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에 충격적인 기사가 실렸다. 아이슬란드 전설에 따르면 레이프 에이릭손이라는 바이킹이 서기 1000년경 북아메리카에 도착해 정착했다고 한다. 이것은 유럽인 중에 바이킹이 콜롬버스보다 500여 년 먼저 아메리카에 도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슬란드 전설은 이후 고고학적 증거와 1965년 발견된 지도 한 장을 통해 사실상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뉴욕 타임즈는 아이슬란드 전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근거 중 하나였던 1965년 발견된 지도가 사실은 조작되었다고 보도한 것이다.
문제는 1965년 발견된 이른바 ‘빈란드 지도’가 학계와 언론 등에 공개되던 당시부터 조작 가능성이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란드 지도’는 콜롬버스 이전인 중세 유럽에서 아메리카의 존재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지지를 받았다. 결국 이번 발표로 논란은 종지부를 찍었지만, 이 사건은 필요에 따라 사료의 조작까지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1920년 10월 청산리 인근에서 독립군과 일본 육군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 육군은 10월 2일 이른바 ‘훈춘사건’을 조작하고, 이후 중국 동북지역의 독립군과 한인 사회를 초토화하기 위해 대규모 부대를 편성하여 중국 동북지역을 공격했다. 독립군은 애초 일본군과 전투를 피하기 위해 근거지를 벗어나 각지로 이동하였으나, 독립군 중 일부가 청산리 인근에서 일본군과 조우하면서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아시아 최강의 일본 육군과 조우했기에 독립군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군은 일본 육군을 상대로 수천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며 청산리 대첩을 거둘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대첩의 결과를 단지 ‘운’으로 치부하지 않는다면 승리의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다. 바로 독립군이 일본 육군보다 전투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독립군이 일본 육군보다 우위를 점했다는 사실은 전투가 상대적이기 때문에 중요한 함의를 담고 있다. 즉, 오합지졸의 약체 군대와 싸워 이기는 전투는 애초에 큰 의미도 없을뿐더러, 적과의 전력을 비교할 때 큰 감흥을 주기 어렵다. 하지만 비교 대상이 세계 최강, 혹은 아시아 최강의 군대라면 의미 자체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독립군이 청산리 일대에서 조우한 일본 육군은 어떤 군대였을까? 청산리 일대에서 독립군과 조우한 일본 육군은 조선 주둔 일본군 예하의 19사단 37여단장(히가시 소장)이 지휘하는 흔히 ‘히가시 지대’라고 불리는 부대였다. 히가시 지대에는 보병 3개 대대를 중심으로 기병과 포병 부대가 포함됐다.
히가시 지대는 독립군의 이동 소식을 듣고 포위를 계획하여 예하 부대를 길목에 투입했다. 이때부터 독립군이 상대한 일본 육군의 실체가 드러난다. 우선 기병연대(연대장 가노 노부테루 대좌)는 주력을 승평령 방면으로 우회시켜 노령 방면으로 이동 중인 독립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했다. 기병연대의 임무 성공 여하에 따라 독립군의 퇴로가 끊어질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기병연대는 이런 중차대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승평령으로 가던 도중 길이 험하고, 습지가 많다는 이유로 히가시 지대 본대가 있는 어랑촌 일대로 돌아왔다. 덕분에 독립군의 퇴로가 열렸고, 심지어 이 부대는 숙영 도중 독립군에게 기습을 받아 후퇴하던 중 어랑촌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히가시 지대의 예비대 위치까지 노출시켰다.
기병연대의 활약 덕분에 애초 히가시 지대가 계획하고 있던 포위망은 무너졌고, 심지어 어랑촌이라는 교통의 요충지에 주둔 중이던 예비대까지 북로군정서와 전투를 벌이면서 다른 독립군은 전투를 피해 신속하게 청산리 일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 히가시 지대는 어랑촌 전투에서 산 위의 요충지를 점령하여 방어 중인 북로군정서를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러한 독립군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요인 중에 하나는 히가시 지대의 주력부대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가시 지대장은 예하 주력부대 중 이노(飯野) 대대에게 어랑촌의 예비대에 미리 합류하도록 지시했지만, 이노 대대가 오는 도중 길을 잃어버리면서 정오 무렵에야 어랑촌 일대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일본 육군의 지휘난맥은 독립군과 전투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히가시 지대는 수색 도중 독립군으로 추정되는 무리가 숙영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야습을 감행한다. 이어 독립군과 전투가 벌어지자 사방에 총탄을 난사하였다. 이 때문에 인근 고지에 병력을 재집결했다.
이러한 히가지 지대의 전투 과정은 당시 그들이 가르치던 전술 교범에도 나와 있는 내용을 무시한 것이었다. 우선 수색 과정에 숙영 중인 무리를 발견하면 최소한 포위망을 구축하거나, 여명을 기해 공격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히가시 지대는 독립군을 발견하자마자 야습이라는 미명하에 공격을 개시했고, 독립군이 삼림 속으로 흩어지자 사방에 총탄을 난사한 것이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가 노출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격 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오인사격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결국 당시 전투를 지휘한 히가시 지대장은 ‘무익한 손해’를 피하고자 독립군이 흩어진 곳과 전혀 무관한 인근 고지에 병력을 집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당시 간도 일대에 투입된 일본 육군의 상황은 아시아 최강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오합지졸이었다. 중국에는 군벌 정치와 내전으로 제대로 된 군대가 없고, 한국은 일제에 강점당해 군대가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비교할 대상이 일본뿐이라 최강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당시 독립군이 청산리 일대에서 상대한 히가시 지대를 일본 육군 전체의 수준과 동일시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디어, 심지어 일부 학술논문에서 그려내고 있는 당시 다양한 일본군의 모습은 마치 독립군을 ‘신화화’, ‘영웅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른바 ‘대첩’을 만들기 위해 일본군을 아시아 최강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