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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슈가르, 위구르와 위구르인...


입력 2009.01.15 09:13 수정        

<들찔레의 편지 251>카슈가르의 밤도 바람은 몹시 불었다. 잠을 청하는 내내 TV에서는 올림픽 방송으로 소란하였고 밖은 바람소리로 가득한 어둠이 깔려있었다.

실크로드, 사막을 건너 파미르고원 가는 길 ( X )

카슈가르(喀什, Kashgar)는 신강위구르자치구의 극 서쪽인 구소련과의 국경선으로부터 약 164㎞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로서 카스라고도 한다. 예부터 실크로드 상에 존재하는 여러 도시들 중 동, 서 교역의 최대 중심지였으며 한나라 때는 소륵국(疏勒國)이라고 하였다. 이후 당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11세기부터 오스만 튀르크의 침략으로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다시 차가타이한국(汗國)과 천산북로로부터 온 티무르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16세기에 이르러 카슈가르한국이 성립되고 수도가 되었다. 청(淸)나라 때에는 반청(反淸) 독립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860년 러-청조약으로 시장이 개방되자 러시아인의 왕래가 많아지고, 그 밖에 인도인, 아프가니스탄인 등이 들어와 교역에 종사하였다. 현재는 인구 20만의 소도시로 전락했지만, 실크로드의 역사를 증언하는 도시이자 위구르인들의 고향이고 심장이다.

카슈가르의 옛 거주지 ´고대민거´

카슈가르는 이국적이다. 물론 우루무치에서 점점 위구르의 속 깊은 곳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 변화를 실감하지 못하지만 갑자기 카슈가르에 처음 발을 디뎠다면 생각보다 훨씬 이국적이었을 것이다. 이국적이라는 말이 단지 이질적인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황토색 먼지가 날리는 척박함 가운데서도 백양나무 숲 같은 나른한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면이 더 크며 이곳에 쉽게 융화할 수 있는 기분을 느낀다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깊은 오아시스의 도시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깊은 눈매에서 우러나오는 엷은 미소처럼 평안함을 느꼈던 것이다.

카슈가르의 이국적인 풍경

호텔에 여장을 풀러가고 나오는 시간에 보았던 카슈가르의 옛 흔적이자 거주지였던 고대민거(高台民居)는 이곳의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하나의 상징이라 여겨졌으며 인근 실크로드 상의 최대 시장이라 불리는 일요장터는 평일임에도 부산하여 그들의 얼굴과 삶을 마주할 기대에 조금은 들뜨게 되었다. 도시의 한가운데 자리한 인민광장과 한자로 쓰인 올림픽 광고물들의 존재만 뺀다면 누구라도 이곳은 완벽한 위구르인의 독립체임을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전형적인 카슈가르의 위구르인 모습

생각해보면 위구르인들은 이곳에 터를 잡은 이후 지금까지 대대로 외부의 침략을 받아왔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민족만 다를 뿐 늘 그들을 지배하는 다른 민족이 있어왔다. 어쩌면 이슬람에 의지한 그들의 삶의 원천도 따지고 보면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국내 소수민족의 하나로 전락한 그들의 자존심은 애초부터 없는 것이었을까? 그들의 힘든 역사에서 찾아내고 자랑하는 향비(香妃)의 이야기는 작은 자존심의 원형을 보여준다.

아바흐 호자 묘 입구의 사원 기둥

카슈가르에서 나의 첫걸음도 카슈가르 북동쪽, 아바흐 호자(和卓)가족의 능묘 혹은 존자(尊者)의 묘라고 불리는 곳에 같이 묻혀있는 향비의 묘를 향한다.그곳에 도착한 직후 만나게 된 입구 정문 왼편의 작은 모스크가 눈길을 끈다. 고저사원(高低寺院, Upper and Down Mosque)이라 불리는 이 사원이 돋보이는 이유는 아래쪽(Down)사원의 기둥이 섬세하게 조각된 나무로 되어있으며 마치 불교사원의 단청처럼 아름답고 고색창연한 채색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위쪽(Upper)사원을 기도처로 사용하다가 겨울에는 입구의 이 작은 아래쪽(Down)사원을 사용한다는 설명이 곁들어져 있는데 한참동안이나 나무기둥의 질감과 채색의 멋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건물을 떠받치는 기둥뿐만 아니라 처마 밑을 연결하는 작은 보 하나까지 이슬람식 문양들이 그려져 있는데 아무리 보아도 영락없는 우리네 단청과 다르지 않다.

