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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경제 수장, 장고려의 '고려'는 '이상향'이었다


입력 2016.06.05 23:25 수정 2016.06.05 23:26        데스크 (desk@dailian.co.kr)

<중국의 7대 붉은 별 7인 상무위원 대해부 - 장고려②>

송나라때부터 고려는 중국인들에게 '동방의 유토피아'

"고려, 바다에서 바다로(KOREA, from sea to SEA)!"

이는 단 한 줄로 현 중국경제 총사령관 장고려(張高麗 1946~)의 일생을 요약해 본 것이다.

장고려는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닷가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바닷가 도시의 대학을 나온 그의 첫 직장은 바닷가에 위치한 국영회사였다. 바닷가 도시에서 첫 관직에 입문한 후 줄곧 바닷가의 시(市)와 성(省)의 수장으로 승승장구했다. 2013년 3월 시진핑 시대 개막과 더불어 장고려는 신해양실크로드가 주축이 된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 메가 프로젝트를 입안, 진두지휘하고 있다. 그는 지금 고향의 바다(sea)와 세계의 바다(SEA)(필자 주1)를 연결하는 필생의 투혼을 불사르고 있다.

바닷가 출신 장고려가 그의 승승장구 관운을 펼친 지역은 공교롭게도 마오밍시(茂名市, 1984~85), 광둥성(1985~2001), 선전시(1997~2001), 산둥성(2001~07), 텐진시(2007~12) 등 바다를 옆구리에 낀 지역 일색이다.

장고려처럼 바다색 일색인 지방수장 경력을 지닌 정치국상무위원은 현직뿐만 아니라 역대 정치국상무위원중에서도 찾기 어렵다. 내륙의 싼시(陝西)성 출신 시진핑 주석도 푸젠성, 저장성, 상하이 당서기 등 2성 1직할시의 연해지역 당서기 경력의 이른바 ‘하이파이(海派)’에 해당된다. 그러나 시주석이 처음 맡은 관직은 허베이성 서쪽 내륙 쪽에 위치한 정딩(正定)현 서기였기 때문에 바다색 일색인 지방수장 경력을 보유한 정치국상무위원은 장고려가 유일무이하다.

고려의 이름으로, 고려의 영광으로

장고려는 1946년 중국의 동남 연해성 푸젠에서도 동남연해 도시 취안저우 진장 어촌마을에서 태어났다. 반은 농민, 반은 어민이던 가난한 아버지는 갓 태어난 아들에게 '고려'(高麗)라는 이름을 지어주고는 3년도 채 안되어 세상을 떠났다. 장고려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은 '고려'라는 이름 하나 뿐이었다.

그렇다면 70평생을 고려의 이름으로 살아온 현 중국 정치국상무위원 겸 상무부총리(제1부총리겸 경제부총리)의 이름 '고려'는 중국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고려'는 중국역사상 특히 송나라시대 우리나라 예성강 하구 벽란도와 이집트의 나일강 하구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세계 3대항으로 손꼽히던 푸젠성 취안저우 일대에서 천년을 전해 내려오는 실재 존재하였던 '동방의 유토피아, 이상향'의 이름이다.

알다시피 '코리아'(KOREA, 또는 COREA) 대한민국 영문표기도 국제무역항 벽란도와 취안저우를 오가던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하여 인도와 중동, 유럽 등 세계전역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또한 '고려'는 중국의 4대발명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는 진흙활자(개살구도 살구냐, 너도밤나무도 밤나무냐, 필자는 진흙활자는 활자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세계가 공인하는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를 창출해낸 나라 이름이다.

어디 이뿐인가. 도자기(china)의 나라 차이나(CHINA)조차도 흉내조차 낼 수 없었던, 고려의 상감청자, 송나라 최고급 종이의 10배 이상으로 거래되었던 고려의 종이(高麗紙) 등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의 극치를 이룬 '실존하였던 지상천국'이다, 고려라는 이름은.

