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하자본주의 찬양하는 어용 지식인은 누구?
<박경귀의 중국 톺아보기>중국 체제 유지하는 신좌파 지식인들의 고민과 담론
<중국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마크 레너드 지음, 장영희 옮김, 돌베개(2011)
중국의 경제적 부흥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으면서, 고도성장의 비결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더군다나 엄격한 사회주의 통제시스템과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가 병존하는 기이한 국가통치 방식이 그 바탕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러한 ‘중국 방식’의 통치체제에서 중국 공산당 최고지도부 등 정치엘리트의 역할이 가장 큰 역할을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국가발전 전략의 청사진과 논리를 제시하는 사상가와 지식인들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이들의 생각과 주장을 파악하는 것은 중국을 이해하고 앞날을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책은 바로 중국 공산당의 국가정책의 수립과 집행, 경제적 부상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식인, 국가 싱크탱크의 연구자들이 중국사회의 발전 방향에 대해 쏟아내는 고민과 논쟁이 담겨있다. 또 이들의 담론을 국가정책에 수렴해 나가는 중국 통치자들의 암중모색과 국가전략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저자 마크 레너드는 이 책에서 중국 지식인 사회에 현존하는 다양한 지성과 사상을 종합하여 균형적으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저자가 중국의 사상 지형에서 ‘자유주의파’와 ‘신좌파’의 견해를 부분적으로 대조해 보여주곤 있지만, 역시 신좌파의 주장에 무게를 두고 논의를 전개한다는 점이 한계이다.
특히 여기서 열거된 지식인들은 ‘자유주의파’나 ‘신좌파’ 모두 중국 공산당의 체제에 순응적인 ‘체제 내 지식인’이어서, 사상의 자유의 폭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 분류일 뿐 근본적으로 대립적 사상 지향을 가지는 본질적 의미에서의 사상적 분파의 성격을 갖고 있지 못하다.
실질적 자유주의파인 반체제 지식인들은 애초에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이 책이 중국 내 지식인의 다양한 관점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란 점을 솔직히 고백한다. “중국의 지식인 중 많은 사람이 투옥되었고, 위협과 망명으로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며, 남아있는 사상가들은 중국 공산당의 엄격한 검열과 통제에 순치된 ‘체제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중국 지식인들이 ‘사회적 양심’으로서의 역할을 잃어버렸다는 비판에 동의한다. 독자들이 이 책의 시사점을 해석할 때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한마디로 이 책은 좌파적 시각에서 쓴 책이다. 저자 자신이 “사상적 자주성을 추구하려는 중국의 노력이 새로운 모델의 세계화를 형성하는 데 어떤 작용을 할 것인지 보이는 것”이 이 책의 취지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중국 모델’의 합리성에 대한 다각적 조명을 통해 중국에 대한 경계심과 비판을 완화하려는 저자나 역자, 감수자의 의도가 감추어지지 않은 채 여기저기서 읽힌다.
따라서 우파적 시각을 가진 독자의 경우 저자가 중국 공산당의 국가경영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데 복무하고 있는 친공산당 지식인들의 논리와 관점을 홍보해 주는 이 책을 굳이 주목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저자나 역자, 출판사의 의도가 거북하더라도 인내하며 읽어야 할 이유가 있다. 중국 공산당의 통치 방식의 사상적 논리와 토대를 확인하고, 체제 옹호 지식인들이 이를 어떤 방식으로 강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지, 아울러 이들의 세계관과 지적 경향이 어떤 것인지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저자가 소수의 비판적 지식인의 목소리를 통해 간간이 들려주는 지적 논쟁점과 들쳐지는 중국 사회의 맹점을 통해 중국 통치체제의 공고함과 취약점을 동시에 살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거꾸로 읽으면 맥락적 의미가 더 잘 파악되는 책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유럽인답게 미국이 주도하는 보편적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시스템의 한계를 중국식 세계관이 대체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과 희망을 감추지 않는다. 부분적으로 비판적 시각도 나타내지만, 궁극적으로 중국 모델(베이징 컨센서스)의 적실성을 부각시키고 옹호하려는 의도를 갖고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독자가 이 점을 간과하면 어느덧 중국 친체제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논리에 동화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를 만큼 저자의 논의의 전개가 은근하다. 이 책은 중국 모델의 요소로 ‘황하 자본주의, 협의형 독재정치, 종합 국력’을 든다. 저자는 중국 위협론이나 붕괴론에 맞서 세계에 모범이 될 중국 모델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려 애쓰며, 중국 모델을 빚어내는 친체제 지식인들의 합창을 들려준다.
