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귀의 ad Greece!>'삶과 죽음의 경계' 케라미코스,고대 아테네 국립묘지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우리가 죽으면 갈 곳은 어디일까? 정말 죽음 이후의 세계가 존재하기는 할까? 신실한 종교인에게 이는 금기된 불경스런 의문이다. 그래서 사후 세계의 인정여부는 종교적 믿음의 갈림길이기도 하다.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구원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된다. 모든 종교는 교리의 방식을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현세(現世)의 고통과 질곡의 삶을 넘어서 내세(來世)의 평화와 안녕으로 보상받고 징벌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문명이 시작된 이래 완전하게 풀지 못한 인간의 오랜 숙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죽고 나면, 어떤 사람도
주변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얻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살아있는 동안
살아있는 다른 사람들과 호의를 주고받을 뿐이다.
죽은 자는 가장 나쁜 것을 받을 뿐이다.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인생의 고뇌를 노래한 걸출한 서정시인 아르킬로코스(Archilochos)의 ‘죽음 이후’란 시다. 그는 기원전 8세기 후반 에게 해 파로스 섬 태생으로 호메로스와 견줄 만한 명성을 누린 시인이다. 그는 트라케와 파로스의 식민지 전쟁 등 숱한 전쟁에 직접 참여한 전사이기도 했다. 그는 죽음보다 현실의 삶이 소중하다고 노래했다. 그의 시가 그리스인에게 사랑받았다는 것은 그리스인의 죽음에 대한 사유방식의 일단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오디세이아'에도 그리스인의 사생관(死生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이후 귀향하는 과정에서 사후세계를 다녀오게 된다. 오디세우스는 저승세계에 산 채로 들어가, 지하세계의 그림자 영혼이 된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아이아스 등 많은 영웅들을 만나 그들의 하소연을 듣게 된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의 전우였던 아킬레우스를 만나 그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대가 여기 사자(死者)들 사이에서 강력한 통치자이니 그대는 죽었다고 해서 슬퍼하지 말라."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애절한 표정으로 이렇게 응답한다.
"나는 세상을 떠난 모든 사자(死者)들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지상에서 머슴이 되어 농토도 없고 재산도 많지 않는 가난한 사람 밑에서 품이라도 팔고 싶소이다."
아킬레우스의 말에서 망자(亡子)의 서러움이 진하게 묻어난다. 현실의 어떤 구차한 삶도 사후 세계의 어떠한 영광보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인의 사생관(死生觀)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었다. 하데스(Hades)신이 주재하는 지하세계는 돌아올 수 없는 죽은 자들의 세상이었다. 뱃사공 카론(Charon)에 의해 죽음의 강 스틱스(Styx)를 건너면 다시는 현세로 돌아올 수 없다고 믿었다.
그리스인들은 죽은 후에 가게 될 사후 세계의 존재를 믿었지만, 그곳이 현대 종교의 관념과 동일한 죄악의 대한 구원의 세계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현세주의자들이었다. 현실의 삶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했다. 물론 미지의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엘레우시스(Eleusis)에 있는 데메테르 신전에서 비밀스런 종교의식 엘레우시스 비의(Eleusinian Mysteries)가 행해졌던 게 그 증거다. 엘레우시스는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했고 아테네 영토에 속했다. 엘레우시스 비의(秘儀)는 입문자들에게 영적인 해탈에 이르는 비법을 전수하였다고 하나 구체적인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입문자는 비밀 엄수 서약을 해야 했고, 아테네가 비의를 주관하면서 비밀을 누설하는 자를 사형에 처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신비스런 이 비교(秘敎)에 입문해서 “의식에 참석하기만 하면 어떤 행동을 하건 상관없이 불멸의 축복을 얻을 수 있다고 약속했다. 즉 비교는 개인의 구원을 목적으로 했다.” 모든 종교의 기원이 구원에 대한 약속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재확인시켜 준다. 비의 참가자들이 어떻게 구원을 보장받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참가자들이 “엘레우시스 비의를 통해 우리들은 삶의 시작에 대해 배웠고, 현생을 행복하게 사는 힘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희망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던 것을 보면, 이들이 비의를 통해 어느 정도 영적인 위안을 얻었음에 틀림없다.
엘레우시스 비의(秘儀)는 아테네로부터 인정받고 보호를 받는 혜택을 누렸다. 매년 9월에는 대규모 의식이 거행되었다. 아테네에서 엘레우시스에 이르는 길은 ‘신성한 길(The sacred Way)’이라 불렸다. 아테네 성벽의 15개의 문 중 케라미코스(Keramikos)에 인접한 디필론(Dipylon) 성문과 신성문(Sacred Gate)이 있었다. 신성문과 연결된 ‘신성한 길’, 즉 ‘히에라 호로스(Hiera Hodos)’에서 출발하여 엘레우시스까지 이르는 20km의 길은 매년 9월이면 비의에 참가하려는 아테네인들의 신성한 행렬로 붐볐을 것이다.
