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대선에 영향 미칠 의도라면 조급함으로 스스로 난폭해져갈뿐
대나무창을 꼬나들고 멀쩡하게 서있는 사람을 마구 찌르는 것 같은 살기가 뚝뚝 흐른다. 그림 그리는 '민중화가' 홍성담이 내놓은 최근 그림들은, 죽일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표적으로 삼은 먹이감의 숨통을 끊어놓고 그 살을 한점 한점 발라내 씹어먹겠다는 식의 원념과 저주가 가득하다.
그가 그린 몇작품 그 중에서도 산부인과에서 임산부가 아이를 낳는 그림, 여성의 성기에서 뱀이 빠져나오는 형태는 누가 보더라도 알아볼 수 있는 특정한 인물을 지목하며 조롱하고 있다. 대통령 후보가 된 박근혜, 그의 아버지이자 현대 한국의 지도자 박정희에게 최대의 모욕과 저주를 쏟아붓는 것이다.
사회적 관심을 가질만한 인물이나 대상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일이 재미를 위해서나 이념적인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도 예술의 한 갈래라고 우기는 것을 감안하다 하더라도 그림 선전은 교활하며 악의적이다. 표적으로 삼은 적을 공격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논란이 격화될수록 관심을 더 크게 키우는 일이 될 터이니 그 또한 원하는 바라고 자부할지도 모른다.
편드는 쪽에서는 옳고 그른 것을 떠나 '한건했다'며 희희낙락하고 '더 하라' '계속하라'며 박수를 치는 일을 반복하는 것도 여전하다.
예술을 선동의 무기로 삼으려는 시도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공산혁명 후의 러시아, 중국, 김일성 체제가 들어선 이후의 북한 등에서는 '인민을 위한 문화예술'이 정책적으로 1970, 80년대 볼리비아, 칠레 같은 남미 여러 나라들에서 등장한 '제3영화' 운동은 민중혁명의 수단으로 영화를 동원한 기록으로 남았다.
세상을 적화하며, 전략적인 전복을 노리는 무리들은 동원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동원하고자 한다. 시, 소설, 그림, 음악, 책, 잡지, 연극, 영화 같은 온갖 매체들을 통해 왜곡과 선동을 조장하려는 시도를 계속한다. 노리는 목표를 위해서라면 거짓과 과장을 끌어들이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극단적인 과장과 왜곡을 교묘하게 이용하므로서 기대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방식도 끌어들일 수 있다.
1980년 5월의 광주 사건을 소재로 한 <화려한 휴가>의 광주시민과 현장에 출동한 공수부대의 이미지 설정은 대표적인 사례다. 택시기사, 그의 동생, 애인 간호사 등 시민 쪽에 있는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순수하고 순박하며 남을 해치지 않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심지어 광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인데도 그 동네 말조차 쓰지 않는다. 단정하고 또박또박한 서울식 표준말을 사용한다.
그에 비해 현장에 출동한 군인들은 아무런 감정도 생각도 없는 살인기계처럼 등장한다. 논리적 판단도 못하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기도 전에 총을 쏘고 곤봉을 마구 휘두르는 무자비한 집단으로 묘사될 뿐이다. 도청 앞 시위대가 격렬하게 시위를 하던 중 애국가가 울려퍼지고 태극기를 내리는 순간을 맞게 되자 잠시 시위를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데 군인들은 그들을 향해 정조준하고 발포까지 하는 장면의 구성은 선악을 극단적으로 과장하는 장면으로 남는다.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들조차 그 시간에 애국가가 울리지 않았다는 증언을 남기고 있다. 그런데도 영화는 시위 도중 애국가가 울려퍼지고, 모두가 경건하게 의식을 갖추는데 그들을 향해 군인들은 정조준으로 총을 난사한다는 설정을 서슴치 않는다. 순박하고 선량한 시민을 향해 무자비한 군인들이 발포한다는 설정은 광주의 시위상황을 상징적으로 이미지화 한다.