과연 중국 모델의 제 요소에서 보여지는 중국 체제내 지식인들의 문제의식과 처방은 국내적 실용성을 넘어 국제사회의 전범이 될 만큼 보편적 당위성을 갖고 있을까? 먼저 저자가 조어(造語)한 ‘황하 자본주의’의 실체부터 살펴보자.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 개방정책을 펼친 1980년대에 중국은 미국식 대중소비주의를 받아들이고, 세계화가 가져다주는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데 열중했다. ‘부자되는 것이 영예로운 일’이란 등소평의 언명은 국가와 인민이 모두 시장경제에 몰입하게 만들었고, 사회변화의 전 영역으로 확대되어 소위 ‘문화열(文化熱)’ 현상으로 불리기도 했다.
황하를 소재로 중국 전통에 전면적인 비판을 가했던 <하상>이라는 6부작 다큐멘터리가 중국중앙방송 채널에서 방송되면서 대학생들이 각 편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대본이 순식간에 5백만부가 팔릴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발전을 저해했던 전통 사회의 부정적 인습과 행태가 집중적으로 비판받았다. 개혁주의자였던 자오쯔양(趙紫陽)이 과정에서 재방송을 지시하여 ‘문화열’이 절정에 이르렀었다.
하지만 ‘문화열’에 젖어있던 대학생, 노동자, 시민 등이 문화대혁명 이래 지속되어온 마오쩌둥의 절대화 풍조에 대해 반발하여 봉기한 1989년 텐안먼(天安門) 시위가 인민군의 무자비한 살상으로 진압된 이후 개혁파 지식인은 양대파로 나뉘게 된다. 독재정치체제는 인정하되 자유시장의 확대를 요구한 신우파와 시장의 자유를 희생하더라도 평등과 정치적 민주주의를 강조한 신좌파가 그들이다.
하지만 저자의 이런 구분은 독자들에게 착오를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신우파, 신좌파 모두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옹호하고 인정하는 측면에서는 모두 좌파이기 때문이다. 단지 경제적 관점의 작은 차이를 두고 정치적, 경제적 관점을 통합한 차원의 대립적 견해를 가진 것으로 사상의 좌표를 분류했기 때문이다.
어떻든 중국이 시장경제체제의 도입 이후 경제적 불평등, 도농 간의 격차, 환경오염, 교육, 의료, 사회보장제도의 열악화 등에 대해 지식인들 간의 논쟁이 정치지도자들에게 영향을 준 것만은 틀림없다. 후진타오 주석이 ‘조화로운 사회’(화해사회·和諧社會)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건 시장경제와 홀대받던 사회주의적 가치 사이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써 신좌파 지식인들의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이런 정책 기조의 변화가 바탕이 된 중국 경제운용체계를 ‘황하 자본주의’라고 일컫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중국의 경제정책의 초점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면서도 ‘황하 자본주의’라고 명명할만한 구체적 개념과 정책적 특징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황하 자본주의’의 개념이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의 발전을 지지하는 서방세계에 도전장을 내민 것으로 높이 평가한다.
더구나 ‘제11차 5개년 계획’이 ‘황하 자본주의의 견본품’이라며, “황하 자본주의가 전 세계 개발도상국의 갈 길을 밝히는 등불”과 같다고 칭송하는 대목의 논리적 비약에 황당하기까지 하다. 현대 중국이 시장경제체제 도입 후 야기된 사회적 모순에 대한 구체적 개혁이 실체를 드러낸 것은 아직 없다.
스칸디나비아식의 획기적인 사회복지 모델을 제시한 것도, 빈부 격차 해소를 위한 특별 시책이 나온 것도 아니다. 막연히 성장보다 분배를 강조하는 정책지향은 여느 자본주의 시장경제 국가들의 노력들과 다름없음에도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극복한 특별한 이념적 처방이 담긴 것처럼 과대 포장한 ‘황하 자본주의’의 메아리가 허전하다.
