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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인간들의 나약하고 비루한 운명에 대하여


입력 2006.08.29 09:22 수정        

[베스트셀러] 김영하의 <빛의 제국>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젊은 작가 김영하의 『빛의 제국』이 출간되었다. 동인문학상 수상작 『검은 꽃』 이후 삼 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소설이다. 탄탄한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 김영하의 소설세계에서 『빛의 제국』은 거대한 지각변동을 예고한다.

이번 소설에서 그는 자신의 특장인 감각적이고 속도감 넘치는 문체를 억누르는 한편, 묵직한 주제의식과 전복적인 상상력으로 1980년대에서 2000년대에 이르는 시간 동안의 한국사회의 변화양상과 그 구성원들의 개별적 삶의 궤적을 조망한다. 이 작품은 내용과 형식 모두 김영하의 기존 작품들과 성격을 달리하며, 1990년대 이후의 한국소설에서는 비슷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무엇보다 『빛의 제국』의 의미론적 파장은 1960년에 발표된 최인훈의 기념비적 소설 「광장」에 가 닿는다. 주지하듯 「광장」은 남북 분단의 현실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개별적 인간의 삶을 통해 정면으로 다룬, 최초이자 최고의 작품이다. 「광장」 출간 46년째인 올해, 김영하는 1960년대와는 또다른 층위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역사적 현실 조건 속에 놓인 인간의 실존적 삶에 중층적으로 접근한다.

「광장」이 4ㆍ19혁명 후부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까지의 문학사를 이념적으로 독점했다면, 『빛의 제국』은 1989년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문학사를 재편하며 현재의 이십대 젊은이들에게 1980년대 이후의 현대사를 추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놓는다. 김영하가 그려낸 21세기의 ‘이명준’은 스물네 시간 안에 자신의 존재는 물론 살아온 세월의 절반을 흔적 없이 정리해야 하는 중년의 스파이다. 『빛의 제국』은 그로부터 씌어지기 시작한다.

단 하루 동안 인생을 통째로 다시 산 한 남자 이야기
“어느 여름밤, 나는 침대에 누워 새로운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다. 문득 간첩, 그것도 남파된 지 이십 년이 넘은 남자가 떠올랐다. 그 동안 그저 조금 위험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고만 믿었던 이 남파간첩에게 어느 날 갑자기 귀환 명령이 떨어진다. 남은 시간은 하루. 그는 그 하루 동안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한다.

가족, 사랑, 직업과 추억, 그 밖의 모든 것들을 버려두고 떠나가야 하는 것이다. 시작은 근사해 보였다. 나는 벌떡 일어나 구상을 적기 위해 노트를 펼쳤다. 스파이의 이야기지만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보편적인 한 인간의 이야기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썼다.”

소설의 주인공 김기영(본명 김성훈)은 평양외국어대 영어과 재학중 차출되어 김정일정치군사대학 공작원반(구 695부대 130연락소)에서 사 년간 대남 공작원 교육을 받은 뒤 스물두 살이던 1984년 서울로 남파된 스파이다. 당의 명령에 따라 입시를 치르고 1986년 연세대 수학과에 입학한 그는 학생운동권에 잠입한다.

위장 재외동포나 고정간첩, 자생적 공산주의자 위주의 공작원 양성 방식에 변화를 꾀하고 있던 당시의 평양은 잘 훈련된 엘리트 출신 공작원을 남한 대학의 신입생으로 입학시켜 학생운동세력과 함께 커나가도록 한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김기영은 그 실험 모델이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영화수입업을 하며 남파된 스파이들에게 그럴듯한 전사(前史)를 만들어주는 이른바 ‘포스트’로 기능한다. 수백 명의 스파이들이 그를 거쳐 남한 각지로 흘러들어간다. 그러다 1995년 자신을 내려보낸 북쪽 담당자가 실각함으로써 잊혀진 스파이가 된 그는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왔다.

2005년의 어느 날 아침, 사무실에 출근한 그는 한 통의 스팸 메일을 통해 하루 안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귀환하라는 평양의 명령을 전달받는다. 자신의 기록이삭제되었으리라 믿고 있던 그는 명령의 전달 경위를 추측하며 고민에 휩싸인 채 서울 곳곳을 방황한다. 올라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그에게 남은 시간은 단 하루.

