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 내세운 북의 생떼가 남의 원칙 만나자...
<칼럼>'존엄의 덫' '핵의 덫' '컴플렉스의 덫'
적반하장 협박하는 북 물건너간 개성공단 회담
개성공단을 정상화하기 위한 남북 실무회담이 결렬되었다. 7월 25일 남과 북은 개성공단 종합지원센터에서 제6차 실무회담은 열었으나, 공단가동 중단의 책임과 재발방지 문제를 놓고 팽팽한 대립을 지속했을 뿐이다. 개성공단 사태의 책임소재에 관한 이견이 여전한 상태에서 재발방지책에 대한 합의가 불가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 마디로, ‘존엄’과 ‘원칙’ 간의 충돌이었다. 북한은 ‘최고 존엄’이 결정했던 일에 대해 유감을 표명할 수 없었고, 한국은 북한의 책임 인정과 재발방지 약속 없이는 개성공단을 재개해봤자 언제든 유사한 사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이를 철저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당연한 원칙’을 고수했다.
뒤끝도 좋지 않았다. 이날 회담이 결렬되기가 무섭게 북측 수석대표인 박철수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부총국장은 북측 관계자 20여명을 대동하고 우리 기자들이 대기하던 4층 프레스센터에 들어와 일방적으로 기자회견을 열었고, 뒤늦에 알고 이를 만류하려는 우리측 관계자들과 충돌했다. 고성과 막말이 오갔고 몸싸움도 일어났다. 이로서 여섯차례에 걸쳐 열렸던 실무회담은 일단 파국을 맞았고, 향후 대화재개 여부조차 불투명하게 되어버렸다.
양측간 이견의 핵심이 되었던 책임소재와 재발방지 문제는 남북 대표들이 논의했던 합의문 초안의 제1조에 극명하게 드러나있다. 제3차 회담에서 북측은 “그 어떤 경우에도 개성공업지구의 장상운영에 저해를 주는 정치적·군사적 행위를 일절 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의 초안을 내놓았다.
이는 누가 보아도 한국이 미국과 함께 연합훈련을 벌이고 한국언론들이 북한의 외화부족 사태를 들면서 ‘달러박스인 공단을 폐쇄하지 못할 것“이라는 보도로 북한의 ’체제존엄‘을 무시한 것을 가동중단을 몰고 온 원인으로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북한의 경솔한 통행차단과 노동자 철수에 대한 솔직한 반성을 원했던 우리 측이 이를 거부한 것은 당연했다.
북한의 완강한 자세는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제4차 회담에서도 북한은 “남측은 개성공업지구의 안정적 운영에 저해되는 모든 정치적 언동과 군사적 위협행위를 하지 않아야 하고, 이런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 한 북측은 공단의 정상적 운영을 담보한다”라는 내용의 초안을 내놓았다. 오히려 한 술 더 뜬 것이다.
마지막 제6차 회담에서도 북한은 “남측은 공업지구를 겨냥한 불순한 정치적 언동과 군사적 위협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담보하며, 북측은 이상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 한 출입차단, 종업원 철수와 같은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담보한다”라는 초안을 제시했다.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내용이었다. 멀쩡하게 가동되고 있던 공단을 일방적으로 폐쇄해버린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앞으로 한국이 착하게 굴면 우리도 개성공단을 열어주겠다”는 식의 오만방자한 주장을 계속한 것이다.
남북관계의 ‘두 허파’에 해당하는 개성공단과 금강산 사업이 정상화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필자에게 있어 실무회담이 이런 식으로 결렬된 것은 무척 실망스러운 일이지만, 북한이 여러 가지의 덫에 갇혀 있음을 감안하면 향후 회담이 재개되더라도 생산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필자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고 있다.
북한은 오랫동안 ‘존엄의 덫,’ ‘핵의 덫,’ 그리고 ‘컴플렉스의 덫’에 갇혀 있는 상태이며, 이 덫들은 앞으로도 북한의 개혁개방을 막고 남북대화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변수’으로 작용할 것이다. 여기에 비하면, 남북이 서로 다른 시각에서 진행하는 7.27 정전협정 기념행사는 일정기간 동안 악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구조적 변수라기보다는 시기적 변수일 것이다.