자기학대 자기비하의 식민사관의 슬픈 역사의 상처가 너무 깊고 오래가서 그렇지, 실상은 해상세력의 영웅 왕건이 건국한 '고려'(高麗, KOREA)는 기존의 후삼국을 재통일한데다가 고구려의 후예이자 용솟음치는 바다라는 나라이름을 지닌 '발해'(渤海 Rising Sea)(필자주2)와 신라 말엽 그 일몰의 바다를 찬란히 빛낸 장보고의 해상왕국, 이 둘을 합하여 이어받은, 즉 '3국+2α'의 통일왕국이자 '동방의 무역대국'이었다.

중국공산당의 공식홈페이지인 '중국공산당신문망'(中國共産黨新聞網)을 비롯 중국의 온오프라인은 장고려를 출중한 두뇌와 견고한 의지를 겸비한 성실노력 인물형으로, 강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지닌 원만한 성품이지만 불의에는 끝까지 맞서는 정의로운 천성을 지녔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장고려에 관한 중국 자료에서 ‘고려’의 높고 아름다운 기상이 은근히 느껴지는 까닭은 왜 일까.

장고려의 학창시절과 국영회사 시절

장고려는 유소년시절 홀어머니와 형제들과 함께 바다로 나가 잡은 물고기로 주린 배를 채웠다. '주어야독'(晝漁夜讀, 필자의 조어)이라고나 할까, 낮에는 물고기를 잡고 밤에는 학업에 정진하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그는 꿋꿋이 학업에 정진했다. 고향 읍내의 지방명문 중고교 챠오싱(橋星)중학교(필자주3)에 1등으로 입학하여 1등으로 졸업했다. 1965년 9월 그는 푸젠성 최대항구 도시이자 후일 경제특구가 된 샤먼(廈門)시의 샤먼대학(필자주4)의 경제학과를 입학했다.

기실 그는 학업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가 대학을 입학한 이듬해 1966년 공식 발동된 문화대혁명으로 인하여 대학문이 닫혔기 때문이다. 1966년부터 1977년까지 약 12년간 중국의 모든 대학들은 개점휴업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엘리트교육의 공백시대의 후과를 연배가 60~70세 쯤 된 중국인들이 톡톡히 치르고 있다. 60대 중국인 대다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다른 세대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생을 보내게 된, 불행한 세대이다.

학창시절 장고려의 취미는 글짓기로서 특히 시문에 능했다. 다음은 중국공산당홈페이지 메인화면에 떠있는 7인의 정치국상무위원 약력난에 소개되어 있는 장고려의 시 일부다.

"동해안 작은 어촌 마을, 그곳은 사랑하는 나의 고향, 초록색 들판과 은백색 파도가 술렁이는 곳, 내 고향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아름다운 그림. 동해안 작은 마을, 그곳은 사랑하는 나의 고향, 보리꽃향기 그윽하고, 고향의 추억은 퍼런 물고기 비늘로 튀어 오르고, 고향 마을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 사람......"

후일 장고려가 작성한 문서와 연설뿐만 아니라 그가 입안하고 집행한 정책들과 프로젝트(지금의 '일대일로' 포함)에도 이러한 독특한 시적 운율감이 느껴진다.

1970년 8월 장고려는 문화대혁명이 절정을 치닫던 시절에 대학을 나왔다. 직업선택의 자유라고는 꿈도 꿀 수 없던 그 광란의 시대는 그를 연해성 광둥성에서도 동남단 해안도시 마오밍시의 대형국영석유회사의 운반공으로 내던졌다. 지금은 ‘낭만과 사랑’을 테마로 하는 '마오밍 낭만해안'(茂名浪漫海岸)을 모르는 중국인이 거의 없을 만큼 마오밍의 해변은 풍광이 아름답기로 이름 높다. 광둥을 비롯 중국에 진출한 각지의 외자기업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해외에서도 'Maoming Romantic Seaside'의 유명세는 사해만방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의 붉은 광기에 눈자위가 붉게 물든 중국인들에게 새하얀 백사장과 푸르른 난바다의 아름다움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겠는가!

