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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피트 상공서 북한산성 비경 최초공개
수천폭의 동양화 절경마다 역사의 숨결이


입력 2011.06.19 07:44 수정         최진연 기자 (cnnphoto@naver.com)

<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600년 고도 지켜온 천혜의 요새

국내 산성중 가장 험준 삼국시대부터 명맥…대기오염 옥에 티

북한산성 전경이 언론사상 최초로 5000피트 상공에서 카메라에 잡혔다. 지난 6월 7일 오전 경기도가 제공한 헬기로 <데일리안>이 단독 탑승해 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북한산성 전체를 렌즈에 담았다.

헬기에서 내려다본 북한산성 성벽은 신록이 짙게 깔린 기암괴석의 암봉과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만들었다. 둥그렇게 능선이 휘어지는 원효봉을 타고 성벽이 이어졌으며, 문루 없는 북문은 석축홍예만 남아 고색창연 했다. 영취봉과 시자봉 구간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북한산성에서 가장 험준한 곳으로, 암봉이 자연 성벽이 될 만큼 천혜의 요새다. 헬기의 고도가 높아지자 백운대와 만경대가 눈 아래 펼쳐진다. 북한산의 절경이 여기에서 멈췄다. 암벽사이로 펼쳐지는 경관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헬기에서 본 북한산성 전경

2천년전 백제의 깃발이 백운대에 세워진 후 고구려와 신라도 이곳에 대장기를 세웠다. 고려와 조선도 깃발을 꼽았다. 세월이 흘러 일제도 북한산성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한민족의 정기를 말살시키기 위해 백운대와 만경대, 노적봉에 쇠말뚝을 박았다. 그리고 6.25 한국전쟁 때도 태극기를 꼽았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였을 때 마다 북한산성은 역사의 현장이 됐고, 민족과 수난을 같이 겪었다.

헬기가 용암봉을 지나면서 보국문까지 성벽은 굴곡이 심하지 않고 능선을 따라 부드럽게 이어졌다. 북한산성 3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복원한 총지휘소인 동장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장대가 완공되었을 때 숙종이 이곳에 올라 시를 지었을 정도로 관심을 가졌던 곳이다.

동장대 성벽을 따라가다가 대동문을 만나고 계곡아래서 대성문도 만났다. 대성문은 북한산성 성문가운데서 가장 큰 문이다. 원래 소동문이었으나 성안에 있는 행궁과 산 아래 임금이 거처인 경복궁을 연결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보니, 유사시에 임금의 통로로 이용됐다. 국왕이 출입하는 성문이라 위용도 갖추고 이름도 대성문으로 고쳤다. 대성문은 1992년 복원됐고 현판의 글씨도 산성을 쌓은 숙종의 친필을 집자해서 걸었다.

백운대와 만경대 뒤쪽은 문수봉 능선

보현봉 상공에서 헬기는 잠시 멈췄다. 문수봉을 잇는 능선 한가운데 대남문이 카메라에 잡혔다. 대남문 북쪽으로 백운대와 인수봉 등 산성의 정상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북동쪽 능선 따라 성벽은 끝없이 연결됐다. 서쪽은 나한봉, 용출봉 등 5개의 암봉이 성 내부를 감싸고 있다. 북한산성의 극치를 이곳에서 만났다. 여장에는 삼군영 옛 군사들의 예지가 번뜩이는 것 같다. 성문안쪽 계곡에는 옛 군병들의 훈련장이 있던 터다.

대남문은 북한산성 남쪽문으로 비봉능선을 통해 탕춘대성과 서울도성으로 연결되는 전략상 중요한 성문이다. 대남문은 소실된 문루와 성벽, 여장을 1991년 복원했다.

서쪽으로 고도를 낮추자 산성의 정문인 대서문이 나온다. 구파발에서 올라가는 길이며, 모든 물자가 이곳을 통해 오갔다. 등산객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성문이다. 대서문 문루는 일제강점기에 파손된 채 방치되다가 1958년 당시 최헌길 경기도지사가 복원할 때 성문으로 연결된 오솔길을 확장했다. 복원 전에는 소달구지만 다니던 길이었다. 대서문 홍예 좌우에는 누혈(빗물을 빼내는 기구)이 설치돼 있으며 여장도 일반 성벽의 여장과는 달리 납작한 한 돌 덩어리를 10개나 세웠으며, 돌마다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을 뚫어 놓았다.

대서문 상공에서 북한산성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성내부의 각 시설과 사찰도 조망된다. 만경봉에서 대서문까지의 골짜기는 길고 급경사다. 홍수 때는 물살이 급하기로 소문난 곳이다. 관광객과 등산객을 상대로 음식점을 운영했던 산성마을도 2011년 1월에 완전 철거됐다. 각종 생활오수가 계곡으로 흘러들어 북한산을 오염시킨다는 민원 때문이다.

산성 도착 20분이 지나면서 맑은 하늘은 잠시뿐이고, 대기오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진 상태가 청명하지 않았다.

