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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는 이승만 기리며 해방과 건국 함께 기뻐하는 날


입력 2015.08.01 09:25 수정 2015.08.17 17:49        데스크 (desk@dailian.co.kr)

<굿소사이어티 칼럼>광복 70주 건국 67주 한민족에게 가장 큰 의미

지난 5월 11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광복 7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주최로 열린 '광복 70년 주제어 및 엠블럼 선포식'에서 어린이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합창하고 있다.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2015년 8월 15일, 올해로 광복 70주년과 건국 67주년을 맞이한다. 우리에게 광복은 어떠한 날인가? 광복은 일본 군국주의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항복을 선언한 날이다. 일본의 항복 선언과 더불어 일본이 지배하던 한반도에는 어둠이 걷히고 자유의 빛이 비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은 주권을 되찾고 새롭게 국가를 세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광복 후 건국의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일본은 한민족에게 항복한 것이 아니라 연합국에게 항복하였다. 따라서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치안의 유지는 그 책임을 맡은 미국과 소련이 담당하게 되었다. 건국의 과정이 우여곡절이 많고 힘들었던 이유는 한반도에서의 건국이 서로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미국과 소련의 군정 아래에서 이루어졌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건국은 한민족의 의사에 따라 ‘민주적’으로 이루어져야 하였다. 그런데 미국과 소련은 ‘민주적’이라는 말에 대한 이해가 어떤 타협도 불가능할 정도로 달랐다. 미국에게 있어서 ‘민주적’이란 자유, 평등, 직접, 비밀이라는 선거 원칙에 따라 한반도에 거주하는 한민족의 선출된 대표들에게 정부의 구성과 국가의 수립을 맡기는 것이었다.

해방정국에서 돌파구를 뚫어낸 사람 우남 이승만

하지만 소련에게 있어서 ‘민주적’이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한반도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세력, 즉 공산주의자들과 이에 동조하는 세력들만에 의한 정권 장악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은 소군정이 통치하는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려는 계획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1946년 2월 5일 사실상의 정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세웠고, 인민민주주의적 ‘토지개혁’ 등을 추진하여 나갔다.

소련이 그 같은 일을 벌이는 동안, 미국은 미군정을 통하여 한반도의 모든 세력을 아우르려는 ‘민주적’ 방법을 찾아, 좌우합작을 통하여 한반도에 국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북한에서는 소군정의 후견 아래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위원회 운동을 통하여 정권 장악을 시도하였다. 소군정은 막힘 없이 북한의 공산화를 추진하였지만, 미군정은 남한 공산주의자들의 방해 공작에 ‘민주적’ 방법을 실행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이 된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 상황에서 돌파구를 연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한반도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의 타협이 전제되는 방식으로는 독립국 수립이라는 과제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기대를 접고, 유엔을 통하여 문제를 풀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외교에 나서서 미국과 유엔을 설득하여 한반도에서의 국가 수립 문제를 풀어나가고자 하였다.

그는 비장한 결심으로 1946년 11월 미국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위험과 미군정의 유화정책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알렸다. 수개월에 걸친 이승만의 노력은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1947년 4월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통일조선정부수립은 소련 측의 협조 없이는 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였고, 1947년 9월 미국무장관 마샬은 조선의 독립 문제를 유엔에 제출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에 이승만은 “미국정부에서 지금에야 바른 길을 잡아서 나아가게 되었다”고 논평하였다.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사항을 우리 민족이 거부하고, 유엔이 한국 문제를 다루게 되고, 남북총선에 의하여 독립국을 건설하게 되는 이 여정에서 이승만의 혜안과 외교 능력은 단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리하여 광복 3년만인 1948년에 광복이 이루어진 그날 대한민국은 건국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건국과정에서 이같이 초인적 노력을 경주하는 동안에, 소련, 북한의 김일성과 남한의 박헌영 세력이 얼마나 집요하고도 악랄하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방해하였는지도 동시에 우리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박헌영은 소련의 공작금을 받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위조지폐를 발행하여 남한 경제를 교란시켰다.

남과 북을 뛰어넘어 한민족에게 가장 의미 있는 날

그 때문에 발동한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그는 월북하였다. 하지만 북한에 머물면서 그는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을 지휘하여 혼란에 혼란을 가중시켰다. 1946년 10월의 대구 폭동, 유엔의 남북한 총선을 방해하기 위한 파업과 폭동, 제주4.3, 여순반란 등 그는 해방공간 3년을 불법, 파업, 폭동과 학살로 채색하였다. 김일성 역시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한답시고 재산몰수, 추방, 학살, 숙청 등으로 북한 전역에 공포를 일반화시켰다.

특히 유엔이 남북총선거를 통한 조선 독립 결의를 한 이후의 김일성의 대한민국의 건국 방해 공작을 보면 그 교활함과 폭력성이 극에 달한다. 그는 유엔이 결의한 남북한 총선의 방법으로는 공산주의 정권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남한의 총선을 저지함과 동시에 북한의 단독정권 수립을 획책한다.

북한에서의 총선은 거부하고, 남한의 총선을 저지하기 위하여 김일성은 일면 남한 정치 세력 분열책을 썼다. 그리하여 남한 총선 반대 세력인 김구를 회유하려고 남한의 사회단체 및 정당대표를 초청한다 하여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를 열어, 이를 총선 반대 선전전에 활용하였다. 또한 타면으로는 무장 폭동을 일으켜 직접적으로 선거를 방해하고자 하였다. 이 목적으로 기획된 것이 제주 4.3이었다. 결국 제주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에서는 선거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김일성은 유엔의 감시에 의한 총선은 거부하면서, 공산주의적 방식으로 그들만의 선거를 실시하였다. 남로당은 북로당의 지시를 따라, 제주 4.3의 주모자인 김달삼 등을 북으로 보내어 남한의 대표자 행세를 하게 하였다. 김일성은 선전에 필요한 공작을 꾸민 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의 선언을 하자, 조금 있다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라는 불법 정권의 출발을 선언하였다. 대한민국에 반역하는 불법적 분리주의 정권을 만들어낸 것이다. 결국 유엔은 대한민국만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결의하였다.

독립국 대한민국을 선포하는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은 광복과 건국의 의미를 명확하게 밝힌 소감을 발표하였다. 그는 1948년 8월 15일에 대해 언급하면서 “금년 8.15는 해방기념 외에 새로 대한민국의 탄생을 겸하여 경축하는 날이니 우리 3천만에게는 가장 의미 있는 날”이라 하였다. 대한민국이 “탄생”되었으니 그날은 건국의 날이다. “3천만에게는 가장 의미 있는 날”이니 이날은 현재 대한민국의 국민만이 아니라 통일이 되는 즉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될 북한의 주민들에게도 “가장 의미 있는 날”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광복70년 건국 67년의 오늘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은가? 공산주의의 방해 책동과 싸우면서 건국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다. 인구가 증가한 지금 5천 만의 대한민국일 뿐만 아니라 2500만의 대한민국이기도 하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말과 같이 현재의 대한민국이 7500만의 대한민국이 되기까지, 우리는 앞으로도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한다.

5000만의 대한민국을 파괴하려는 내외의 적들과 싸워야 하며, 2500만의 예비 대한민국 국민에게 자유민주주의의 빛을 찾아주어야 한다. 그들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기 때문이다.

글/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한국사)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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