그 대목에서 시위의 경과가 어떻게 되는지, 시위대가 왜 무기를 탈취한 뒤 무장하여 시민군을 구성하였는지 등의 앞뒤 맥락은 따질 겨를이 없다. '선량한 시민'과 '나쁜 군대' 만 선명하게 떠오를 뿐이다. 시민들은 무고한 희생자가 되고 군인들은 잔혹한 학살자로 굳어진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때의 참극을 수습하고 치유하기보다는 적개심을 더욱 조장한다. 기획단계에서부터 그럴 의도를 가졌다면 영화는 200% 목적에 맞게 역할을 한 경우다.
광주인화학교의 학생들을 성학대하는 내용을 다룬 <도가니>, 어느 대학교의 해직교수가 벌인 소송사건을 소재로 한 <부러진 화살>, 7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인물을 고문하는 과정을 재현한 <남영동 1985> 같은 영화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삼았다고 하면서도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사실과 다른 가감을 섞는다.
어느 영화도 당시의 상황을 사실 그대로 수록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극적으로 재구성한 정황적 재현으로 가는 것이다. 실제 인물들은 각각의 역할을 맡은 배우의 모습으로 바뀌고, 대사나 사건은 극적인 강조 또는 과장을 위해 연출된다. 그리하여 결론적인 이미지는 '착한 희생자'와 '무자비하고 탐욕스런 가해자 놈들'로 나뉜다.
<도가니>의 학교운영자, 그 동네의 경찰, 검사, 판사, 변호사는 권력과 돈에 휘둘리는 무자비한 집단으로 매도하고, <부러진 화살>의 판사, 검사 역시 부패하고 타락한 집단으로 떨어진다. <남영동 1985>의 조사관은 국가권력을 등에 업은 악마나 다름없다. 어느 경우나 조직화된 권력, 제도화된 폭력 그것에 희생당하는 선량한 개인의 구도로 만든다.
그림은 어느 경우라 하더라도 재현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사실적인 묘사를 하면 작가가 드러내고자하는 의미가 모호해지고 상징적인 묘사로 가면 팩트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예술적 표현을 목표로 삼는 경우라면 어느 쪽이라도 접근 가능하지만 선동을 위한 수단으로 삼을 때는 목표를 향해 직격탄을 날리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듯도 하다. 드러내고자 하는 주장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고, 논란의 대상이 된다면 그 또한 바라던 바가 되어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므로.
홍성담의 그림이나 그를 앞세워 저주의 굿판을 조장하려는 세력들의 태도는 그렇게도 비난하고 열을 내는 국가권력이나 특정 집단의 비인간적 행위보다 훨씬 더 심각한 폭력과 선동을 동원하고 찬양한다는 점에서 스스로 모순을 드러낸다. 자신들이 인정하지 않는 권위와 폭력을 비난하고 공격하기위해 그보다 더한 폭력이나 선동을 표현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은 로맨스,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이라는 식의 편가르기, 편리한대로 이러저리 갖다 붙이는 가치기준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남영동 1985>를 만든 정지영 감독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연말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를 바란다'고 공공연히 밝히기도 했다. 여러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그런 말을 거듭하고 있다. 화가 홍성담 역시 '제발 고발해라, 잡혀가고 싶다'는 말을 뱉었다. 시끄러워질수록 더 많은 관심을 끌 수 있고, 더 나아간다면 그들 사이에서는 용감한 투사로 대우받을 수 있다는 식의 계산이 들어있다.
하지만 '과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을 모르는 것인가? 의도가 분명하고 집념이 강할수록 절제하고 자제할 필요가 있다. 과격하고 난폭한 방식이, 같은 부류들끼리의 결속을 높이는 횃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상식과 품격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피로감과 거부감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섰던 김용민 후보가 던지 막말이 부메랑이 되어 스스로 역풍을 맞은 일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홍성담의 그림이 이번 대선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면 좀 더 여과되고 상징적인 표현을 담아야 했다. 조급함과 난폭함은 전략의 부재와 상황의 불리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분별력이 사라질 때 조급한 행동이 나오고, 할 말이 없을 때 완력에 기대기 쉽다. 풍자와 여유를 한참 벗어난채 거친 폭력과 무자비한 저주를 담은 그림이 떠다니고, 예술의 가면을 쓴 선동이 정치선전의 수단으로 동원되는 것은 그만큼 다급해졌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글/조희문 인하대교수ㆍ영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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