아바흐 호자 묘 입구의 사원 기둥과 천정의 단청을 닮은 채색과 조형미

작은 마당과 문을 지나 주 건물인 아바흐 호자의 묘를 가는 길은 비질을 한 흔적이 깨끗하고 작은 연못과 화단을 앞에 두고 서 있는 묘의 외관은 아담한 여느 사원의 모습과 다름이 없다. 녹색과 청색 타일로 꾸민 장식은 소박하면서도 아름답다. 중국인들이 이슬람사원을 통칭해서 청진사(&20938眞寺)라고 부르는 이유는 맑은 영혼을 일깨우는 곳이라는 성소의 의미가 있다. 덧붙여 이슬람사원에는 어디건 청색타일이 장식을 주조를 이룬다는 미학적 관점에서 보면 청진사(靑眞寺)라 불러도 좋을 법 하다는 생각을 한다. 또한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녹색타일이 많이 사용되고 있음도 본다. 카슈가르라는 단어의 뜻이 ‘녹색타일의 왕궁’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가 어쩌면 이것과 연관되어져 있지는 않을까 상상을 해본다.

아바흐 호자 묘의 외관

16세기말부터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카슈가르에는 바이샨(Baishan)이라는 소국이 있었다. 아바흐 호자는 이슬람교의 저명한 지도자이자 이 소국의 권력자였으며 향비는 이 사람의 손녀였다고 한다. 이 여인은 소수민족의 복속을 위한 수단으로 정략적으로 청나라 건륭제의 비가 되었으나 끝까지 건륭제를 거부하다가 북경에서 죽었다. 생전 그녀의 소원에 따라 시신이 카슈가르로 운구 되었다고 하며 그녀의 묘가 바로 향비묘로 이슬람교를 믿는 위구르인에게는 성지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중국당국의 입장은 이 묘가 향비의 것이 아니라고 전한다. 어쩌면 이런 작은 위구르인들의 자존심마저도 허용치 않겠다는 완고함과 단호함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아바흐 호자 묘 내부, 뒤편의 붉은 비단을 두른 관이 향비의 묘이다

녹색의 타일로 벽을 장식한 주요 돔 건물 안에는 이 묘를 만든 호자의 묘가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으며, 오른쪽 구석으로 향비가 묘가 있는데 둘 다 붉은 비단에 휘감긴 채 안치되어 있다. 1640년에 완성된 이 묘는 1948년 지진으로 묘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묘실이 파괴되었지만 1974년에 다시 복구하였다. 지금도 아바흐 호자 가(家)의 5대에 걸친 72명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이슬람 사원에 장식된 타일에 새겨진 이슬람 문양들




















해가 질 무렵, 저녁식사를 위해 시내로 향하던 중 여기저기서 구호처럼 적혀있는 올림픽 광고판들을 본다. 붉은 깃발에 적힌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구호대신 소수민족의 사상을 통제하는 것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위로부터의 자본주의 학습과, 통제된 자유는 그들에게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을 한다.

위구르인들의 삶은 늘 힘들었던 역사와 같이 왔다

중국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신강위구르에 무자비한 탄압 정책을 취하다 1980년대 소수민족에 대한 융화 정책을 도입했지만 1990년대 중반 다시 강경 정책으로 돌아섰다. 1990년대 초반 구소련의 해체로 연방이었던 민족들이 러시아로부터 떨어져 독립한 시기와 맞물린다. 당시 이곳 카슈가르에서도 반 중국 독립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이다. 지금 이곳 위구르인들에게 올림픽은 그저 다른 나라 이야기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다만 지금의 젊은 위구르 세대는 티베트의 동 세대들과 마찬가지로 정체성의 혼란기를 이미지나 중국적 교육을 받고 거의 동화된 상태라고 한다. 그 결과는 먼 훗날 역사가 말해 줄 것이다.

위구르 민속공연 남성 집단군무, 비보이를 연상케 했다

저녁식사를 한 후 우연히 위구르족의 민속공연을 볼 기회가 생겼다. 앞으로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이곳을 많이 찾게 될 때 이 공연이 상품가치가 있겠는지 봐달라는 부탁으로 공짜구경을 하게 된 것이다. 제법 큰 공연장은 자신들의 판촉무대가 될 오늘의 공연에 몹시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하미과와 포도, 사과 등 과일접시가 물과 함께 개개인의 테이블에 제공된 후 위구르어를 쓰는 사회자가 서툰 발음의 영어를 같이 사용하여 공연 내용을 알려주고 한편씩의 노래와 가극이 진행되었다. 또한 무대 양쪽에 설치된 모니터에는 중국어로 공연 내용을 알려주고 있었다. 위구르인들의 역사를 담은 전설, 민속 음악에 맞춘 춤과 노래들은 제법 돋보였다. 하지만 그 방식이 우리의 60, 70년대 지방을 돌면서 하던 ‘쇼’와 같은 양식이어서 식상한 면도 없지 않았다.