1970년 당시 대졸자는 중국 전국에서 1만 명도 채 안 되는 고학력자중 고학력자였지만 장고려는 입사후 처음 1년 간 국영석유회사의 공장 내부와 사무실 안으로 출입조차 금지되어 있었다. 입사후 1년 내내 그는 공장 밖 건설현장에서 한여름의 직사광선과 한겨울의 매운 해풍을 온몸으로 맞아가며 매일 50킬로그램짜리 시멘트 포대를 쉴새없이 나르는 고문만큼 힘든 육체노동 일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재능이 출중한 사람은 군중들과 섞여있어도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끝이 밖으로 나오듯이 남의 눈에 드러난 법. 이듬해 1971년, 장고려는 국영석유회사 판공실 비서(총무실장)로 발탁된 후 탁월한 실적을 거두면서 승진에 승진을 거듭, 1983년에는 국영석유회사의 부사장까지 승진했다.

1인자와 2인자의 관계는 수직? 수평? 사선관계일까?

1984년, 38세 나이의 장고려는 마오밍시 국영회사 2인자에서 마오밍시 2인자 시 당 부서기로 일약 3계급 특진했다. 그의 생애 최초의 관운의 닻이 올려졌다. 이듬해 중국 제일부자 성인 광둥성의 경제위원회주임으로 전격 발탁된 그는 눈부신 업적을 연거푸 거두면서 1995년 광둥성 2인자 그룹의 일원인 부성장까지 고속 승진했다. 행운의 돛을 단 듯 그의 관운을 실은 배는 순항에 순항을 거듭했다. 1997년 드디어 광둥성 부서기겸 경제특구 제1번지 선전시의 당서기로 부임했다. 그 동안 2인자그룹에 머물러 있던 장고려는 이제 명실상부한 1인자로, 그것도 경제특구 1번지, 선전시의 총수로 등극한 것이다.

참고로 중국공산당이 국가를 영도하는 체제하에서는 당서기가 1인자. 시장이나 성장이 2인자이다. 그런데 1인자 당서기와 2인자 시장이나 성장의 관계는 딱 부러진 상명하복의 수직서열관계가 아니다. 대통령과 총리가 역할과 권한을 분담하는 체제인 2원집정부제라고나 할까. 유구한 집단지도체제의 역사전통에 따라 당서기와 시장 또는 성장의 관계는 수평관계 내지 약간 기울어진 사선관계이다. 당서기는 시장이나 성장의 인사권을 틀어쥐고 있기에 1인자임에는 틀림없다.

홍콩을 추월하자

선전(深圳)은 홍콩의 북쪽에 인접해 있다. 선전(면적 2007㎢, 인구 280만명)은 중국의 5대 경제특구 하나이고, 홍콩(면적 1104㎢ 인구 717만명)은 중국의 2대 특별행정구의 하나이다. 선전은 홍콩 면적의 약 두 배, 홍콩 인구의 약 40%이다.

"홍콩을 추월하자(超越香港)!"

1997년 장고려가 선전시의 수장을 맡으며 내걸었던 구호이다. 그러자 마카오와 인접한 주하이시도‘마카오 추월’을, 타이완의 맞은편의 푸젠성과 타이완과 크기가 비슷한 하이난성도 ‘타이완 추월’을 내 걸었다.

장고려의 선전 당서기 임직 4년은 ‘홍콩반환’ 과 ‘IMF금융위기’라는 거대한 변혁의 풍랑이 몰아치던 격동기였다. 그는 홍콩과 선전의 격차를 좁히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선전의 동부시가지를 리모델링하고 남부의 공항을 증축했다. 해안도로를 신설하고 지하철노선을 확장했다.

특히 최근 삼성과의 특허소송, 미국의 대북제재 정조준 대상 등으로 세계적 이슈메이커로 뜨고 있는, 중국 공룡민영기업 화웨이(Huawei 華爲)를 비롯 선전에 본사를 둔 민영 하이테크기업들의 발전을 위해 지방성규범(조례와 규칙)을 제정하는 등 전천후 전방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000년 선전경제특구 창립 20주년을 기념하여 개혁개방의 마스터디자이너(MD), 덩샤오핑의 대형 석조상을 선전의 렌화(蓮花)산공원에 건립하였다.

장고려(장 가오리)중국 상무부총리와 그가 중국 전회에 참석한 사진.맨 왼쪽이 장고려다. 통주일보 인터넷판 캡처.

