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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봉틀을 떨어뜨렸다고 손가락을 잘랐어요..."


입력 2013.11.03 12:38 수정 2013.11.03 12:44        데스크 (desk@dailian.co.kr)

<굿소사이어티 서평>북한 수용소 24년 생활의 감춰진 진실

'14호 수용소 탈출' 블레인 하든 저/신동숙 역/아산정책연구원 간
“어디 근본도 없는 탈북자 ××들이 굴러와서 대한민국 국회의원한테 개기는 거야? 대한민국 왔으면 입 닥치고 조용히 살아!” “하태경(새누리당 의원) 그 변절자 ××, 내 손으로 죽여버릴 거야. 그 개××, 진짜 변절자 ××야” (한겨레신문) 임수경 의원의 술자리에서 탈북자 백요셉에게 던졌던 발언이다. 물론 임 의원은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과했다고 들었지만, 그걸 보도한 기사를 본 뒤 필자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탈북자는 북한에서 죄를 짓고 도망 온 수상한 존재. 그런 편견은 임수경 의원과 필자를 포함한 80년대에서 90년대 초까지 대학을 다닌 세대가 공유하는 정서일 수 있다.

“사람들은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한국사회의 무관심은 끔찍할 지경이지요.”('14호 수용소 탈출' 253쪽)

편견은 정확한 판단을 흐리게 한다. 대학시절의 영향 때문인지 탈북자는 386세대들에게는 지금도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입 닥치고 조용히 살아” 임수경 의원의 말이 아니라도 풍요로운 남한사회에서 탈북자는 잊고 싶은 존재들인 것이 사실이다.

"행복한 북한엔 인권문제가 없다”는 저들의 허위선전

신간 '14호 수용소 탈출-자유를 찾아 북한에서 서방까지 한 남자의 놀랍도록 긴 여정'(블레인 하든 지음, 아산정책연구원 펴냄)은 우리사회가 외면하고 속으로 멸시(?)했던 한 탈북자를 미국인 저자가 2년 넘게 인터뷰해서 만든 책이다. '14호 수용소 탈출'은 쉽게 믿을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방면에 많은 정보가 없는 필자 같은 사람들이라면 책에 담긴 내용이 맞긴 맞을까 하는 의문부터 품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모두가 가장 존엄하고 행복한 삶을 꽃피워 나가는 우리나라에는 ‘인권 문제’란 존재하지 않는다”(2009년 조선중앙통신) 공식적으로 북한은 수용소의 존재를 부인한다. 인민의 지상낙원에 수용소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북한은 존재를 부인하고 남한은 존재를 모른 척 하고 싶은 것이 수용소인 것이다.

남한에서 나왔다면 무관심 속에 사라졌을 이 책은 미국에서 출판된 덕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남북한이 보고 싶지 않은 진실을 미국인 저널리스트 블레인 하든은 차분하게 써내려 간다.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애를 쓴 흔적이 책 곳곳에 보인다. 이 책의 증언은 담담하게 쓴다고 해도 충격적이기 때문에 감정을 자제 했을 거라 추측된다.

“영양실조로 성장이 부진해 키 170센티미터에 몸무게 54킬로그램으로 체구가 작고 가냘프다. 팔은 어린 시절의 노동으로 활처럼 구부려졌다. 허리와 엉덩이에는 고문으로 불에 덴 흉터가 있다. 아랫배에는 불 위에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쇠꼬챙이로 찌른 흉터가 남았다. 양 발목에도 독방에 갇혀 족쇄를 차고 거꾸로 매달렸을 때 생긴 흉터가 있다. 오른손 중지 한 마디는 수용소 피복 공장에서 재봉틀을 떨어뜨린 데에 대한 처벌로 잘렸다.”

필자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감정이 복잡해 졌다. 재봉틀보다 못한 놈이라는 이유로 손가락을 잘리는 수용소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 속 편할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14호 수용소 탈출', 이 책을 읽어보면 북한의 인권 탄압 현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심각하다. 이런 지옥과도 같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인 ‘14호 수용소’에서 탈출한 한 젊은이의 이야기는 북한이 얼마나 병든 사회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북한은 존재를 부인하고 남한은 모른 척 하는 수용소

‘악질 반동종파’들이 수용된 14호 수용소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중 가장 막장이다. 이 책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신동혁은 14호 수용소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반동인 아버지와 어머니는 수용소가 베푸는 일종의 특혜로 결혼을 했고, 그 결과 남자 형제 둘을 낳았다. 바로 둘째 아들이 신동혁이었다. 그는 무려 23년 동안 지옥과 같은 수용소에서 살았다. 수용소는 그의 집이었고 세상의 시작과 끝이었다. 심지어는 김일성 김정일에 대해서도 잘 몰랐을 정도였다.

너무나 배가 고픈 그에게 자유에 대한 허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1년 내내 옥수수 죽에 배추절임, 배춧국만 먹었다고 한다. 생존을 위해 쥐, 메뚜기, 잠자리를 잡아 구어 먹는 것은 그나마 호사였다. ‘시범마을’ 동혁과 어머니는 수용소에서 가장 좋다는 시범마을에 살았다고 해도 생활수준은 열악했다. 그들은 콘크리트로 된 방바닥에서 잠을 잤고 부엌은 네 가구가 공동으로 사용했다, 전기는 한 시간씩 하루 두 번만 들어왔다. 변소도 공동으로 사용했다. 수도 시설도 목욕 시설도 없었다. 밤이면 사상투쟁회의와 생활총화에 참여해야 했다.