‘존엄의 덫’
북한이 개성공단 가동을 중단시킨 것은 당연히 ‘최고 존엄’이 내린 결정이다. 북한이 제3차 핵실험에 이어 키리졸브 한미연합훈련을 시비하면서 대남협박위 수위를 높이고 있던 지난 3월 30일 북한의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은 “괴뢰패당과 어용언론이 개성공업지구는 외화수입 원천이기 때문에 손을 대지 못한다느니 하면서 헛나발을 불어대고 있다”면서 “우리의 존엄을 훼손하면 공단을 폐쇄할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그리고는 4월 3일일 한국직원의 개성공단 출경을 차단했다. 4월 8일에는 김정은 제1국방위원장의 복심(腹心)이라 할 수 있는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겸 대남담당 비서가 직접 나서서, “남조선 정권과 군부가 우리의 존엄을 모독해 개성공업지구 사업을 잠정 중단하고 존폐 여부를 검토한다”고 밝혔고, 곧이어 북한은 개성공단 잠정중단을 선언하고 북한 근로자들을 철수했다.
물론, 개성공단 잠정폐쇄 이후의 대화제의 등 북한의 행동을 보면 평양당국도 자신들의 일방적 조치가 계산착오였음을 일정부분 인정하는 듯하고, 박근혜 정부의 ‘원칙대응’과 ‘준법대응’에 당황해 해했던 것 같다. 그들로서는 박근혜 정부도 과거의 정부처럼 공단 정상화에 연연해하면서 저자세로 나올 것을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령을 신격화하면서 체제를 유지해온 북한이 ‘최고존엄’이 내린 결정을 잘못된 것으로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멀리 볼 것도 없이, 금강산 사업은 ‘존엄의 덫’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사례다. 2008년 관광객으로 금강산에 갔던 박왕자 씨가 지정구역을 벗어났다는 이유로 북한경비병이 조준 사격한 총탄에 맞아 숨졌다. 1998년 금강산 관광을 시작하면서 남측 관광객의 신변안전에 관한 합의들이 이루어졌고, 2004년에는 정세현 당시 통일부 장관과 북한 김성령 내각 책임참사가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관광지구 출입 및 체류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했는데, 여기에 “법질서 위반시 조사하고 범칙금을 부과하거나 남측 지역으로 추방한다”는 내용은 있지만, 합의서 어디에도 총격을 가할 수 있다는 내용은 없다.
이 사건으로 관광이 중단되었지만, 이듬해인 2009년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이 방북하여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김 위원장이 재발방지를 약속함으로써 사태가 호전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문서로 재발방지를 약속해 달라는 한국의 요구를 북한이 끝내 거부한 것이다. “최고존엄이 약속했으므로 문서화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헌법보다 노동당 규약이 상위에 있고 노동당 규약보다 ‘수령님의 말씀’이 상위에 존재하는 북한에서만 통하는 독특한 존엄체제가 끝내 금강산 관광길을 막은데 이어 개성공단 정상화에도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핵의 덫’
북한은 1990년대 동안 “우리는 핵을 보유할 능력도 의사도 없다”라고 연막을 치면서 뒤로는 핵개발에 진력했다. 핵실험 준비가 거의 끝난 2005년에 핵보유를 처음으로 시사했고, 이어서 2006년에는 보란듯이 핵실험을 강행했다. 이후 북한의 핵행보는 노골적이었다. 2011년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을 때 북한은 “조국을 그 어떤 원수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핵보유국 무적의 군사강국으로 전변시킨 불세출의 명장”으로 치켜세우더니만, 2012년 4월 13일 헌법을 개정하면서 아예 스스로를 ‘핵보국’으로 명시했으며, 이후 김정은 정권은 공개적으로 ‘핵무력-경제건설 병진정책’을 표방하고 있다.
북한에게 있어 핵은 처음부터 체제와 정권을 수호할 최후의 보루였으며, 이에 북한 정권은 모든 것을 바치다시피 하여 이제는 “핵의, 핵에 의한, 핵을 위한 정권(government of the nuke by the nuke and for the nuke)”이 되고 말았다. 북한이 반세가 넘는 세월동안 핵개발에 진력해온 이유도 이것이고,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와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의지로 핵을 거머잡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며, 고립 속에서 핵보유의 명분을 찾기 위해 광분해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북한이 최근 들어 한미연합훈련을 그토록 강하게 시비하는 것도 ‘핵보유 명분 찾기’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이 미국과 연합훈련을 해온 것은 1976년부터다. 팀스리트, RSOI, 키리졸브 등으로 명칭과 내용은 바뀌었지만, 이런 훈련을 있게 한 근본원인은 북한의 무력도발과 핵위협 때문이었다.
