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 신으면 된장녀? 레인부츠의 명과 암

김헌식 문화평론가 (codessss@hanmail.net)

입력 2013.07.28 10:26  수정 2013.07.28 10:30

<김헌식의 문화 꼬기>실용을 위한 창조인가, 허영을 위한 포장인가

장화(長靴)는 목이 길게 올라간 신발을 말한다. 목이 긴 이유는 발과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발에 물 등 이물질이 젖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이 신발을 신는데, 가죽이나 고무로 만들고 비가 올 때나 눈이 오면 신는다. 영어로 부츠(Boots)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비닐이나 고무장화는 물이 많은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주 신는다. 예컨대 논이나 바닷가 갯벌에서 작업을 할 경우 필수적으로 구비하여야 한다. 아니면 통상 비오는 날 많이 신는데 성인보다는 아이들이 많이 신었다.

비닐이나 고무장화는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이들이 착용하기 때문에 낮게 평가되었다. 더구나 비올 때 신는 비닐이나 고무장화는 유아성을 상징하시도 했다. 만약 육체 노동과 유아성을 싫어하는 이들이라면 이런 장화를 멀리하게 되었다. 성인 여성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려 한다면 비오는 여름에는 샌들이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몇 년 전 만 해도 장화보다는 샌들을 장마철이나 비오는 날 많이 착용했다. 하지만 샌들은 투과 되어 있기 때문에 패션 스타일의 한계가 있고 발에 온갖 이물질이 낄 수 있었다. 특히 도시공간에는 이런 이물질이 더욱 많으므로 비오는 거리를 함부로 활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샌들은 나막신의 진화였다.

낮추어보던 비닐 고무장화는 이제 옛날의 모습이 아니다. 매우 패션 스타일 아이템이 되었고, 비싼 고가에 팔리고 있다. 우울한 장마철에 화려한 색상의 레인부츠는 기분을 전환시켜주고는 한다. 몇천원 짜리 비닐 장화는 생각할 수도 없다. 보통 20만~30만원에 팔리고 비싼 브랜드는 100만 원 대에 팔리고 있다. 피부의 이질감을 없애기 위해 발목 양말을 구입해야 하고 이 또한 비싼 제품이 존재한다. 이른바 레인부츠의 탄생이자 등극이다.

이런 레인부츠의 소비행위를 흔히 타인을 의식해사 자신의 지위를 높여 보이려는 의도로 읽는다. 여름 철에는 더욱 습기와 온도가 기승을 부리는 때, 부츠의 불편함이 있지만 그것을 감수하고 얻을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위는 상류층의 반열이다. 현실은 그러한 위치가 아닌데 그러한 위치에 존재하는 것처럼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다.

그 매개체가 바로 레인부츠라는 말이다. 이는 과시 소비를 말할 때 자주 사용되는 설명 방식이다. 단순히 신분이나 계층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경제적 여유를 드러내면서 궁극적으로 부각하고 싶은 것은 감각적 우월성이다. 남보다는 다른 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적극 부각하는데 장화가 사용된다.

그런데 그러한 감각은 독자적으로 왔다고 볼 수는 없다. 레인부츠의 부활을 하게 된 데에는 비닐 고무장화에서 고급화 패션화한 측면도 있지만 그것을 사용한 패셔니스타 덕분이기 때문이다. 바로 할리우드 스타들이다. 2005년 록페스티벌에 참여한 케이트 모스의 패션에서 크게 부각되었다.

아기네스 딘의 레인부츠도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레인부츠 착용은 공식적인 공간이 아니라 파파라치의 사진을 통해서 알려졌다. 이른바 파파라치 패션이었다. 일상생활에서 진짜 선호하는 물건이나 브랜드가 관심을 모으는 이유는 유명인들의 진짜 선호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비가 내린 11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이화여대에서 한 학생이 장화를 신고 교정을 걷고 있다.ⓒ연합뉴스

또한 남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패션 아이템이라는 성취감과 어얼리 어답터의 쾌감을 전달해준다. 이렇게 파파라치의 사진에 등장한 레인 부츠는 한국에서 이효리롸 카라의 적극적은 노출로 알려졌고 이제는 일반인들에게 확산되었다. 특히 할리우드 패션 아이템으로 웰링턴 부츠는 애초의 맥락과는 다르게 적극 소비 되었다.

영화 '싱 잉 더 레인'(Sing in the rain)에 등장했던 이 웰링턴 부츠는 본래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 나폴레옹을 영국군 사령관 웰링턴의 이름에서 따왔다. 전투지역에서 진흙지역도 병사들이 마음대로 다닐 수 있도록 독일의 레시안 부츠를 개조해 만든 것이 바로 이 웰링턴 부츠였다. 이 부츠 때문에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맥락과 관계없이 착용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비가 오지 않는데도 오히려 비를 기다리며 레인부츠 신을 날을 기다린다.

요즘 레인부츠가 비싼 가격에 책정되다보니 그 신발을 착용하면 된장녀로 몰리는 경향이 있다. 더구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레인부츠를 착용하는 행위 자체를 백안시하기도 한다. 실용적인 측면이 아니라 브랜드 차원의 집착은 분명 문제일수 있지만 그 자체의 소비를 된장녀라는 개념으로 비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스타벅스를 이용하는 여성들을 된장녀로 몰아붙이던 때, 오히려 스타벅스는 더 유명해졌고, 국내 커피전문점들은 덩달아 커피 가격을 올려 받았다. 만약 레인부츠를 입는 여성을 된장녀로 만든다면, 다른 부츠들은 덩달아 고가의 전략을 추구하게 되고 결국 소비자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인위적으로 개입을 하지 않으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동적으로 그 상품은 흘러갈 수밖에 없다.

이제는 아무도 스타벅스를 우월한 공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허영의 상징으로 레인부츠가 규정되는 것은 그 실용성이 없기 때문이지만 사계절에 관계없이 신기에 맞춤식으로 진화하고 있는 레인부츠의 진화는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레인부츠를 진화시키는 과정에 수많은 이들이 창조적인 노력을 부과하고 있음이 중요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바란다면, 논과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더 편안하고 안전하게 작업할수 있는 비밀 고무장화의 발전도 필요하다. 여전히 노동하는 사람들의 행위가 산업적 창출의 근간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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