수비와 공격을 위한 시설물도 꾸몄다.
여기서 200m 위에 옛사람들의 건물터가 있다. 글씨가 새겨진 기와 편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 당시 긴박했던 흔적들이 묻어난다. 성안 뒤편은 내설악 양쪽에서 뻗어 내린 암벽이 병풍을 이루었다. 가히 철옹성이다.
정상을 오르는 길은 성문 앞에서 오른쪽 성벽을 따라 간다. 여기서부터는 전문 등산가가 아니면 위험하다. 암벽과 암벽사이에는 고목둥치를 설치해 겨우 지날 수 있다. 자일을 의지해야만 갈 수 있는 급경사가 쉬지 않고 이어진다. 전설의 대궐터 까지는 한 시간은 족히 걸린다.
조망권의 적지가 나타나는 곳에 천제단이 있다. 위치는 한계산성 내성의 동쪽 산등성이다.
원통에서 한계령을 넘어가는 길목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산성 안과 밖도 동시 관찰된다. 천혜의 암봉 아래 세무더기의 석단을 만든 천제단 중간 감실에는 글씨를 새겼다.
의선운장 김성진, 선천주 신광택, 그리고 김세진 이라는 세사람의 이름과 경오, 신미라는 간지가 판독됐다. 세사람은 어느 시기의 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의선운장은 신라 의병장의 이름이다. 나머지는 마의태자를 따라온 신라 장군이 아닐까 추정된다.
비문은 오랜 풍파로 판독이 어렵다. 이 제단은 산성을 쌓고 천지신명께 국가의 무운장구와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목적에서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제단터는 햇볕이 잘 드는 조건 때문에 주위에 산양 배설물이 널려있다.
천재단을 지나 100m 쯤 오르면 약 600m의 넓은 평지가 나온다. 주춧돌과 기와, 토기 파편 등이 잡목과 뒤 엉켜있지만 한눈에 여러 체가 있었던 건물지로 보인다. 이곳이 전설의 대궐터이다.
한계산성은 옥녀탕 골짜기에 쌓았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산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산성초입 옥녀탕은 월궁 선녀의 전설과 설악산을 관광하면서 한계령을 넘나드는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아름다움에 찬탄을 마지않는 절경이지만 이 계곡에 산성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 산성의 축조 시기는 기록이 없다. 전설은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고려에 귀부하기를 거부한체 인제군 남면 김부리를 근거지로 신라부흥운동을 할 때 축성하고 군사를 훈련시켰다고 한다.
한계산성은 해발 700~1200m의 산 계곡을 감싼 외성과 내성의 포곡식성이다. 전체 둘레는 1.8km, 남쪽에 성문을 축조하고 양쪽으로 성벽을 쌓아올렸다. 역사의 수많은 비밀창고가 묻혀 있는 고성, 그곳에는 오늘도 인적을 그리워하고 있다.
글·사진 최진연 기자(cnnpho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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