지방수장으로서의 장고려의 주특기는 불시시찰

2001년 가을 장고려는 우리나라 중국진출 기업 전체 수의 약 60%가 진출해있는 산둥성의 성장으로 영전하였다. 장고려는 예나 지금이나 그의 이름과 가장 연관 깊은 성(省), 산둥에 부임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그의 산둥성 성장 취임사는 마치 한편의 시를 낭송하는 듯 독특한 운문형 연설로서 아직까지 인구에 시문처럼 회자되고 있다.

"나는 한 개의 우산이 되어 주민의 비바람을 막아주고 싶다. 한 마리 황소가 되어 주민의 농사일을 돕고 싶다. 한 개 돌멩이가 되어, 한 개 다리가 되어 산둥 건설을 돕고 싶다."

"산둥의 모든 공직자들이여, 바로 이 순간부터, 바로 이 지점부터, 온갖 특혜와 뇌물과 향응의 맛을 잊어라. 부패의 독버섯 맛에 탐닉하는 자에게는 독버섯 중독보다 참혹한 고통을 맛보게 하겠노라."


2003년 후진타오 정부출범과 함께 장고려는 산둥성 제1인자인 당서기겸 성인대상무위원회주임(성의회 의장)으로 승진했다. 성의 제1인자 당 서기가 성인대상무위원회주임을 겸하는 예는 매우 이례적이다. 장고려 산둥성 당서기는 영역별로는 경제무역투자, 하이테크기술과 민영경제 등 3개 영역의 발전에 총력을 기울였다. 지역적으로는 동으로는 옌타이(烟台)(필자주5)에서 중부 산둥성의 중심도시 지난(濟南)을 거쳐 서부의 허저(河澤)(필자주6)을 연결하는 동-중-서 3도시를 잇는 이른바 '엔지허 연선'을 중점 개발했다.

지방수장으로서의 장고려의 주특기 중 한 가지는 ‘불시시찰’이다. 그가 산동성에 부임한 첫해 첫 3개월 동안 우리나라 남한 면적의 1.6배인 산둥성을 직접 발로 뛰며 무려 17개 시를 불시시찰했다. 11개시는 2회나 불시시찰했다. 불시시찰시 그의 수행원은 5명을 초과하지 않았다. 산둥시 산하 모든 행정관서의 수장들은 산둥성 최고영도자가 ‘암행어사 출두야’를 외치듯 언제 어디서 불시에 나타날 줄 몰라 항상 깨어있어야 했다.

장고려가 그녀의 말(言)허리를 요참한 까닭은

장고려의 산둥성 당 서기 재직시절 수많은 일화가 있으나 지면관계상 한 가지만 소개하겠다.

2005년 3월 8일 부녀절(여성의 날)이다. 장고려 당서기는 산둥성 여성지도자대표회의에 참석하였다. 한 여성 연예인이 S자 몸매를 과시하듯 SS자로 흐느적거리며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말했다.

"당 서기님, 지금 다른 성 당정고위간부들은 앞 다투어 현지 연예인들에게 비공식추천서 써주는 등 전국적인 스타로 키우려고 온갖 애를 쓰는데요. 우리 산둥성 간부들만 추천서는커녕 미동도 하지 않아요. 우리 산둥지역 연예인들은 중앙무대에 오르기가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어렵네요, 그래서 어려운 부탁이지만 당 서기님께서 한 번......"

갑자기 장고려는 그녀의 말허리를 요참하듯 단칼에 자르며 탁자를 치며 외쳤다.

"연예계 인사가 관방의 도움을 받아 인기를 얻겠다는 생각은 큰 착각이고 큰 잘못이다. 추천서를 쓸려면 자기 스스로 쓰라. 정도를 걷는 자는 살고 꼼수를 쓰는 자는 도태되어야 마땅한, 신중국의 적자생존 법칙을 그대는 어찌 모르는가!"

주민총생산액(GDP)이 연해지역 7개 성(省)중에서 꼴찌에서 2~3위를 오갔던 산둥성을 장고려는 6년만에 일약 전국 제2위로 수직상승시켰다. 2007년 3월 장고려는 중국의 4대직할시(베이징, 상하이, 텐진, 충칭)의 하나이자 우리나라 인천광역시 자매도시 텐진직할시 수장인 당서기로 영전했다. (인천과 텐진은 닮은 꼴 도시다. 각각 서울과 베이징의 관문이자 양국의 수도권 양대 대도시이다.)

