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충북 단양서 1500년전 실체 드러나
“1500년 전 신라가 쌓은 봉수가 확실합니다. 축조방법이 신라산성과 같습니다. 단양은 신라가 한강유역으로 북진하는 길 가운데 가장 빠른 곳입니다. 그들은 영토 확장을 위해 단양에만 23개의 산성과 13개의 봉수를 쌓았을 정도로 삼국의 쟁탈이 치열했던 곳입니다.”
지난 3월말 기자는 윤수경 향토사학자(전 단양군의원)와 또 다른 봉수전문가와 함께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 어은동마을 앞산(해발 513m)으로 조선시대 지지(地誌)에 등장하지 않는 봉수대 취재를 위해 동행을 했다.
함께 간 봉수전문가는 “의풍봉수는 조선시대 봉수의 조잡한 수법과 확실히 다르다. 내부면석의 다듬질이나 봉수상부에 노출된 사각뿔 모양의 견치석(犬齒石) 등이 신라성벽에서 볼 수 있는 형태다. 이 봉수는 신라가 삼국통일위해 북진할 때 교통로를 장악하기위해 짧은 기간 동안 사용됐던 봉수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봉수가 설치된 곳은 산 정상을 판판하게 다듬은 후 남북방향이 긴 장방향 형태로 돌을 쌓아올렸다. 지대가 높은 남쪽 외벽에만 일부구간 석축이 남아있으며, 높이가 1.5m이내다. 다른 곳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사방 90˚ 각도로 돌이 흘러내려 높이를 알 수 없을 정도다. 지형 상 남쪽을 제외한 3면은 경사가 급하며, 출입은 남쪽에서만 가능했다.
내벽은 1m 높이로 돌을 다듬어 올렸는데 내부에 공간을 두었다. 공간 길이는 약 5.7m, 폭이 4m 정도다. 이곳에서 군사들이 산 아래 이동하는 적의 동태를 감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봉수전체 둘레는 약 40m이며, 방호벽과 연대 기능을 동시에 한 특이한 봉수대다. 축조방법은 크고 작은 석재를 위아래로 섞어 사용했으며 석재 사이는 주먹크기의 작은 돌로 채웠다. 축조에 사용된 석재는 강돌과 백색 화강암으로 돌이끼가 끼어 있어 장구한 세월의 더께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의풍봉수는 어은동 마을이장을 지낸 김천수씨 때문에 알려지게 됐다. 김씨는 어릴 때 마을 노인들로부터 앞산에서 봉홧불을 피웠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면서 윤수경 단양군 향토사학자께 제보를 한 것이다.
윤 선생은 온달산성아래서 태어나 산성에서 뒹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단양군 면직원으로 근무하면서 90년대 중순부터 틈틈이 산성을 찾아다녔다. 단양향토문화연구회도 발족해 문헌에도 없는 산성과 봉수대를 답사해 실측조사하고 책도 출간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비문전가로 취급했고 인정도 해주지 않았다. 그는 늦은 나이에 대학에서 문화재학을 전공하고 ‘소백산일원의 산성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기자에게 “더 늦기 전에 단양군에서 원형보존이 잘된 봉수와 산성을 발굴조사하고 가치에 따라 문화재로 등록하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고 밝혔다.
윤 선생은 성곽이나 봉수대의 석축이 파괴된 시기는 일제강점기에서 근대화물결이 시작될 때 돌이 유출됐다고 했다.
다행히 의풍봉수가 지금까지 잘 남아있었던 것은 봉수대에 짚단만한 구렁이 한 쌍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구렁이가 무서워 마을사람들 누구도 접근할 수가 없었고, 신고를 받은 일본순사가 현장을 확인하고 총으로 쏴 죽였다고 한다. 봉수주변은 지금도 찬 공기가 돌며, 으스스해 찾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의풍봉수가 위치한 계곡은 소백산과 태백산의 중간지점인 마구령(805m)을 넘는 험준한 고갯길이다. 삼국시대부터 이곳은 영토쟁탈의 무대였다. 한때 조선 6대왕인 단종 복위운동을 하던 밀사들의 은밀한 통로였다. 영남과 충청을 오가는 보부상들의 고달픈 삶의 정취가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후기까지 사람과 물자가 분주히 오가던 양백지간(兩白之間)은 이제 잊혀진 고갯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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