저자가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칭송하고 싶어 두 번째로 제시하는 중국 모델의 요소는 ‘협의형 독재정치’이다. ‘협의형 독재정치’는 스탠포드 제임스 피쉬킨 교수가 주창한 ‘협의형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활용하여 정당 간의 경쟁과 선거제도 없이도 민주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즉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를 유지하면서 협의형 메커니즘을 보충하면 경제발전과 정치발전을 동시에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다.
저자도 현재의 중국 공산당의 통치체제가 독재정치체제인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협의형 독재정치’는 조어 자체가 모순형용이다. 친체제 지식인들이 서방세계에 대해 중국이 자유민주주의의 대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중국 공산당이 미시적 차원에서 민주적 방식을 시늉 낸 인민의견 수렴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양태를, 마치 의사결정 자체가 인민과의 협의에 의존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미화하여 이를 ‘협의형 독재정치’라고 개념화한 것이다.
하지만 공산당 일당 독재정치의 속성상 권력적 정책결정행위를 협의 방식으로 진행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협의형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있어도 ‘협의형 독재정치’가 존재할 수 없는 건 자명하지 않은가?그럼에도 저자는 중국이 점진적 민주주의의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며, 향촌의 당서기 선출 제도를 당내 민주주의의 한 예로 든다. 하지만 저자가 인정하듯 핑창현의 실험을 전국의 나머지 2,499개의 다른 현이 전혀 따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효성이 없는 선전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외부세계에 공산당 내의 민주적 숨통의 존재를 보여주어 공산당 일당 통치의 정당성을 포장하려는 게 아닌가싶다. 근본적으로 유일 정당인 공산당의 지배방식에서 민주주의의 도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국가체제의 전반에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급진적 방식은 차치하더라도 우선 당내 민주화에 대한 의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전국적 단위의 선거제도를 도입하지 않는 것이 이를 웅변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중국 통치지도자들의 뿌리 깊은 반감에서 비롯된다. 판웨이의 주장이 이를 대변한다.
그는 고르바초프가 주도한 정치적 자유화 이후 뒤따라온 구소련의 붕괴, 문화대혁명 시기의 소위 ‘인민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 기억, 타이완 독립을 추동할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중국 공산당이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기 어려운 이유라고 말한다. 중국이 반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3대 트라우마를 잘 보여주는 셈이다.
더 큰 속내는 자유민주주의의 도입은 타이완의 완전한 이탈, 신장 위구르와 티베트의 독립의 분위기를 조성시켜 중국 국가 자체를 와해시킬 수 있다는 점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중국의 많은 친체제 엘리트들은 이런 논리로 중국 공산당의 ‘자기 방어 본능’을 자극해서 일당 독재정치를 ‘중국식 사회주의’로 포장해주고, 서구식 민주주의의 관점을 뒤집기하려고 노력한다.
한마디로 중국의 통치자나 관변지식인 사이에 자유민주주의는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를 붕괴시킬 수 있는 ‘트로이 목마’인양 인식되고 있는 듯하다. 저자가 열거하듯 극히 일부 향촌에서의 선거제도, 정책결정과정에서의 인민의 의견 수렴, 전문가 인터뷰, 설문조사, 충칭시의 대중과의 협의제도 확대 등이 중국 공산당의 정치 개혁의 본보기라고 자위하는 지식인들의 마비된 비판의식이 두드러진다. 저자와 중국의 친체제 지식인들의 결정적 오판은 민주적 대의제도 없이도 민주적 가치가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중국 공산당이 ‘무오류’의 신적 존재가 아닌 한 불가능한 일인데도 말이다. ‘협의형 독재정치’에서의 협의는 인민의 의사가 권리로서 존중받는 적극적 관계가 아니라, 오로지 정책결정자의 선량하고 합리적 판단에 기댈 수밖에 없는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이 민주주의를 도입하지 않으면서 법치를 강조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싹을 원천적으로 막는 일이다.
