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소의 시어머니' 선주사 감독관, 알고 보니...
설계 단계부터 조선소 파견…선박 건조 일거수일투족 감시 후 본사 보고
길게는 15년씩 한국 체류…한국서 은퇴하는 사례도
울산과 거제도 등 국내 주요 조선업체들이 자리 잡은 도시에는 유난히도 많은 외국인들이 눈에 띈다. 이들 중 대부분은 계약 등 일시적 업무로 잠시 방문한 이들이 아닌, 아예 울산이나 거제도에 몇 년씩 눌러 사는 이들로, 심지어는 해당 지역에서 직장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하기도 한다.
이들의 정체는 바로 ‘조선소의 시어머니’로 불리는 선주사 감독관들이다.
29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조선소와 선주사간 선박 또는 해양플랜트 건조계약이 체결되면 선주사는 설계 단계부터 수십 명의 감독관들을 조선소에 파견한다.
감독관의 임무는 한 마디로 ‘조선소가 배를 잘 만드는 지 여부를 감시하는 일’이다.
제조사가 알아서 만든 제품을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일반 제조업과는 달리 척당 수천억원에서 수조원에 이르는 고가 제품을 만드는 조선업체들은 그만큼 까다로운 고객들에게 시달려야 한다.
건조 중 선박서 불나면 바로 선주사에 보고
조선소에 들어와 눌러 앉은 감독관들은 설계 단계에서부터 철판커팅, 용골거치, 조립, 진수, 의장 등 자사의 배가 건조되는 모든 과정을 감시하고 매일 선주인 본사에 상세히 보고한다.
대우조선해양 관계자는 “선주사들은 자사가 발주한 선박이나 해양플랜트 건조에 사용되는 부품과 자재의 규격 뿐 아니라 공급업체까지 일일이 구체적으로 지정해 계약서에 명시한다”며, “파견된 감독관들의 주요 업무는 이같은 사항들이 잘 준수되고 있는지 꼼꼼하게 살피고, 공정 진행 상황이 납기를 준수할 수 있을지 여부를 살피는 것”이라고 말했다.
선주사 감독관들의 대부분은 엔지니어 출신들인 만큼 조선소측 엔지니어들에게 기술적 자문을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최근 몇몇 조선소에서 잇따라 발생한 안전사고도 감독관의 눈을 피해갈 수 없다. 모든 사고내용은 감독관들을 통해 곧바로 본사에 보고되며, 이는 해당 선박의 계약조건 뿐 아니라 향후 다른 선박의 수주에도 영향을 미친다.
대우조선해양 관계자는 “최근 들어 선주사들이 가장 중점을 두는 점은 안전 분야”라며, “계약 전 프레젠테이션에도 선박을 안전하게 건조한다는 점을 선주 측에 충분히 인식시켜야 하고, 건조 과정에서도 안전사고가 발생하지 않아야 선주사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화재 등 선박에 손상을 입히는 사고의 경우 인도시기 지연이나, 중고선가 하락 등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선박 가격을 낮추는 패널티가 적용되기도 한다.
차량 렌트에서 자녀 국제학교까지…조선소 준비사항 많아
까다로운 ‘시어머니’들이 단체로 몰려오는 만큼 이들 선주사 감독관들을 잘 보살피는 것도 조선소들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감독관들의 사무실, 사무집기 등 업무관련 지원은 물론 거주시설, 차량, 자녀 국제학교 등교까지 한국에서의 근무를 위한 각종 지원을 인도시점까지 제공하는 내용이 계약서에 포함돼 있다”며 “여기에 소요되는 비용 역시 선박 가격에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다수의 외국인 감독관들이 상주하는 만큼 조선소들은 그들의 자녀를 위한 국제학교를 설립, 운영하기도 한다.
대우조선해양은 거제도 옥포에 거제국제외국인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4세에서 14세까지의 36개국 선주사 감독관 자녀 500여명이 다니고 있다.
거제도에는 외국인학교가 이곳 한 곳 뿐이기 때문에 대우조선해양 파견 감독관 자녀 뿐 아니라 인근 삼성중공업 파견 감독관 자녀까지 거제국제외국인학교를 다닌다.
현대중공업은 울산조선소 사택단지 내에 현대외국인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모든 교과과정은 영국 학제에 맞춰 진행되며, 교사들도 대부분 영국 출신들이다.
선주사 감독관들의 업무 환경도 조선소들이 신경써줘야 할 부분이다. 대우조선해양은 지난 5월 선주사 감독관들을 위한 별도의 사무동인 글로벌센터를 준공해 운영하고 있다.
"한국이 좋아서" 선주 갈아타고 장기 체류…한국서 은퇴하는 감독관도
감독관들의 숫자는 선종이나 척수, 계약 조건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보통 오일탱커와 같이 기술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는 선종은 10여명이, FPSO(부유식 원유생산저장하역설비)와 같이 고난도의 기술을 요하는 해양플랜트는 50여명까지 파견되기도 한다.
현대중공업의 경우 3000여명의 감독관 등 선주사 관계자와 그 가족들이 울산조선소 사택단지 내 외국인 거주촌에 입주해 있고, 대우조선해양은 가족을 제외한 선주사 관계자 수만 28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선주사 감독관들이 조선소에서 ‘시어머니 역할’을 하는 기간은 짧게는 2~3년, 길게는 10년 이상씩 이어지기도 한다.
선박 인도와 함께 감독관들의 역할도 끝나는 만큼, 건조기간이 짧은 상선을 한 두 척 발주한 경우에는 감독관들이 체류 기간도 짧지만, 상선을 시리즈로 여러 척 발주했거나, 공기가 긴 해양플랜트를 발주했을 경우 장기간 체류가 불가피하다.
대우조선해양 관계자는 “쉐브론에서 파견한 한 감독관은 현재까지 15년째 거제도에서 근무하고 있고, 여기서 근무하다 은퇴한 선주사 감독관들도 있다”며, “거제시에서 대우조선해양이나 삼성중공업으로 파견 온 감독관들 중 장기 체류자에게 명예시민증을 수여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어떤 감독관의 경우 한국에서 계속 체류하기 위해 자신이 소속된 선주사의 프로젝트가 완료된 시점에 다른 선주사(한국에 다른 선박을 발주한)로 직장을 옮겨 다시 한국으로 파견 오는 식으로 10년 넘게 체류하는 경우도 있다”며 “한국 여성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말했다.
이처럼 한국에서 생활하는 기간이 길다 보니 한국 업체 및 한국인들과의 관계도 ‘감시자’보다는 ‘동료’에 가까워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대우조선해양 관계자는 “업무적으로 보면 선주사 감독관들이 조선소에 대해 ‘갑’의 위치지만, 대부분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우리쪽 직원들과도 친해지려는 노력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현지화’에 대한 노력은 선주사 감독관 본인 뿐 아니라 가족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선주사 감독관 가족들끼리 모여 클럽활동도 하고, 체육대회도 하며, 크리스마스 등 특별한 때는 감독관 부인들이 모여 자선활동도 한다”면서, “올림픽이나 월드컵 때는 국적별로 모여 응원전도 펼치는데, 세계 각국의 선주사 관계자들이 다 모여 있기 때문에 매우 재미있는 풍경을 연출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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