대학 시절 만난 아내와 중학교에 다니는 딸, 이십여 년 동안 자신이 일구어온 모든 것을 내던지고 가야 하는 그는 순간순간 잊고 있던 과거와 맞닥뜨린다. 불행했던 평양에서의 어린 시절, 배신한 동료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기도 했던 젊은 날의 기억 속에서 그는 시간과 미행의 강박에 동시에 쫓기며 허둥댄다.

기억하라,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그 인물이 내 머릿속으로 ‘찾아왔을‘ 때 동시에 두 가지가 떠올랐다. 하나는 폴 발레리의 시구였다. 정확히 어느 시에서 읽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그리고 이제는 무슨 경구처럼 씌어지는 구절이지만,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문장이었다.

내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잘 통제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어느 샌가 긴장도 감각도 무뎌진 채 그저 하루하루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하루, 인생에 대한 감수성이 극으로 치닫는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달라 보이고 낯설어 보인다. 그리고 문득 그야말로 아무것도 감각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 살고 있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귀환 명령은 어떤 면에서 그의 정신적 잠을 깨우는 역할도 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연작이었다. 그 연작 속의 세계는 조심스럽게 뒤집혀 있다. 마그리트의 다른 그림처럼 대놓고 부조리하지 않고 자세히 살펴봐야 무엇이 이상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하늘은 청명한데 땅은 어둡다. 가스등이 켜진 거리, 나무들은 검은 그림자에 묻혀 있다. 집의 창문에서는 램프의 불빛이 은은히 비쳐 나오지만 밖은 엄연히 낮이다. 내 소설의 주인공이 사는 세상이 바로 그런 곳이 아닐까. 혼자만 어둠 속인 혹은 혼자만 대낮인, 그런 세상. 그러다 갑자기 어느 하루, 그것마저도 뒤바뀐다.”

김기영은 북한, 1980년대의 남한 그리고 21세기의 남한사회를 모두 경험하는 인물이다. 그가 남파되었던 1980년대의 남한은 21세기의 남한보다는 오히려 북한과 더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국가 시스템, 국민들의 사고방식, 정치상황, 교육환경 등 모든 면에서 그때까지만 해도 남과 북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사회였다.

그러나 21세기의 남한은 1980년대의 남한과는 사실상 ‘다른 나라’이다. 후자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2005년 서울이라는 시공간에 소속된 김기영은 이미 자본주의사회에 완벽히 적응한 인물이다. “배는 불룩 나오고 가슴은 빈약하며 팔에는 물살이 출렁대는, 남한의 평균적인 중년 남성이 되어가고 있는”중으로, “하이네켄 맥주와 빔 벤더스의 영화를 좋아하”고 “일요일 오전엔 해물 스파게티를 먹고 금요일 밤엔 홍대앞 바에서 스카치 위스키를 마시는 사람”이다.

누가 봐도 간첩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386세대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그에게 떨어진 귀환 명령. 그것은 자신이 본래 “공작원이고 당과 수령에게 충성을 맹세한 노동당원”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동시에 일상에 함몰된 채 살아가던 권태로운 삶을 통째로 뒤흔드는 계기가 된다.

그는 단 하루 동안 인생의 전부를 반추하고 회의하며 ‘복습’한다. 이는 엄밀히 말해 그에게 자본주의란 ‘학습’한 것일 뿐 ‘체득’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영원한 국외자. 그것이 김기영의 운명인 셈이다. 소설의 제목으로 쓰인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은 “혼자만 어둠 속인 혹은 혼자만 대낮인, 그런 세상”을 살아온 김기영의 삶을 함축하고 있는 그림이다.

눈 먼 인간들의 나약하고 비루한 운명에 대하여
“이 소설의 기본적 지향점은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왔는가 그리고 인간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통해서 한치 앞을 모르는 눈 먼 인간들의 운명을 다루고 싶었다.”