특히 중국공산당이 반동사상으로 탄압하던 공자 등 유가사상의 복고를 추진하고, 한비자의 법치 사상을 강조하는 이유는 결국 권력에 순응하는 사회윤리를 강화하고, 공산당의 법령을 준수하여 일당체제를 유지하는데 활용하기 위한 측면이 강하다. 오히려 이를 통해 보다 정교해지는 독재체제가 자유민주주의와의 거리를 점점 더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중국이 일당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몰두하는 것은 전통 사상의 부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민들의 사고와 행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이버 공간의 장악과 통제의 수준은 더 놀랍다. 전 세계가 하나로 이어질 수 있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를 절대 용인하지 않고, 위해 웹사이트를 차단하고 이메일을 검열하는 등 철저하게 인터넷을 감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오렌지 혁명이든, 자스민 혁명이든 일어날 수가 없다.
저자의 말대로 10만 명에 육박하는 사이버 경찰 부대가 ‘소름이 끼칠 정도’의 통제를 수행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 이러한 인민과의 기본적인 소통도구마저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으면서, 여론조사나 인터넷 자문, 공청회 등 몇몇 미시적이고 초보적인 의견수렴 방식을 두고 ‘협의형 독재정치’로 미화하며 자유민주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으리라는 저자의 희망은 지나친 착각인 듯하다.
세 번째 중국 모델의 요소는 ‘종합 국력’의 추구이다. 중국사회과학원과 주요 외교정책 싱크탱크는 각국의 국력을 수치로 평가하기 위한 지표를 고안해 냈다. 국력 측정의 공식은 ‘P= K×H×S’이다. P는 파워, K는 협조발전계수로 제반 분야에서 국가 지도자들의 협조능력, H는 하드 파워적인 부분, 즉 인구, 국토면적, 과학기술능력, 경제 능력, 군사 능력 등을 말한다. S는 소프트 파워적인 부분, 즉 정신과 지력 형태를 띠는 요소로, 국가 전략목표, 국가 지도체제, 국민 의지 등을 말한다.
이들 3개의 계수 아래 64개의 지표로 다양한 요소를 측정한다. 2011년 중국사회과학원은 중국의 국력을 세계 6위로 평가한 바 있다.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중국, 일본, 캐나다. 한국, 인도 순이다. 경제력으로 G2로 평가받는 중국의 스스로 종합국력은 6위로 평가하고, 한국을 9위로 평가한 점이 이채롭다.
중국은 왜 종합 국력의 순위 측정에 집착하는 것일까? 국력은 경제력, 군사력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요소가 종합적으로 측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중국은 외부 세계의 G2 평가에 대해 부담스러워한다.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언급 자체를 회피하는 경향이 많다.
‘화평굴기’라는 모순적 언술이 ‘화평’보다, ‘굴기’의 용어가 부각되어 국제사회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고 보고, ‘굴기’대신 ‘발전’이라는 완곡어법으로 전환하고, ‘도광양회(韜光養晦,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라는 덩샤오핑의 노선으로 태도를 바꾸고 있다.
중국이 종합 국력을 고안해 국제사회의 과도한 평가를 경계하며 스스로 부족한 영역이 많은 국가로 엄격하게 자기평가하는 이유는 국내적으로 국가적 발전 아젠다의 지속적 발굴과 추동의지를 강화하고, 대외적으로 중국에 대한 견제를 완화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명분과 실익을 모두 얻을 수 있는 현명한 전략인 것 같다. 하지만 여기에도 서구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한 은밀한 전략이 숨어있다.
저자는 중국이 종합국력의 향상을 위해 소프트파워의 강화에 집중한다고 말한다. 즉 국제사회에서의 다자주의적 전략을 통해 중등 경제국과 개발도상국들을 친중국적 세력으로 흡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각국의 주권과 국가이익을 존중한다는 명분과 실질적 경제적 지원을 쏟는 중국의 양면적 외교전략이 실효를 거두고 있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중국이 포섭하는 국가들을 들여다보면, 서구 식민주의에 종속되었던 경험이 있는 아프리카, 동남 아시아, 중동 국가, 남미 국가와 북한, 수단, 짐바브웨, 미얀마 등 공통적으로 독재 불량국가들이란 점에서 1국 1표의 의사결정방식이 작동하는 유엔체제에서 반미주의적 전략동맹을 구축하려는 중국의 의도가 읽힌다.