케라미코스는 공동묘지였지만, 중요한 건축물도 몇몇 있었다. 엘레우시스로 이어지는 ‘신성한 길’과 피레우스 항구로 가는 길의 출발지점인 삼각지에 트리토파트레이온(tritopatreion)신전이 있었다. 아테네 시가지를 떠나는 마지막 신전이자, 아테네 시가지로 입성하는 첫 신전이었다. 신전의 정확한 기능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테네의 번영과 아테네인의 축복을 빌지 않았을까?
아테네의 관문인 피레우스 항으로 가는 길은 바로 아테네가 에게 해로 뻗어가는 번영의 길이었고, 엘레우시스로 가는 길은 사후 세계의 축복을 기원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물품의 수출입이 피레우스 항구를 통해 이루어졌으니 아테네에서 상업적으로, 군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길이었던 셈이다. ‘신성한 길’ 역시 메가라, 코린트, 델피, 펠로폰네소스로 향하는 길이니 그리스 본토와 소통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케라미코스는 바로 두 길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에 위치했다.
케라미코스 유적 한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건축물은 폼페이온(The Pompeion)이었다. 폼페이온은 아테네의 주성문인 디필론과 신성문 사이에 있었다. 디필론과 신성문은 아테네로 입성하는 주 성문으로 다양한 조각 등으로 장식되었던 것 같다. 인근에서 발굴된 사자상, 스핑크스, 쿠로스 등이 이를 짐작하게 해준다.
폼페이온은 아테네의 최고 축제인 판아테나이아 축제를 준비하는 곳이다. 가로 세로가 각각 70m, 30에 달했다고 하니 대단한 규모의 건물이다. 이곳에서 축제를 위한 준비물, 각종 제물과 도구들이 보관되었다. 이곳에서 아크로폴리스의 관문인 프로필라이아로 향하는 축제 행렬이 출발했다.
하지만 기원전 86년에 로마가 아테네에 침공하여 폼페이온, 디필론, 신성문을 비롯한 주요 시설들을 대부분 파괴했다. 그들로서는 아테네 시민들이 자신들의 영광을 노래하고 결속을 다지는 최고의 축제인 판아테나이아 제전을 분쇄함으로써 아테네인들의 문화를 말살하고 저항의지를 꺾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케라미코스는 아테네의 국립묘지 역할을 했다. 수많은 영웅과 귀족, 아테네에 공헌한 시민 및 그 가족이 이곳에 묻혔다. 오랜 세월동안 이곳에 숱한 묘비와 부조물, 기념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섰을 것이다. 하지만 3천 여 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부침에 따라 훼손이 계속되어 아주 오래된 영웅들의 무덤은 남아있지 않다. 대개 기원전 6세기 이후의 묘비들이 발굴되어 전해진다.
하지만 발굴된 묘비(stele)들은 여러 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유물들이다. 매우 다양한 인물들의 묘비석을 통해 아테네인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자(死者)를 기리는 아테네인들의 애틋한 마음과 함께 당대 아테네인의 의복과 풍습, 도구, 사유방식까지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피레우스 항구로 가는 길목 양쪽으로는 아테네인의 가족묘가 상당히 많이 산재해 있었다. 그 뒤의 구역이 확대되어 로마인들의 가족묘가 조성되기도 했다. 이 부근 전체가 ‘무덤의 거리(Way of the Tombs)’로 불린다. 이곳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묘비석과 케라미코스에서 발굴된 인상적인 묘비석 몇 개를 소개한다.
묘지들 가운에 가장 앞에 위치하여 눈에 띄는 것이 말을 탄 청년상이다. 묘비에 조각된 상은 무덤의 주인공의 직업과 출신 배경, 죽음의 원인 등을 짐작하게 해준다. 망자 한명을 조각한 경우도 있지만, 기원전 5세기경에는 주로 가족을 함께 조각하기도 했다. 이 무덤의 주인은 아테네 전사 덱실레오스(Dexileos)다.
그는 BC 394년 코린토스 전쟁 때 스파르타 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곧게 선 갈기와 앞발을 높이 쳐들어 적을 짓밟는 말의 기세와, 쓰러진 적을 창으로 제압하는 청년의 자세가 휘날리는 망토와 어울려 더욱 역동적으로 보인다. 쓰러진 적이 방어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도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
원래 청동으로 만들어져 부착되어 있었다는 창과 말고삐가 소실된 점이 아쉽다. 말을 타고 돌진하여 적을 물리치는 장면을 부조함으로써 그의 가족은 덱실레오스의 용맹을 오래도록 후손에게 기억시키고자 했던 것 같다.