장고려는 그와 동시에 정치국상무위원에 버금가는 중국 차상위 핵심권력층인 당중앙 정치국에 진입했다. 텐진시 당서기 재임 6년간 장고려는 산둥성 당서기 시절의 불시시찰에다가 '암행순찰'과 '야간전화 점검', '인터넷 소통'을 가미하는 것으로 행정관리감독방식의 다양화와 업그레이드를 기했다.

텐진시 시당 간부 하나는 하늘도 두렵지 않고 땅도 두렵지 않은데 오직 장고려 당서기로부터 밤에 걸려오는 전화가 제일 두렵다고 했다. 장고려는 수행원 한 두 사람만 대동하고 재래시장과 극장, 공원 등에 암행시찰을 나가 직접 시민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그는 특히 텐진시 관내 택시운전기사들로부터 생생하고 실제적인 정보를 대량으로 습득했다.

참고로 텐진사람들은 전체 중국에서 수다스럽고 말재주가 뛰어나기로 정평이 나있다. 텐진 출신 언론인이 유독 많은 편이다. 특히 언변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저우언라이 중국 초대 총리겸 외교부장도 텐진 소재 난카이 대학 출신이다.

또한 장고려는 인터넷 채팅을 통하여 텐진시민들과 직접 소통하길 즐겨했다. 일반국민들과 인터넷으로 직접 소통하길 좋아했던 원자바오 전총리와 함께 인터넷을 활용할 줄 아는 중국 영도자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중국 당정관료 인사는 실적제 위주

2007년~2011년 글로벌경제와 중국경제가 하향세의 쌍곡선을 그리는 동안, 장고려가 텐진의 지휘봉을 쥔 후 5년 연속 GDP 평균성장률 16.5%를 기록하고, 2011년 말 텐진시 1인당 GDP는 1만 3천달러로 상하이를 추월하여 전국 31개 성급 지역중 제1위를 차지하는 등 텐진경제는 상향세의 쌍곡선을 그렸다.

아무리 낙후한 지역이더라도 그가 가는 곳곳마다 격앙가가 울려퍼지는 눈부신 실적으로 인하여 2012년 11월, 장고려는 마침내 지고지상의 7인 중국최고수뇌부인 정치국상무위원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이듬해 2013년 3월에는 중국경제의 총사령관 즉 상무부총리를 겸하게 되었다.

마오쩌둥 이전 중국에서는 공산당 이념에 얼마나 충실한가의 당성과 출신성분이 공직자 인사고과에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덩샤오핑 개혁개방이후 맡은 일에 얼마나 성과를 내었는가의 실적이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중국의 공직자 인사행정 행태는 실적제에 해당한다. 중국의 인사행정은 미국식 민주선거에서 인사행정에 관직을 사냥하는 듯, 선거에 승리한 정당이 모든 관직을 전리품처럼 처분할 수 있는 엽관제가 아니다. 또한 인사권자의 개인적인 신임이나 인사권자와의 혈연, 지연, 학연 등 연고중심으로 임용하던 영국식 정실제도 아니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의 공직 임용과 충원은 능력, 자격, 성적을 기준으로 행하는 철저한 실적제를 지향하고 있다.

중국의 성과 시는 각각 우리나라 전국과 도(都)의 면적보다 넓고 인구수도 더 많다. 덩샤오핑 이후 당중앙위원회 정위원 이상 중국 최고핵심층 고위당정인사는 다년간 지방 수장을 맡게 한 후 그중 실적이 탁월한 자로 충원하여 왔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권력서열 제1위 시진핑은 푸젠성, 저장성, 상하이시의 당서기를, 제2위 리커창은 허난성과 랴오닝성 당서기를, 제3위 장더장은 랴오닝성과 저장성 당서기를, 제4위 위정성은 칭다오시, 후베이성, 상하이시 당서기를, 제6위 왕치산은 하이난성 당서기와 베이징 시장을 역임하였다. 이렇다 할 정부직을 맡은 바 없는 권력서열 5위 류윈산만 빼놓고 정치국 상무위원 6명 전원은 2~3개의 지방정부 수장을 역임한 바 있다.