예를 들어 저자의 고백대로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중국이 묶인 상하이협력기구 같은 경우 “인권보호와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명분으로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는 서구의 시도를 좌절시키는 역할을 수행할지도 모른다.” 결국 중국이 저개발국과 독재국가들을 다자주의라는 평화적 언어로 포장한 채 독재권력체제의 유지를 후원하고 경제지원을 강화하는 매력적 공세를 통해, 국제사회에서의 연대와 영향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고 봐야한다.
저자가 이런 불량 독재국가들이 중국 모델을 따르려 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서 중국 모델의 당위성을 설명하려는 것은 오히려 설득력을 더 약화시킨다. 이들 국가의 통치자들에게는 중국의 비민주적 통제 및 통치의 노하우를 전수받는 것이 자신의 독재체제 유지와 강화에 유효하겠지만, 국민의 자유와 권리의 신장 등 사회적 진보를 심각하게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도 중국이 궁극적으로 중국이 중심이 되는 패도적 질서가 중국의 목표임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이 전파하려는 국가 주권 존중의 패러다임은 보편적인 국제 질서를 무시한 채 개별 국가의 주권과 배타적 권리가 그 안에 살고 있는 국민의 인권보다 더 중시되어야 한다는 잘못된 가치관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이는 인류보편적 관점에서 사라져야 할 독재 불량국가들의 적극적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는 중국이 국제사회의 지도적 규범국가로 올라서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 약점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경제, 정치, 국제관계 분야에서 중국이 추구하는 전략적 특징을 ‘황하 자본주의’, ‘협의형 독재정치’, ‘종합 국력’이라는 개념으로 압축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세계관을 특징짓기 위해 ‘성벽으로 나뉘는 세계’(walled world)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미국식 신자유주의적 세계관을 나타내는 ‘평평한 세계(flat world)'와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필자는 이 두 개념을 쉽게 ’닫힌 세계‘와 ’열린 세계‘로 보고 싶다.
더구나 ’walled world‘를 ’성벽으로 나뉘는 세계‘로 번역하는 것은 아무런 개념적 연상을 불러오지 못하는 모호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중국이 만리장성을 축성하면서부터 지향해온 외부 세력에 대한 본능적 방어의식이, 현대에 이르러 전 세계적 차원에서 더욱 정교하게 확대 강화되고 있는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즉 통제지향의 전통적 중국 사상의 조류를 국제사회로 확대 적용하려는 노력이 은익된다. 나아가 중국이 서구사회의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제도의 침투를 방어하려는 노력을 전방위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방벽(防壁) 세계‘란 표현이 더 중국의 전략 지향의 맥락과 부합되는 용어가 아닐까 한다.저자는 ’방벽 세계‘는 민족 국가가 세계 시장에서 상호 무역을 진행하면서도, 자신의 경제, 정치, 외교 정책에 대해 스스로 지배권을 가져야 한다는 사고를 대변한다고 말한다.
이는 ’평평한 세계‘라는 자유주의적 다자주의를 추구하는 미국적 이상과 유럽적 이상 모두에 대한 이념적 도전이라고 규정한다. 나아가 중국 모델을 찬양하면서 서구의 자유주의적 가치를 전파하려는 의도와 방식의 조정을 요구한다. 하지만, 필자는 중국 모델 그 자체의 허구성에 주목한다. 중국 공산당이 스스로 보편적 가치의 세계화를 방어하는 ’방벽 세계‘를 구축하여 일당 체제를 유지하려 하고 있고, ’방벽 세계‘를 ’중국식 사회주의‘를 방어하는 논리로 치장하고 있는 게 아닌가싶다. 한마디로 ’만리장성 콤플렉스‘의 확대판이 아닌가.
더군다나 ’중국식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이러한 ’방벽 세계‘를 다자주의라는 명분하에 국제사회 곳곳에 심어, 이들과의 연대를 통해 서구세계와의 대결적 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친체제 지식인과 사상가들이 지속적으로 부응 논리를 개발해 내는 모습을 이 책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이 책을 가만히 뒤집어보면 중국 모델의 허구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현대 중국의 체제를 떠받드는 체제순응적 지식인들의 생각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이들의 사상과 가치관이 인류 문명의 보편적 가치관과 거리를 둔 채, 중국의 독자성, 특이성만을 강조한 나머지 중국 공산당의 통치 전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아쉽게 확인된다.
글/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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