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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의 역사 속 장소 이야기⑳] 대한제국을 선포하던 날


입력 2023.02.21 14:01 수정 2023.02.21 15:44        데스크 (desk@dailian.co.kr)

1897년 10월 12일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그 직전까지 고종은 계속해서 황제의 칭호로 높여 부르는 것에 대해 사양하였다. 여러 차례 상소가 올라오고, 신하들이 계속해서 주청하였지만, 고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0월 3일 심순택은 신하를 이끌고 주청하기를 우리나라는 자주 自主한 이후로 모든 의식 등이 황제의 나라에 걸맞지 않은 것이 없기에 ‘황제 皇帝’ 두 글자로 더 높이는 것에 대해 겉으로는 올리지 않았지만, 실상은 올린 것과 같다고 하였다. 다만 만국에 공표하지 않았을 뿐이기에 황제의 칭호로 높여 부르는 것을 청하였다. 이에 결국 고종도 마지못해 승낙하였다. 고종은 길일을 골라 거행하도록 하였다.


1897년 고종의 황제 즉위식 행차 추정 경로 (출처 현재 지도는 Naver 지도, 당시 도로 등을 추정하기 위한 지도는 1910년 경성부지도)

10월 11일 오후 2시 반부터 군인들이 경운궁(현 덕수궁) 정문인 인화문부터 원구단까지 길가 좌우로 질서정연하게 섰다. 어가 행렬이 지나가는 길을 좌우에서 호위하기 위한 이들이었다. 여기에 수백 명의 순검까지 군인들 사이에서 서서 어가 행렬이 지나가는 데 지원하였다. 특히 잡인이 어가 행렬이 지날 때 끼어들지 않도록 좌우로 휘장을 쳐 통행을 제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표현대로 뒷길로 피하지 않고 어가의 행차를 근처에서 볼 수 있었다.


고종의 행차 모습 (1902년)(출처 '르 쁘디 주르날(Le Petit Journal)' 1904년 2월 21일 자, 소장 서울역사아카이브)

저녁 무렵에 드디어 어가 행렬이 시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인화문을 나왔다. 어가 행렬은 군인들이 늘어선 길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군인과 순검이 이전에 입던 군복 등을 고쳐 입고 길가에 늘어섰다. 이제는 대내외에 황제국을 선포할 것이기에 황색 의장을 추가한 것이다. 여기에 시위대까지 행렬을 호위하며 이동하자 말 그대로 위엄이 웅장하고, 총 끝에 꽂힌 창들이 석양에 빛나더라고 당시 '독립신문'에서는 전하였다.


동북아시아 일기도(1897. 10. 11 – 12) (출처 : Created by National Institute of Informatics "Digital Typhoon" based on "Weather Charts" from Japan Meteorological Agency)

원래 고종의 행차는 12일 새벽에 진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11일 오후에 고종은 행사에 참석하는 모든 이들을 이끌고 원구단으로 행차하였다. 덕분에 사람들은 어두운 밤에 어가 행렬을 지켜보지 않아도 되었다. 특히 그날 밤 9시쯤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해 다음 날 아침 7시 정도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만약 거리에서 행렬을 지켜보았다면 감기에 걸리기 딱 좋았다. 그나마 보름달이 기울기 시작한 때라서 월광을 기대할 수 있었지만 구름 때문에 정작 살펴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알렌이 촬영한 고종의 행차 모습 ('대한예전' - 소장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동은의학박물관)

의례를 중시하는 풍토 덕분에 대한예전에는 원구단까지 가는 행차에 대해서도 세부 내용까지 정해놓았다. 행차의 가장 앞에는 어가를 이끄는 도가導駕로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한성부 주사와 판윤 그리고 내부대신 등이 포함되었다. 이어 선상병과 가전시위 그리고 각종 깃발과 의장물 등을 들고 있는 의장이 뒤를 따랐다. 드디어 고종이 타고 있는 가마와 이를 시위하는 이들이 지나갔다. 신식 복장과 무기를 들고 있는 친위대와 군병이 이어 등장하였다. 이러한 행렬 모습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독립신문'에서는 당시 서울 풍경을 “장안의 사가와 각 전에서는 등불을 밝게 달아 길들이 낮과 같이 밝으며, 가을 달 또한 밝은 빛을 검정 구름 틈으로 내려비추었다. 집집마다 태극 국기를 높이 걸어 인민의 애국심을 표하며, 각 대대 병정들과 각처 순검들이 규칙 있고 예절 있게 파수하여 분란이 일어나거나 비상한 일이 없이 하며, 길에 다니는 사람들도 얼굴에 기꺼운 빛이 나타나더라.”이라고 묘사하였다.


고종 30년간(1871~1899)을 살펴보면 그해가 가장 맑은 날이 적은 해였다. 그만큼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린 날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특히 그해는 1890년대 평균보다 300mm 이상 비가 더 내렸고, 여름에 장기 호우가 집중되었기에 벼가 제대로 여물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실제 그 이듬해 봄 경기, 호서, 관동, 관북 등의 지역은 춘궁기를 넘기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흉작이 들었다. 불과 한 달 전 추석에도 비를 맞으며 보냈던 이들에게 과연 휘황찬란한 고종의 행차와 황제 즉위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궁금하다.


다만, 당시 조선의 둘러싼 국제 정세는 그리 녹록지 않았다. 그해 8월 러시아는 부산 절영도에 군함 보급용 석탄 저장소를 설치하겠다고 조차를 요구하였다. 일본을 포함한 다른 열강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수백, 수천의 군대가 호위하는 어가 행렬과 황제 즉위 선포는 그 자리에 있던 이들에게 ‘제일등국’으로 대접받을 수 있다는 자긍심을 심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국권을 지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는 불과 7년 후에 백만 여 명에 이르는 군대를 동원한 일본과 러시아 간의 전쟁을 보면서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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