중국 국무원 각료의 재임기간이 5~10년인 까닭은

"장관님, 처음 뵙습니다. 전임 장관님 잘 계십니까. 전전임, 전전전임 장관님께도 안부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한중 외교부장관회담에서 중국 외교부장이 한국 외교부장관에게 물었던 안부인사다. 상대편의 입에서 줄줄이 나오는 전임 선배장관들의 이름앞에 한국 장관은 회담 시작부터 약간 김이 샌다. 상대편이 근 10년간 외교부장을 맡아 왔는데 한국 장관은 임명된지 1개월도 채 안되었다. 회담을 마치면 다시 만나자는 뜻으로 "자이지엔(再見)"하며 인사를 건넨다. 그러나 한국의 장관으로서 "자이지엔"하기란 정말 힘들다.

1987년 대통령 임기 5년 단임제 실시이후 우리나라 역대 외교부 장관들은 물론 여타 역대 부처의 장관들이 피할 수 없었던 '자이지엔 불능 공동운명체'였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출범이후 4년째 재직중인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몇번째 "자이지엔" 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반면에 중국의 외교부 부장 등을 비롯한 각 부 부장(장관)들의 임기는 범법을 저지르거나 중대한 실책을 범하지 않는 이상 최소 5년이다. 이를 일각에서는 한국보다 장기인 중국의 각료 임기를 과거 구소련과 동구권, 지금의 북한을 위시한 공산국가의 각료들의 장기재임현상과 최고통치자의 자의적인 임면권과 결부시키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 전혀 거리가 먼 시도이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의 장관급이상 최고위직의 재임기간 5~10년은 최고권력자의 자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헌법에 근거한 것이다.

덩샤오핑이 없으면 오늘의 중국도 없다(沒有鄧小平, 就沒有今天的中國).

서방학계 일각에서 입법가(Law Maker) 또는 마스터 디자이너(MD)로 불리는 덩샤오핑은 1982년 12월 헌법을 전면 개정하였다. 현행 중국헌법은 그 때 전면 개정된 헌법으로 ‘1982년 헌법’이라고 부른다. 중국의 최고국가행정기관인 국무원은 총리와 부총리 4명, 국무위원(副부총리급) 5명과 각부 부장과 위원회 (한국의 장관, 총 25명), 비서장(사무총장)등으로 구성된다(중국헌법 제86조 참조).

총리이하 국무원 각부 부장의 구성원은 국무원은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임기와 같은 5년이며 연임제한은 없다. 그러나 부부총리급인 국무위원, 부총리, 총리는 2기를 초과하여 연임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즉 중국의 총리와 부총리, 국무위원의 임기는 헌법상 최소 5년 최장 10년이고, 각부 부장과 위원회의 장관은 최소5년 이상으로 임기제한이 없다(중국헌법 제87조 참조).

실제로 국무원 총리이하 각부 부장(장관)들은 뇌물수수 등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거나 큰 실책을 범하지 않는 한 짧게는 5년간 길게는 10년간 재임하고 있다.

특히 지금 장고려가 맡고 있는 상무부총리, 그 직위는 ‘명예의 전당’이라는 곳이 있으면 제일 먼저 헌액 됨이 마땅한, 개혁개방사의 역사적 의미가 응축되어 있는 핵심중의 핵심직위이다.

개혁개방 총설계사 덩샤오핑이 국가주석과 국무원총리자리를 한사코 거부하고 맡았던 자리가 상무부총리였다. 상무부총리는 덩샤오핑의 왼팔과 오른팔로서 실세중의 실세로 불리던 완리(万里 1982~88 괄호안은 재임기간), 야오이린(姚依林 1988~93)이 덩의 뒤를 이어 차례로 맡았던 직위이다. 장쩌민 시대의 주롱지(朱镕基 1993~98)와 리란칭(李岚清 1998~2003), 후진타오시대의 황쥐(黃菊 2003~07)(필자주7), 리커창(李克强 2008~13), 그리고 현재의 장고려 상무부총리는 모두 중국당정 고위인사중 에이스 중의 에이스로만 명맥을 이어 내려온, 카리스마의 아우라가 광휘로운 영광의 자리이다.