위구르인들의 전설을 각색한 춤

하지만 위구르인들의 애환이 깃든 서정적인 노래나 사랑이야기들은 우리네 것들과 다름이 없어서 다시 한 번 세상 인류의 공통적 정서 또한 같은 심성에서 출발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남성들의 집단 군무가 마치 지금의 비보이들이 추는 춤과 비슷했으며 카자흐 족들의 남성군무를 닮아 있었다. 아마도 이런 춤 양식은 러시아나 중동을 거쳐 북유럽에서 지금도 추고 있는 남성 군무의 원형이 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한다. 실크로드는 문명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교류의 길도 열어 놓았던 것을 새삼 실감하게 하였으며 춤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실크로드를 따라 각 민족의 춤의 형태가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티가르사원의 입구

카슈가르의 밤도 바람은 몹시 불었다. 잠을 청하는 내내 TV에서는 올림픽 방송으로 소란하였고 밖은 바람소리로 가득한 어둠이 깔려있었다.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깨어난 이른 아침, 피곤이 누적되어 이 도시의 아침 냄새를 맡기 위한 산책을 할 수 없었다. 대신 오래된 호텔정원을 산책했다. ‘춤과 노래의 도시’라고 적힌 조각상에는 위구르인 남, 여가 즐거운 춤을 추고 있다. 그들의 몸사위가 진정 춤이 되는 날을 고대해 보면서 신강위구르자치구 최대의 이슬람사원인 아이티가르사원으로 향한다.

아이티가르사원은 1422년에 창건된 이후 여러 번의 보수공사를 거쳐 1872년에 대규모 확장 공사를 하였다. 규모는 남북 140m, 동서 120m, 면적 16,000㎡ 로 신강지역 최대사원이다. 물론 인도나 중동 지역 혹은 터키 등에 남아있는 이슬람사원에 비하면 그 규모가 큰 편은 아니다. 그러나 목조기둥을 이용해 세운 건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규모는 상당하다고 볼 수 있으며 과거에는 이슬람교 대학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슬람을 믿는 각 나라의 대표적인 사원들이 그 나라 이슬람인 들이 경배하는 성지이듯이 사원 또한 위구르인들에게 있어 정신적인 지주의 역할을 하는 곳임에는 틀림이 없다. 중국정부가 취하는 동화정책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발길은 늘 이곳으로 향하고 마음 또한 이곳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티가르사원의 초록나무 기둥들, 단순하지만 소박한 멋이 엿보였다

녹색 칠을 하여 단조로운 듯 하지만 흰 벽과 깔끔한 조화를 이루는 기둥들이 주는 미감이 단순하지 않다. 오직 치장을 한 것이라고는 처마 밑을 지나는 가늘고 긴 나무들에 칠해진 단청을 닮은 채색뿐이다. 아바흐 호자의 묘에서 본 것보다 단아한 멋을 내는 채색은 우리의 절집이나 궁궐에 사용되었던 단청과 더 닮아있다. 관리인의 말을 빌리면 후대에 이르러 불교와 민간신앙이 결합된 탓이라고 실토를 한다. 문명과 문화, 신앙도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조금씩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순응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증거를 본 것이다.

아이티가르사원의 천장장식, 단청을 닮았다

1274년 고려 충렬 왕비가 된 원나라 제국 공주의 시종관으로 고려에 와서 높은 벼슬에 오른 삼가(三哥)라는 사람이 생각났다. 그는 중앙아시아에서 온 투르크계 위구르 무슬림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이슬람 종교와 문화가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유입되는 시기인 13~14세기와 일치한다. 당시의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 등에서 회회인(回回人)으로 기술된 무슬림들은 투르크계 위구르인들이다. 이 위구르인은 나중에 왕으로부터 장순룡(張舜龍)이란 이름을 얻어 고려 여인과 결혼하고 우리나라에 정착하여 덕수장씨(德壽張氏)의 시조가 된다. 경주 괘릉의 서역인을 닮은 무인상과 천마도를 그린 자작나무의 껍질, 경주의 왕릉에서 발견된 푸르고 흰 유리병 같은 것들이 나를 이곳까지 인도하게 된 계기가 되었듯이 단청을 닮은 사원장식을 보면서 그가 생각난 것은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아이티가르사원을 빠져나와 광장에 선 아침, 지난밤의 불면으로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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