김기영의 아내 장마리는 대학 시절 운동권 서클에서 김기영을 만나결혼했다. 여러 직업을 전전했고 지금은 폭스바겐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자기 삶의 행로가 뒤틀어졌다고 생각하며 남편과 딸의 일상엔 무관심한 채 스물 살이나 어린 대학생과의 연애에 빠져 있다.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잃고 늙어가는 자신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대학생과의 섹스를 통해 보상받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시시각각 자신을 옥죄어오는 시간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무인 러브호텔에서 어린 애인이 요구에 의해 스리섬을 벌인다.

자책감은 있지만 죄책감은 느끼지 않는다. “임수경을 질투하고 평양에 가고 싶어 안달을” 했던 1980년대의 주사파 여대생이 마흔 살 중년의 나이에 『중국의 붉은 별』을 끼고 다니며 마오를 숭배하는 스무 살짜리 대학생에게서 정신적 육체적 위안을 얻는 한 편의 촌극은 지난 이십여 년 동안 한국사회와 그 구성원들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가장 친한 친구를 배신하고 무언가 야릇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남자친구의 생일파티에 참석해 아무도 없는 집에서 그와 진한 스킨십을 나눈 김기영의 조숙한 딸 현미의 문장은 그런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끔찍했던 어떤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는 것, 그런 일이 반복되는 것, 혹시 그런 게 인생이 아닐까.” 김기영은 하루 동안 절친한 대학 후배를 만나 진실을 털어놓기도 하고, 공작원으로 함께 남파된 동료들을 찾아 명령의 경위를 캐보려고도 하지만 돌파구는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그는 장마리에게 모든 것을 고백한 뒤 같이 올라가자고 설득하지만 그녀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단호하게 거부한다. 마침내 귀환 쪽으로 마음의 가닥을 잡는 순간, 김기영은 자신이 오래 전부터 남쪽 정보당국에 의해 완벽히 감시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만약 이 소설이 잘 읽힌다면, 그 순간 당신은 이 소설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없다. 아니 있지만 계속해서 그것을 지워나간다. 소설적 현대성에 대한 이런 지향이 제대로 실현됐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 소설을 읽음에 있어 ‘이야기’에만 집중하지는 말았으면 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바람이다. 물론 이 소설은 ‘잘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만약 이 소설이 잘 읽힌다면, 그 순간 당신은 이 소설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빛의 제국』은 원고지 1천5백매 분량으로 저자가 쓴 가장 긴 소설이다. 집필시 몇 번이고 처음부터 새로 쓰는 습관을 버리지 못해 돌연 문예지 연재를 중단하고 문장, 시점, 구성 등 등장인물을 제외한 모든 것을 바꾸어 다시 썼다. 오히려 방해가 될까봐 방북 취재는 일부러 하지 않았고, 대신 탈북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그 내용을 참고해 평양을 묘사했다. 특히 저자와 동갑인데다 평양에서 영화대학을 졸업하고 모스크바 유학까지 한 탈북자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탈북 시인 최진이씨와 그 부군은 초고를 읽고 코멘트를 해주었다.

한 편의 숨가쁜 스파이 영화처럼 『빛의 제국』은 여러모로 무거운 소설임에도 시종일관 잘 읽힌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이 소설의 경우 그것은 장점이 될 수 없다. 잘 읽히는 것은 ‘이야기’일 뿐이다. 이 소설은 그 이야기의 밑바닥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스스로 지워나간다.

주인공의 의지, 소통 등은 주인공이 의식할 수 없는, 이야기 바깥에 존재하는 소설의 ‘형식’에 의해 서서히 허물어져버린다. 에셔의 판화를 떠올리게 하는 일종의 형식 실험이다. 『빛의 제국』이 잘 읽힌다면, 그것은 저자의 실수가 아니라 독자의 오독이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아랑은 왜』『검은 꽃』등 지금까지 국내에 발표된 김영하의 대부분의 작품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폴란드, 미국, 일본 등 세계 곳곳에서 이미 출간되었거나 곧 출간될 예정이다. 『빛의 제국』에 대한 반응들이 기다려지는 또다른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는 이미 세계에서 ‘통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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