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히딩크 vs. ‘확 돌아서’ 트루시에
정에 감동한 히딩크-귀네슈 한국사랑
'공과 사' 트루시에 퇴임 후 왕래 없어
[데일리안 스포츠 = 이충민 객원기자]‘정(情)’으로 대변되는 한국은 거스 히딩크와 세뇰 귀네슈라는 세계적인 명장을 얻었다. 한국인 특성과 유사하게 잔정이 많고,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게 두 감독 특징이다.
지난 2007년부터 2009년까지 3년간 FC서울을 이끌었던 귀네슈는 2009년 11월 26일 고별기자회견에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서울 사령탑 취임식 이틀 전 한국을 찾았을 때 몹시 추웠다. 매서운 한파 속에서 공항까지 마중 나와 따뜻하게 맞이해준 한국 팬들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다”며 “한국축구 발전을 위해 다시 돌아오겠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그리고 귀네슈는 그해 11월 FC서울 제자들의 뜨거운 배웅 속에 터키행 비행기에 올랐다.
거스 히딩크도 2002 한일월드컵 이탈리아와의 16강전 승리 직후 감독 대기실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대표팀 관계자는 언제나 강건했던 히딩크에게서 여린 마음을 발견한 순간, 조용히 대기실 방문을 닫고 연신 플래시를 터뜨리는 취재진을 물러나게 했다. 히딩크는 월드컵을 끝으로 한국대표팀과 계약이 만료되자 “ I'll be back”을 외쳤다.
두 감독은 약속을 지켰다. 지난주 나란히 한국을 찾은 것. 귀네슈는 2012여수세계박람회 터키관 홍보차, 히딩크는 시각장애인 전용 축구장 드림필드 준공식 참석차 입국했다.
히딩크는 해마다 약속을 이행한다. 매년 한국을 방문해 지도자 혹은 팀 내 선참이 된 2002 한국월드컵 전사들과 개별 동문회를 갖는 등 한국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엔 박지성과 드림필드 풋살장 개장행사를 함께 했으며 올해는 유상철이 히딩크 옆을 지켰다.
한편, 귀네슈도 여수세계박람회 스케줄이 바쁜 상황 속에서도 지난 28일 서울월드컵경기장을 방문, 2012 K리그 서울-인천전을 관전했다. 서울 서포터는 다시 돌아온 귀네슈를 위해 스페셜 플랜카드를 준비했고, 귀네슈는 또 눈시울을 붉혔다. 선수대기실도 직접 찾아 ‘수제자’ 최용수 서울감독과 깊은 정을 나눴고 김진규, 아디, 데얀 등과도 손을 맞잡았다.
귀네슈는 “터키인과 한국인은 정서가 비슷하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직설적이며 정이 넘친다”며 “서울은 제2의 고향, 나는 한국대표팀 영원한 서포터”라며 한국축구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한몫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귀네슈는 트라브존스포르와 계약이 1년 남아있으며 최근 귀네슈가 구단 측에 “계약연장 할 생각이 없다. 쉬고 싶다”고 못 박은 상태다.
반면, 정에 익숙한 한국과 달리, 일본은 철저히 공과 사를 구분한다.
여기에 일본 특유의 겉과 속이 다른 ‘혼네(本音·진심)와 다테마에(建前·가식) 정신까지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한 번 인연이 닿았던 세계적인 지도자조차 속마음을 아낌없이 드러내며 살갑게 지내기보단 ‘철저히 사무적인 관계’에 가깝다.
대표적인 예가 2000년대 초반 일본 각급 대표팀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프랑스 출신 명장 필립 트루시에(선전 루비 FC)와의 ‘흐릿해진 인연’이다.
트루시에는 지난 1998년 일본청소년과 올림픽, 국가대표 겸임이라는 사상 초유의 ‘전권 사령탑’으로 취임했다. 일본이 트루시에에게 일본축구를 통째로 부탁한 이유는 분명했다. 오랜 라이벌 대한민국 벽을 넘어 세계로 도약하는 ‘탈아시아 꿈’를 이끌 적임자로 봤기 때문이다.
트루시에는 선수로서는 재능이 부족해 일찍 선수생활을 접었고, 한국나이로 서른부터 코치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코트디부아르의 명문 아세크 아비장 감독시절 ‘108경기 연속 무패’라는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어 나이지리아, 부르키나파소, 남아공, 코트디부아르 국가대표팀을 차례로 역임했다.