물론, 북한도 매년 하계와 동계로 나누어 두 차례의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그런 북한이 금년에 들어와서 특별히 연합훈련을 시비하는 것은 “미국과 남조선 괴뢰패당의 반공화국 적대정책‘을 강조하기 위함이며, 이 시비에 지금까지 9년 동안 무탈하게 가동되어왔던 개성공단을 끌어들인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북한으로서는 유엔안보리가 이미 5개의 대북제제 결의를 통과시킨 상태에서 그리고 믿었던 중국마저 북한의 핵개발에 불쾌감을 보이는 상황에서 핵보유를 고수하기 하기 위해서는 한미연합훈련을 더욱 적극적으로 시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시 말해, 핵을 고수하기 위해서라도 안보환경 악화의 책임을 미국과 한국에게 돌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연합훈련을 계속 시비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다.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회담도 이 딜레마의 유탄을 맞고 있다.
요컨대, 북한정권이 핵을 스스로의 생존을 담보하는 최후 보루로 간주하고 집착하는 가운데, 핵은 북한 전체를 ‘핵수렁’ 속에 가두어버렸다. 핵은 북한을 고립시키고 외부와의 거래를 단절시켜 주민의 경제난을 가중시키고, 개혁개방과 외국인 투자를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이 되고 있으며, 생산적인 남북대화를 가로막는 악재가 되고 있다.
이런 논리 하에서 북한은 “남측이 불순한 정치적 언동과 군사적 위협을 하지 않아야 개성공단을 정상화할 수 있다”는 적반하장식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는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재발방지 대책’을 원하는 한국정부의 ‘원칙대응’ 기조와 정면으로 상충할 뿐 아니라, 수십 년동안 지속되어온 한미 연합훈련을 중단해야 한다는 어처구니가 없는 주장이기도 하다. 한국이 이런 주장들을 받아들일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며, 그래서, 북한이 ‘핵의 덫’에 빠져 있는 한 앞으로 있을 남북대화의 전망도 밝을 수가 없다.
숨고르기에 들어가야 할 시기
이번 개성공단 대화는 지난 세월동안 그토록 많은 도발을 자행하고 ‘서울 불바다’와 ‘핵찜질’을 위협해온 북한이 여전히 적반하장식 주장으로 대남대화에 임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이것이 남북대화를 포기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아무리 많은 악핵을 저질러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법이다.
우리 역시 ‘안보위협이기도 하지만 동족이기도 한’ 북한의 두 얼굴을 직시하면서 북한의 변화를 기다리며 다음 대화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북한 역시 일말의 진정성을 가지고 대화에 나왔을 것이다. 당장 호구지책을 잃어버린 5만3천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도 문제이겠지만, 이런 식으로 개성공단을 닫아버리면 앞으로 다른 외국인 투자도 불가능해질 것으로 우려할 것이다. 그들도 사람이기에 그런 생각들을 할 것이다.
물론, 당장은 남북 모두에서 6.25 전쟁 정전 60주년 기념행사들을 하느라고 분주했다. 특히 북한에게는 성대하게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일(전승절)’을 경축해야 할 이유들이 많다. 마지막 남은 ‘믿을 언덕’인 중국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도 ‘조중(朝中)동맹’의 상징물인 이 행사를 크게 치러야 하지만, 많은 외신 기자들을 평양에 초청하는 등 대외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는 모습에서 볼 수 있듯 이번 행사를 국제적 고립을 탈피하는 데에도 적극 활용해야 할 입장에 있다.
내부적으로도 그렇다. 젊은 지도자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내부적 단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당연히 금년에도 ‘반미·반미제’ 열풍이 북한 전역을 뒤덮을 것이다. 군대는 ‘수령을 옹위하는 총폭탄’을 자임할 것이고, 지방의 노동당 간부들이 평양으로 달려가 경쟁적으로 김일성-김정일 동상에 헌화하고 충성을 맹세할 것이며, 어린 학생들은 줄지어 황해도 신천박물관을 방문하여 ‘미제가 자행한 농민학살 증거물들이라는 것을 관람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숨고르기가 필요해 보인다. 이 기간 동안 우리 정부로서는 ‘원칙과 유연성’이라는 큰 틀 하에서 어떤 원칙을 지키고 어떤 부분에서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글/김태우 동국대 석좌교수·전 통일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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