서쪽에서 본 영취봉과 노적봉

북한산성의 역사는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가 수도를 하남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쪽성으로 개로왕 5년(132) 토성으로 처음 쌓았다. 그 후 고구려가 남진하면서 한강 일대는 고구려의 영토가 됐다. 울분을 삭이지 못한 백제는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신라와 손잡았다. 다시 고구려가 퇴진하자 백제는 한강 하류, 신라는 죽령이북 강원도까지 점령했다. 그 후 백제와 신라의 동맹관계가 깨지면서 이 지역은 신라 땅이 됐다. 555년 10월 신라는 북한산 비봉에 삼국통일의 초석이 된 진흥왕순수비(국보3호)를 세웠다.

고려 때도 북한산은 중요했다. 거란이 쳐들어오자 태조 왕건의 재궁을 성안으로 옮겼고, 몽고군과 격전도 있었다. 고려 말 우왕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최영장군을 보내 노적봉 일대 성벽을 수축하였는데, 당시 한양산성은 현재 중흥사 일대와 향로봉아래 거대한 절터와 석축흔적이 남아있는 향림담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 때 전국토가 황폐화됐고, 병지호란 때는 청나라에 치욕을 당했다. 선대왕 인조의 굴욕을 잊을 수 없었던 숙종은 전국의 성곽들을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헬기에서 본 백운대 정상

이때 피난처로 천험의 요새인 북한산성을 택했다.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는 공사가 시작됐다. 동원된 장정만 4만여 명, 전국의 승려들도 동원됐다. 남한산성 축조에 승려가 동원된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이 완성되자 산성에 남은 350명의 승려들은 불경을 공부하면서 무술을 익히고 유사시에 성을 수비하는 승군이 됐다.

성벽은 백운대를 중심에 두고 28개의 암봉을 타고 넘으며 13km 남짓 연결된 대규모 포곡식 산성으로 14개의 성문과 성내부에 중성도 구축했다. 유사시 임금의 피난처인 130칸의 행궁, 140칸의 군사시설, 100여 곳의 우물과 저수시설도 만들었다. 특히 성내에는 당시 승군대장이 머물렀던 중흥사 등 11개 사찰과 2개의 암자가 있었다. 사찰은 전통의 가람 배치를 따르지 않고 성문주위에 지어 산성수비에 목적을 두었다.

현재의 북한산성은 경기도 고양시와 서울지역에 걸쳐 있다. 경기도청 문화체육관광국 김병만 문화재 팀장은 “북한산성 전체 둘레는 12.7km이며, 서울시에 속해 있는 성벽구간이 5.6km, 경기도 성벽구간은 2.8km 라고 밝혔다. 나머지 3분의 1은 자연암벽이 성벽이 됐다고“ 했다. 특히 김 팀장은 ”1998년 경기도와 시울시가 성벽관리와 복원을 분리하기로 서로 협약을 체결했다“고 했다. 또한 산성내부는 경기도가 관리하고 있으며 향후 행궁지와 성곽시설물 등은 발굴 정비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시청 문화재관리팀 이미경 팀장은 “북한산성은 용암문에서 대서문 인근까지 약 5.6km가 서울에 속해 있고, 이중 3.6km는 복원이 완료됐으며, 용암문에서 용암동을 잇는 230m 구간은 올해까지 복원을 마친다고 했다. 대남문에서 대서문까지 1.7km 성벽은 내년에 착공해 2020년까지 모든 성벽이 복원된다고 밝혔다.”특히 경기도 포천지역 석산의 화강석 재질이 북한산성 성돌과 비슷해 헬기로 산성까지 운반하는 어려움이 있다" 고도 했다. 북한산성 복원공사는 국고보조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다.

구파발 상공에서 본 북한산성 전경

북한산성은 국내 산성중에서 가장 험준한 곳이며, 성벽은 남북이 긴 형태로 쌓았다. 성벽은 낮은 곳부터 해발 700m 이상 봉우리까지 축조됐다. 지형에 따라 높이가 다르다. 고축, 반축, 반반축으로 쌓았으며, 평지에는 성벽을 높게 쌓았다. 산등성이로 올라갈 수록 성벽은 점점 낮아진다. 정상주위에는 여장만 쌓기도 했다. 성벽은 바깥만 돌로 쌓고 성문과 계곡부에는 적의 침입에 대비해 양쪽을 돌로 쌓아 올렸다.

삼국시대부터 면면이 이어져 온 북한산성은 숙종의 명으로 다시 쌓은지 올해 300년이 됐다. 산성에서 만나는 하잘것없이 보이는 성돌 하나에도 선조들의 호국 정신이 배어있다. 사적과 보물, 문화재도 즐비하다. 북한산성이 있었기에 산 뿌리 아래 600년 고도는 최첨단의 문화홍수를 쏟아내는 거대도시로 상전벽해가 됐다.[데일리안 = 최진연 기자]

최진연 기자 (cnnpho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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