‘도망자를 감춰주거나 보호한 자, 신고를 하지 않은 자는 즉시 총살한다’ 암기해야 할 수용소 10대 규칙 이었다. 심지어는 부모 형제라고 해도 신고 하지 않으면 총살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감시하고 이상한 행동을 발견 하면 즉시 신고해야 했다. 죽음은 그에게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에게 비극은 일상이었다. 옥수수 몇 알을 훔쳤다는 이유로 여덟 살짜리가 선생님의 지시봉에 맞다가 결국 죽고 만다. 동급생을 집단 구타해서 죽이는 일도 수용소에서는 새로울 것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차라리 죽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 아닌가? 라는 질문에 이 책은 이렇게 대답한다.

“수용소 태생으로 누리는 반사이익은 삶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는 잃을 희망도, 애통한 과거도, 지켜야 할 자존심도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국물을 핥아 먹더라도 모멸감을 느끼지 않았다. 감수에게 용서를 구걸해도 수치스럽지 않았다. 음식 때문에 친구를 배반해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 모두가 생존 방법일 뿐이지 자살의 동기는 아니었다.”(127p)

신동혁에게 도덕은 낯선 개념이었다. 그에게 있어 도덕이라면 보위부 요원에게 주변 사람을 밀고하는 것이었다. 밀고는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는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밀고에 부모형제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는 탈출을 시도한 어머니와 형을 고발했다. “다 같은 죄수여서 가족이란 개념을 몰랐다”는 그는 14살이던 1996년 어머니와 형의 탈출 모의를 간수에게 신고하고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고발의 대가로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보상은 없었고 8개월 동안 공범여부를 의심받아 지독한 고문을 받았다.

도덕이란 보위부 요원에게 주변 사람을 밀고하는 것?

‘공개처형’ 결국 그의 어머니는 교수형 형은 총살로 공개처형 되었다. 그는 이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는 그들에게 어떠한 동정심도 느끼지 못했다. 탈출을 시도하여 자신을 곤란하게 한 가족들에게 화가 날 뿐이었다. 그에게 가족과 사랑 우애라는 것은 공감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300~400g의 옥수수밥을 먹고, 풀을 뜯어 먹고 땅바닥에 흩어진 음식을 주워 먹었다” 그에게는 가족보다 먹는 것이 더 소중했다. 탈출의 동기도 더 배불리 먹기 위해서였다. “7살 때인가 한 여자아이가 밀 이삭 5개를 주웠다가 몸 검사에 걸려 맞아 죽었다. 쥐를 잡아먹으려 해도 간수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를 둘러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먹는 것이었다.

“둘 중 한 명의 죽음이 나머지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이어진 경우가 많았다. 나치 시대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기를 남긴 어린 소녀 안네 프랑크를 알던 베르겐벨젠(Bergen-Belsen) 수용소의 한 여성은 안네의 죽음은 굶주림이나 발진티푸스 때문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보다는 언니 마고(Margot)가 죽은 후 안네가 의지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했다.”(169쪽)

사람을 믿을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자란 신동혁이 결국 사람을 믿어서 자유를 찾는 과정은 아이러니 하지만 가슴 떨리게 하는 대목이다. 신동혁은 외부에서 죄를 짓고 온 수용소의 동료와 함께 탈출을 모의한 덕에 자유를 찾는다. 사랑한다, 행복하다, 즐겁다, 불행하다, 억울하다, 저항하다 는 등의 말을 들어 본 적도 없고, 그 의미를 한국에 와서야 알게 되었던 신동혁이 인간에 대한 신뢰를 알아가는 과정은 담담하지만 감동적이다.

부도덕한 정권이 인간을 짐승처럼 통제하려고 해도 인간의 고귀한 가치까지 없애버릴 수 없었다. 신동혁은 탈출 후 가족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닫고 자신을 경멸했다고 한다. 다만 어머니와 형이 처형된 것은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느끼고 그 동안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개인적 치부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용서를 구한다. 그가 어떤 감정이었는지는 필자로써는 상상하기 힘들다.

“생존은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사회적 성취일 수밖에 없다.” 헝가리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1943년에 부헨발트(Buchenwald)수용소로 이송되었던 벨기에 레지스탕스 유진 바인시톡(Eugene Weinstock)은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밝혔다. (169p)

유진 바인시톡의 말을 빌리자면 탈북자들의 생존은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사회적인 성취’인 것이다. 우리 사회 특히 지식인 사회가 북한의 더러운 치부를 북한정권의 알량한 친일파 제거나 주체사회 건설이라는 작은 성취로 덮으려 한다면 이것은 죄악이다. 반대로 우파가 탈북자들을 국회의원 몇 석 얻으려는 정치게임에 이용하려 든다면 이것도 역사의 죄가 될 것이다. 탈북자는 좌와 우의 문제가 아닌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가져야 할 ‘인간존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에 대한 존엄을 포기할 때 어둠의 세력은 우리를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 근본도 없는 탈북자 ××들이 굴러와서 대한민국 국회의원한테 개기는 거야? 대한민국 왔으면 입 닥치고 조용히 살아!” 임수경 의원의 몰상식한 말에는 이렇게 충고를 해주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국회의원이라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개기고, 올바른 일에는 큰 목소리를 내세요!”

글/고진석 독서컨설턴트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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