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 족쇄 풀어준 FIVB 결정…한국배구 참패
이적료 지불하면 터키행 가능..사실상 김연경 손 들어준 결정
‘규격 미달’ 국제 표준과의 괴리가 초래한 혼란
김연경(25)의 신분과 국제 이적을 둘러싼 논란, 이른바 ‘김연경 사태’가 국제배구연맹(FIVB)의 교통정리로 마무리 수순에 접어들고 있다.
FIVB는 지난 6일(한국시각) 김연경 사태와 관련해 대한배구협회와 흥국생명, 터키배구협회, 페네르바체 등 이해 당사자들에게 산하 법률위원회의 결정문을 보냈다. 그 골자는 아래와 같다.
▲2013-14시즌 김연경의 원 소속구단은 흥국생명 ▲터키 구단(페네르바체)이 김연경을 데려가기 위해서는 이적료를 지불해야 한다. 그 액수는 22만8750유로 이상(한화 약 3억2000만 원)을 넘지 못한다. 대신 흥국생명은 김연경의 터키행을 막거나 제한을 주는 행위를 해서는 안됨 ▲ 김연경이 2013-14시즌 이후 흥국생명과 계약을 맺지 않을 경우 다음 시즌은 원 소속구단이 없어진다.
표면적으로는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고 이해 당사자의 무게 중심을 고려한 대단히 중립적인 결정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김연경 측 손을 들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흥국생명에는 김연경 원 소속 구단으로서의 지위를 재확인해 줬지만 FIVB 결정문 내용상 현재 시점에서 흥국생명이 김연경의 거취와 관련해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사실상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김연경은 페네르바체 구단이 대한배구협회에 22만8750유로의 이적료를 지불하면 2013-14시즌을 페네르바체의 유니폼을 입고 정상적으로 활약할 수 있다. FIVB가 김연경의 이적료 상한선을 3억2000만 원 정도로 제한한 것은 흥국생명이 지나치게 높은 이적료를 제시하면서 김연경의 이적을 사실상 막는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한 안전장치로 풀이된다.
김연경 에이전트사 인스포코리아에 따르면, FIVB는 김연경 측에 흥국생명과 2013-14시즌에 대한 새로운 계약에 서명하면 안 된다는 내용까지 결정문에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FIVB는 결정문에 국제 이적의 경우, FIVB 규정이 각국 협회와 리그 연맹 규정에 우선한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즉, 국내 규정상 김연경이 FA 자격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작년 6월 30일부로 흥국생명과의 계약이 만료된 이상 김연경의 국제 이적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그동안 김연경 측이 FIVB의 규정을 거론하며 주장해온 내용을 그대로 인정한 셈이다.
이에 김연경 측은 국제 이적과 관련, 국내 배구계에 비슷한 선례가 없었던 김연경의 경우와는 달리 이번 FIVB 결정으로 인해 앞으로 국내 모든 선수들은 국내 프로배구 규정상 FA 자격 취득 여부와 관계없이 국내 구단과의 계약이 만료되면 자유롭게 해외구단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됐다고 이번 FIVB 결정의 의미를 설명했다.
결국, 이번 김연경 사태는 선수의 신분과 국제 이적과 관련된 국내 규정이 국제 표준과 괴리가 존재하면서 벌어진 일로 국내 규정이 국제 규정과 같은 수준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아도 될 혼란이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김연경은 흥국생명에 입단 이후 4시즌을 흥국생명 유니폼을 입고 국내 무대에서 활약했고, 일본에서 임대선수 신분으로 2시즌 뛰었다. 그리고 작년 7월 터키 페네르바체와 2년 계약을 맺고 1시즌 소화했다. 문제는 일본에서 활약한 2시즌이다. 이 기간 김연경은 임대선수 신분으로 소속은 여전히 흥국생명이었다.
김연경 측은 이 기간 일본에서 활약했지만 소속구단은 흥국생명이었으므로 흥국생명 선수로 6시즌 활약한 셈이니 국제 기준으로 볼 때 김연경은 FA 자격을 얻었다고 주장했지만, 국내 규정은 6시즌 동안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닌 실제로 국내 코트에서 ‘활약’을 해야 FA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축구의 예를 들어보자. 독일 분데스리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뛰던 ‘지-구 특공대’ 구자철과 지동원이 2012-2013 시즌 아우크스부르크가 1부 리그에 잔류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각자 소속팀 볼프스부르크와 선덜랜드(잉글랜드)로 복귀했다.
그렇다면 이들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임대선수로 뛰던 기간은 이들의 원소속팀인볼푸스부르크, 선덜랜드와의 계약기간에 포함될까. 이런 정도의 문제는 축구팬들에게는 난이도 ‘하’에 속하는 문제로 대다수의 축구팬들은 당연히 ‘포함된다’는 정답을 말할 것이다.
사실상 이것이 ‘국제 표준’이다. 축구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스포츠 분야, 그리고 어떤 형태의 재화의 거래에 있어서도 당연한 이치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국내 프로배구 규정은 이 같은 국제 표준과 맞지 않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 물론 김연경의 국제 이적과 관련해서는 김연경의 국내 FA 규정과는 관계없이 자유로운 이적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FIVB에 의해 확인됐지만, 국내 규정이 국제 규정과 같은 내용이었다면 김연경의 터키 이적을 두고 논란이 빚어질 여지는 애당초 없었을 것이다.
페네르바체 구단은 김연경의 국제 이적 관련 FIVB의 결정을 존중하며, 대한배구협회 측과 후속 논의를 진행하겠다는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FIVB 결정문에 명시된 이적료 문제를 대한배구협회와 협의 후 이를 처리한 뒤 김연경 문제를 매듭짓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에 대해 흥국생명은 김연경의 족쇄를 풀어준 FIVB의 결정에 대해 재심을 신청하고 더 나아가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 제소까지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국내 규정에 따라, 그리고 작년 9월 7일 김연경의 터키 진출에 즈음해 김연경 측과 대한배구협회, 흥국생명 3자가 작성한 합의문에 따라 당연히 흥국생명으로 복귀할 것으로 보였던 김연경을 하루아침에 외국 구단에 빼앗기게 생긴 데다 더 나아가 아예 자유의 신분으로 놓아줘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이상 모든 수단을 강구하려 하는 흥국생명 측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과거 사례에 비추어 보면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에서 권위 있는 국제스포츠기구의 공식적인 결정이 번복되는 일이 지극히 희박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번 FIVB의 결정도 번복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한편으로 보면 흥국생명은 김연경의 거취에 관해 국내 FA 관련 규정을 악용하려 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국제 규격과 맞지 않는 국내 규정의 맹점으로 인해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된 피해자로도 볼 수 있다. FIVB가 내린 김연경 국제이적 분쟁의 결론은 단순히 흥국생명의 패배가 아니라 국제 규격에 미달한 한국 배구의 참패다.
따라서 대한배구협회와 프로배구를 관장하는 KOVO는 선수의 FA 자격 취득을 포함한 신분 문제와 선수의 국내외 이적과 관련된 제반 규정을 국제 기준에 맞는 규정으로 개정하는 작업에 지체 없이 나서야 할 것이다. 국내 배구 저변이 넓지 않고 선수층도 얇고, 프로배구가 산업적으로 정착하기에 국내 환경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는 등의 ‘한국적 상황’을 내세워 국제 표준과 괴리가 큰 규정을 방치하는 행태는 더 이상 정당화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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