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엘리자벳’ 김선영, 뮤지컬 배우로 사는 방식
절제 속에 폭발하는 ‘엘리자벳’ 담아
옥주현은 흐뭇한 후배, 김준수는?
“작품에 집중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에너지가 나오는 것 같아요.”
‘조로’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엘리자벳’으로, 보는 이들조차 숨 가쁜 일정이지만 특유의 카리스마와 에너지는 여전했다. 언제나 흔들림 없는 가창력과 안정적인 연기로 관객들의 든든한 신뢰를 받는 배우, 바로 김선영(38)이다.
비결을 묻자 “집중력”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충분한 수면과 운동 등 자기관리는 필수지만, 결국은 무대 위에서 얼마나 몰입하느냐에 따라 승부가 갈린다는 것이다. 김선영의 성공 비결 또한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되는 듯했다.
김선영은 이제 뮤지컬 ‘엘리자벳’에 온 신경이 집중하고 있다. 작품에 몰두하기 위해 지인들과의 만남조차 삼가고 있다는 김선영은 “파고들수록 어려운 작품”이라는 말로 뮤지컬 ‘엘리자벳’에 대한 부담감을 드러냈다.
“회가 거듭될수록 정신적으로 힘들었어요. 정서적인 소용돌이 안에 늘 머물게 되죠. 특히 죽음이라는 존재 자체가 죽음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엘리자벳의 패턴이 작품을 계속해서 생각하게 해요. 떨치기가 쉽지 않아요.”
다행스럽게도 그간 쌓아온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이 엘리자벳을 표현하는 데 자양분이 됐다. ‘지킬앤하이드’의 루시나 ‘맨오브라만차’의 루이자, ‘조로’의 이네즈 등 유독 거친 삶의 삶을 사는 여인의 모습으로 기억하는 관객들도 많지만, ‘미스사이공’ ‘에비타’를 비롯해 평범한 노처녀 이야기(텔미 온더 선데이)까지 그가 맡은 역은 다양했다.
“‘엘리자벳’은 극단적인 면부터 우아함까지 모든 것을 그려내고 있어요. 때문에 한 곳에만 편중되지 않은 다양한 역할을 한 것이 도움이 됐죠. 어떻게 보면 이 역할이 지금까지 해온 모든 걸 담아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옥주현 시점의 엘리자벳, 김선영 시점의 엘리자벳
‘엘리자벳’을 연기하는 데 가장 주안점을 둔 부분은 소통의 부재로 엄습해오는 갈등과 고독이다. 남편과 어머니로부터 자기 자신이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걸 느낀 후부터 엘리자벳은 자기 세계 속으로 들어가 고독과 만난다.
김선영은 “황후의 정서가 그리 낯선 것만은 아닌 것 같다”며 “현대는 자유롭게 살면서도 자유로워하지 못하는 세상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여전히 엘리자벳이란 캐릭터에 대한 공부는 현재진행형이다.
후배 옥주현이 번갈아가며 엘리자벳을 연기한다. 같은 배역이라도 배우의 관점에 따라 작품 해석도 달라지기 마련. 이에 대해 김선영은 “주현이가 연기를 많이 발산하고자 하는 편이라면, 나는 절제 속에서 폭발하는 것들에 주안점을 두는 편이다”고 설명했다.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옥주현이라면 선배로서 자극이 될 만도 했지만, 김선영에겐 그저 ‘흐뭇한 후배’일 뿐이다. 그들이 겪고 있을 고민과 정서를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며 함께 공감하고 존중하는 게 김선영의 후배 대하는 방식이다.
이는 김준수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흔히 말하는 대형 아이돌스타와의 작업은 처음이지만, 하나씩 배워가고 성장해가려는 진정성 있는 모습에 주목할 뿐 외적인 요소는 관심사가 아니다.
“무대 위에서 김준수를 아이돌로 느끼지는 않아요. 물론 그런 건 있죠. 커튼콜 때 장난 아니더라는. 그 외에는 크게 의식하거나 실감하지는 않아요.”
김선영은 “김준수는 워낙 열심히 하는 데다, 무대 위에서 집중력이 굉장히 좋다”며 “아이돌이란 생각을 굳이 하고 싶지는 않더라”고 극찬했다.
아이돌 스타의 뮤지컬 참여에 대해선 ‘불가피론’을 펼쳤다. 김선영은 “뮤지컬 제작비가 100억 원대에 이르는 시점”이라며 “그들이 최소한 홍보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다만 결과물에 대한 변명의 여지는 없는 만큼, 작품의 퀄리티에 따라 모든 평가도 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즐겁지 않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그만 둬야죠”
‘엘리자벳’에서 벗어나 과거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KBS 합창단원으로 활약하기도 한 김선영은 서울예술단을 통해 뮤지컬에 입문하자마자 단숨에 주역을 꿰찬 이후 승승장구했다.
“정말 운이 좋았어요. 캐릭터가 어울렸던 건 아니지만, 소울과 같은 흑인음악 스타일을 소화할 수 있는 배우는 많지 않았거든요. 가요도 하고 방송국에서 노래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게 큰 도움이 됐어요.”
그렇다고 슬럼프가 없었던 건 아니다. 공백기 없이 무대 위를 화려하게 수놓은 그지만, 무대 뒤에선 늘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중간점검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았을 때 누구보다 혹독한 그였다.
첫 번째 위기는 2003년 뮤지컬 ‘마리아 마리아’에 출연할 때 찾아왔다. 마침 뮤지컬배우로서 3~4년을 살면서 이 직업이 정말 자신에게 맞는 것인지 의문을 가질 무렵이었다.
“이걸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지레 겁을 먹었어요. 며칠을 헤맸는데 일주일쯤 지나니까 편해지는 거예요. 연기가 재밌는 거구나 하는 걸 느낀 시점이었죠.”
또 한 번의 슬럼프는 2008년 ‘씨왓아이워너씨’와 ‘나인’으로 무대에 설 무렵이었다. 김선영은 이 시기를 “터닝 포인트가 된 시점”이라고 말했다.
“내가 정말 뮤지컬을 좋아하는 걸까. 계속해야 해야 할까 의문이 들던 시기였어요. 이 일이 나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거나 즐겁게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두 번의 슬럼프를 겪으며 누구보다 즐겁게 무대에 서는 법을 배웠다는 김선영은 이제 배우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거느린 교수(한국예술원 뮤지컬과)이기도 하다. 그가 후배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점은 ‘스타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것. 따라하는 건 그저 모방이고 ‘짝퉁’일 뿐 감동을 줄 수 없다는 게 그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지론이다.
“노래로서 연기를 담아내는데 관객들이 공감하는 지점이 확실해야 해요. 관객들을 울리고 웃길 때 감동할 때는 그 사람이 온전히 저 안에 충분히 들어가 있을 때죠. 그렇지 않다면 관객들도 금방 느껴요.”
지난 10여 년간 굵직한 배역들을 독식하며 한국 뮤지컬계에 한 획을 그은 김선영.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3시간 후 열린 공연에서 자신의 지론을 온몸으로 표출하고 있었다.[데일리안 문화 = 이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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