일본 스카우트는 전 세계 네트워크를 동원해 트루시에가 ‘아프리카에 숨어버린 불란서 진주’라는 것을 알게 됐고 즉시 영입리스트에 올렸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트루시에 선택은 신의 한 수였다. 불란서 진주가 일본선수들에게 부족한 정신력과 골 결정력을 대폭 강화시켰다. 여기에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조직력까지 장착, 촌스럽던 일본축구에 갑자기 ‘세련미’가 넘치기 시작했다.
트루시에가 일본에 남긴 업적은 찬란함 그 자체다.
1999년 U-19 청소년 월드컵서 일본에 준우승을 선물했고, 그해 9월 한국 올림픽대표팀과의 홈&어웨이 친선 2연전서 한국을 4-1, 1-0으로 꺾었다. 이후 트루시에는 일본대표팀 사령탑으로 전면에 나서 일본의 2000 아시안컵 우승, 2001 컨페더레이션스컵 준우승, 2002 한일월드컵 16강을 이끌었다.
그러나 일본축구협회는 2002 한일월드컵을 끝으로 트루시에와 결별을 선언했다. ‘어느새 낡았다'고 판단한 트루시에 카드를 외면하고, 코임브라 지코를 일본 국가대표 사령탑에 앉혔다. 지난 1991년부터 94년까지 스미토모 금속공업과 가시마 앤틀러스 현역으로 뛰면서 일본인의 본성을 면밀히 알고 있다고 여긴 지코에게 일본축구를 맡겼다.
트루시에는 임기 중 뚜렷한 공적이 있음에도 일본축구계로부터 밀려났다. 오히려 트루시에의 전술철학이 일본축구에 주입되는 성장통 시기 경질위기를 겪기도 했다.
지난 2000년 4월 26일 잠실서 열린 한일 친선경기 결과(1-0승 하석주 골) 직후가 한 예다. 한일 국가대표 대항전에서 졸전 끝에 패하자, 일본기술고문위원회는 경질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미 후임은 ‘J리그와 인연이 있는’ 아르센 벵거 감독(아스날)이 유력했고, 물밑작업까지 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트루시에가 끝까지 자기 전술철학을 관철한 끝에 가까스로 당시 일본축구협회 오카노 순이치로 회장 시선을 사로잡았다. 모로코 국제대회서 세계적인 강호 프랑스와 접전을 펼쳐 가능성을 인정받은 게 트루시에 유임에 힘을 실어 준 계기다. 오카노 회장은 기술위원회의 부정적인 평가를 무시하고 “2002 월드컵 본선까지 트루시에에게 일본대표팀을 맡긴다”고 선언, 시한부 트루시에호는 극적으로 회생했다.
트루시에는 2002 월드컵에서 일본을 사상 처음 16강 토너먼트에 올려놓고 떠났다. 일본은 돌아선 트루시에의 바짓가랑이를 잡기는커녕 진한 포옹 한 번 없이 ‘쿨하게’ 보내줬다. 정이 넘치는 한국정서라면 서로 재계약 가능성에 대해 회동할 만도 한데 공과 사를 구분하는 차가운 일본과 트루시에는 그러한 낌새조차 없이 헤어졌다.
히딩크는 한국과 계약기간이 끝났음에도 매년 한국을 찾아 유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간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히딩크 드림필드 자선사업에 직접 팔을 걷어붙여 장애인들도 축구선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다준다.
반면, 트루시에와 일본의 인연은 2002 월드컵을 끝으로 더 이상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트루시에가 일본에서 자선사업을 한다는 정보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다.
또 일본축구협회는 J리그 나고야를 역임한 세계적인 명장 아르센 벵거가 아스날로 갔음에도 ‘인맥 도움’을 기대하지 않았다. 벵거 또한 닮은 꼴 일본인 정서와 마찬가지로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했다. 특히, 잠재력을 눈여겨보고 데려간 이나모토 준이치와 미야이치 료는 끝내 아스날 주축 일원이 되지 못했다. 벵거는 훈련을 지켜본 결과, 기존 아스날 주전과 비교해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해 두 선수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일본 축구팬들도 벵거의 선택에 대해 공개적으로 왈가왈부하지 하지 않았다. 벵거가 좋아하는 일본 된장 ‘낫또’를 보내 환심을 사려는 축구팬도 없었고, 직설적으로 벵거에게 서운하다는 감정을 표현하는 이들 역시 극히 드물었다. 마음속으로 삭히는 ‘속앓이’만 할 뿐이다.
이처럼 한국과 일본은 ‘가깝지만 먼 이웃’이라는 상반된 정서를 지녔다. 상반된 정서만큼이나 양국 축구발전에 큰 공을 세운 떠난 명장들의 행보도 크게 엇갈리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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