묘비석 기단 위에 설치된 황소상도 인상적이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사모스 섬 출신의 알피노스(Alphinos)의 아들 디오니소스(Dionysios)다. 그는 기원전 4세기 중엽 헤라 신전(Heraion)에서 보물지기로 봉직한 것 같다. 그는 케라미코스 인근인 콜리토스(Kollytos) 구에 살았고 미혼이었다. 백색의 대리석으로 조각된 힘이 넘치는 황소의 야성미가 물씬 풍기는 걸작품이다. 이중섭의 ‘황소’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이런 석우(石牛) 작품은 신전이나 묘역에 자주 조성되는 양식이다. 청동기 시대부터 시작된 오랜 석우숭배(石牛崇拜)의 관념이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여전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정도의 훌륭한 거대 조상을 봉헌 받은 것을 보면 디오니소스가 헤라 신전에서 꽤 중요한 소임을 맡았던 것 같다. 아니면 그의 가문이 매우 부유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죽음은 남은 자에게 더욱 슬픈 일이다. 케라미코스에 조성된 숱한 망자의 무덤은 말이 없지만, 묘비석마다 새겨진 다양한 부조 속에 망자가 생전에 가족과 나누던 정겨웠던 장면들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애끓는 슬픔과 허망함, 망자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히 느껴진다.
살아남은 가족들은 망자의 기일(忌日)이 되면 케라미코스를 방문하여 꽃을 바치고, 묘비에 새겨진 망자의 모습을 쓰다듬으며 다감했던 추억들을 되새겼으리라. 몇몇 묘비석들은 망자와의 이별의 슬픔을 짧은 글귀의 비문으로 덧붙이고 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암파레테(Ampharete)의 묘비도 그 중의 하나다. "나는 여기에서 내 딸의 사랑스런 자식을 안고 있다. 우리가 살아서 태양 빛을 바라볼 때, 나는 이 아이를 무릎에 안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죽어서 역시 죽은 그 손자를 안고 있다." 손자를 애지중지하던 할머니의 슬픔이 애잔하게 느껴진다. 할머니가 오른손에 살아있는 새를 쥐고 아이를 어르고 있는 모습이 생생하다.
아버지가 딸을 보내는 슬픔이 잔잔하게 담긴 묘비 부조도 인상적이다. “여기 아리스톤(Ariston)과 로디라(Rhodilla)의 딸 아리스틸라(Aristylla)가 잠들어 있도다. 너는 우리에게 너무나 훌륭한 자식이었다. 사랑하는 딸아!” 이별의 슬픔이 깃든 딸의 모습에 비해 슬픔을 안으로 삼키며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딸의 손을 지그시 잡은 아버지의 모습이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케라미코스는 국립묘지답게 숱한 전투에서 전사한 아테네의 청년들이 수없이 많이 묻혔다. 하지만 용사들의 무덤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묘비 장식에서 뚜렷한 걸작품 몇 기가 남아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무덤 감실(naiskos)에 조각된 아테네 전사 아리스토나우테스(Aristonautes)의 묘비가 대표적이다.
왼손에 방패를 들고 소실된 오른손에 창을 들었을 것이다. 왼발과 오른발을 땅이 파일 듯 굳게 딛고 있고, 발을 벌리고 버티고 선 품새가 쉽게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굳건해 보인다. 더구나 상체와 하체의 근육과 핏줄이 팽팽하게 표출되어 곧바로 적과 육박전이라도 벌이려는 상황을 묘사한 듯 긴장감을 준다.
얼굴 표정의 결연함도 압권이다. 조각의 뛰어난 작품성을 자랑하듯 감실에 조각가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는 것도 이채롭다. 아리스토나우테스(Aristonautes)의 용맹한 모습을 오래도록 생생하게 기억하도록 만든 이는 조각가 스코파스(Skopas)다.
죽은 자들의 슬픔에 산 자들이 언제까지나 매달릴 수는 없는 법이다. 아크로폴리스를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케라미코스 옆으로 난 넓은 길을 따라 5 분여 정도 걸어가면 아고라쪽으로 가는 길에 늘어선 벼룩시장을 만나게 된다. 여기는 궁색하지만 살아있는 자들의 거래가 활발하다.
고대 아테네 시절에도 이랬으리라. 케라미코스 바로 옆이 아고라였다. 시장의 시끌벅적한 활력이 케라미코스의 우울과 슬픔, 좌절의 분위기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드는 촉매가 되었을 것이다. 가장 치열한 현세의 공간 옆에 망자들의 묘지를 둔 것도 아테네인들의 또 다른 지혜가 아닐까?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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