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소련 유학파 출신들 거사 직전 발각
5년동안 군사유학생 출신 80%가 총살당해
지난 3개월여 동안 한반도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한때 중국 내부에서 이례적으로 ‘북한 쿠데타 발생’ 소문이 확산된 일이 있다. 비록 헛소문이긴 했으나 북한이 지나치게 전쟁 위협을 가하는 배경에 뭔가 사정이 있을 것이란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북한이 과도하게 긴장을 고조시키는 것과 관련해 북한 김정은이 내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필요가 커졌을 것이란 관측과 함께 평소 경제적인 의존도가 높은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 이상설도 대두됐었다.
지금까지 대북 전문가들은 “북한 군을 총정치국이 장악하면서부터 장군부터 초급 장교까지 엄격한 감시와 통제를 받기 때문에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구조”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북한의 실상을 경험한 다양한 계층 출신의 탈북자들은 “북한에서 쿠데타가 일어난다면 민중 봉기 형식은 절대 어렵고 뜻을 모은 중간 간부들이 나서지 않는 한 체제를 바꾸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이런 말이 나오는 배경에는 북한에서 일명 ‘아카데미야 사건’이라고 불리는 소련 군사유학생 출신들의 군부와 정권 장악에 대한 모의 시도가 있었다.
지난 1993년 수면위로 드러난 이 사건은 이 사건을 아는 탈북자들 사이에서도 ‘실제 거사를 모의한 반정부 기도였다’거나 ‘가까운 유학파끼리 농담으로 주고받은 일이 확대됐다’는 등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아카데미야 사건’ 또는 ‘프룬제 군사대학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을 잘 파악하고 있는 한 대북소식통은 “이 사건은 당시 북한 내 최고 엘리트층이라 불리던 소련 군사유학생들이 부패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그들 방식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기로 합의한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말했다.
이 소식통에 따르면 소련 유학파들의 정권 장악 논의는 모의 단계에서 인민무력부 보위국에 발각돼 연루자들이 불시에 검거되고 대거 총살 당하면서 막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사건에 가담해 총살당한 군사유학생들 대부분은 중앙당, 인민무력부, 제2경제위원회, 제2자연과학원에서 근무하던 고위 간부의 자식들로 실제 쿠데타로 이어졌을 경우 성공했을 가능성도 부인하기 어렵다.
이 공로로 인민무력부 보위국은 보위사령부로 격상됐으며, 당시 보위국장이던 김원흥은 중장에서 상장을 뛰어넘어 대장으로 승급했다고 한다. 또 이때부터 보위사령부가 국가의 모든 부문에 대해 검열과 단속을 전담하는 기관이 됐다고 한다.
소식통은 “당시 군사유학생들이 부르짖던 자유민주주의는 남한에서 말하는 민주주의는 아니지만 독재세습정권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것이었다”며 “200여명에 달하는 유학생들을 총살시키고 대대적으로 그 가족까지 숙청시킨 이 사건의 배경에 경제적인 이유도 컸다”고 말했다.
북한은 1986년부터 1990년까지 모스크바에 있는 '프룬제, 쥐꼬브, 워러쉴로브 군사아카데미야'로 불리는 군사대학을 비롯해 군사작전 부문, 각 병종 군사기술대학에 약 250여명을 유학시켰다.
이들은 소련에서 만난 독일, 불가리아, 체코, 쿠바 등 여러 나라 출신 학생들을 통해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되는 과정과 그 원인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됐다는 것이다.
소식통은 “유학생들은 이미 사회주의에 대한 의문과 조선조 봉건시기 같은 정권에 불만이 싹텄는데 소련이 붕괴되면서 북한 당국이 이들을 북한의 각 군사대학으로 철수시키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북한 당국은 이들이 소련에서 유학할 당시 남한으로 귀순할까봐 장성급으로 우대하던 것을 북한 내부로 철수시킨 후 당회의를 열고 사상투쟁을 한다면서 무자비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소식통은 또 “군사유학생들은 일반 사회유학생보다 장학금이 더 많았고 지하철과 버스 등 교통비와 영화관도 무료였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을 덜기 위해 장사를 하면서 인민무력부의 감시를 강화시켰다”고 전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유학생들은 북한에서 고려인삼정액, 사슴표 운동신 등을 가져다 소련에서 팔았고, 방학기간엔 소련산 냉동기, TV, 사진기, 옷과 식료품을 사서 북한으로 가져가 친지 등에 팔았다”고 한다.
소식통은 “군사유학생 출신들이 각자 북한 내 다른 부대에서 복무하던 중에도 너무 공개적으로 자주 모여서 술도 마시고 비밀리에 모의를 하다보니 인민무력부 보위국에서 내탐을 했고, 김정일에게 보고했다”면서 “보고를 받은 김일성과 김정일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들이라며 무자비하게 소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말했다.
그 첫 번째는 1993년 2월 8일 유학파 출신 중 인민무력부 본부 성원원들에 대한 처결로 시작됐다. 회의실로 집합하라는 지시를 받은 대원들이 집결해 있자 김원흥이 나타나 ‘이제부터 인민무력부 안에 잠입해 있던 반당, 반혁명종파분자들을 숙청하겠다’고 발표했다.
“즉시 회의장 좌우 출입문으로 완전무장한 보위국 군관들과 하전사들이 쏟아져 들어와 회의 참가자들에게 총구를 들이댔고, 그날에만 약 70~80여명의 고위급 군관들이 체포됐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이후 1998년까지 무려 5년동안 군사유학생 출신의 80% 이상이 총살당하면서 북한 내 최초 군사쿠데타 모의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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