ⓒ강효백

인걸은 간데없으나 제도는 유구하다. 특별한 돌변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현 제8대 상무부총리 장고려의 임기 종료는 2018년 3월로 예상된다. 이제 장고려 개인보다 상무부총리 직위에 중점을 두어 살펴보도록 한다. 상무부총리 휘하에는 국무위원(부부총리) 5인중 1인(현재 王勇 전 국유자산관리감독위원회 주임)을 비롯, 상무부, 재정부, 국가발전개혁위원회, 공업및정보화부, 인력자원및 과학기술부, 국토자원부 등 국무원 각 부와 위원회 25개 중 15개 주요부서가 “명령만 내리소서” 하듯 상시 대기하고 있다. 상무부총리는 국무원직속특설기관이자 중국의 모든 국유기업을 관리감독하여 전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부서라고 정평이 난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를 직속에 두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상무부총리는 세무총국(국세청)등 국무원 직속기관 14개중 5개, 은행업감독관리위원회(금융감독원) 등 국무원직속사업단위 13개 중 4개를 총괄하는 지위와 권한, 지휘책임을 아울러 부담하는 핵심중의 핵심 직위이다. 요컨대 상무부총리는 중국경제라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이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이라, "정신을 한 곳으로 모으면 어떤 일을 이루지 못하겠는가"라는 고사성어 그대로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정치 9단, 경제 10단' 덩샤오핑이 1978년부터 상무부총리를 맡은 후, 2016년 현재까지 근 40년을 한결같이 중국 정치권력 핵심중의 핵심인 정치국상무위원 중에서도 최고의 경제통으로 검증된 자를 상무부총리로 발탁, 중국경제 컨트롤 타워를 맡아 중국경제를 성장시켜왔으니, 오늘날 중국이 미국과 더불어 글로벌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G2국가로 웅비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불과 6년 전 2010년 자국의 GDP가 일본을 추월하여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고 동네방네 고함지르며 기뻐하던 중국이 2015년 말 현재 GDP는 일본의 그것을 3배 이상 넘어서는 괴력을 보이고 있음에도 이제는 쉬쉬하고 있다. 중국의 구매력 기준 GDP는 일본의 4배를 넘어서고 있다. 이같은 통계의 출처가 신빙성을 전혀 무시 못 할, 미 중앙정보국(CIA)임에도 불구하고 중국관련 통계는 전부 믿을 게 못된다는 식으로 어물쩍 그냥 덮고 지나가려해서는 안 된다. 이는 자기자신을 기만하는 '정신승리법'식 사고행태이다.

2012년 5월 26일자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중국경제는 자전거 타기다. 페달을 밟을 힘이 있으면 달려가지만 멈추면 짐과 함께 자전거를 탄 채 쓰러질 것이다"라며 중국경제는 자전거와 같다며 저주 섞은 혹평을 한 바 있다.

그 이후 우리나라 관언학 각계에서도 '중국경제는 자전거경제', '심상치 않는 중국경제, 연착륙가능할까?'라는 제 코가 석자인데 오지랖도 넓은 소리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반문하고 싶다. 우리는 3%만 성장해도 성공한 경제인데, 중국은 6% 성장해도 위기의 경제인가? 우리는 자동차 경제이고 중국은 자전거 경제인가?

"중국이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

요즘은 덜하지만 얼마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보고 듣던 어구이다.

"도대체 우리나라가 지금 중국의 어떤 분야에 비해 앞서 있지?"

하도 의아해서 일본의 포털사이트를 한번 검색했더니만, 맙소사, 일본 언론에서 상용하던 용어를 그대로 앵무새처럼 따라한 어구였다. "중국이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에서 '우리'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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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고려의 고향이자 신해양실크로드의 기점이된 촨저우 바다를 소문자 sea로, 드넓은 세계의 바다를 대문자 'SEA'로 표기해보았다.

2)'데일리안' 2016년 1월 1일 신년사 참조

3)중국에서는 중학교를 초중(初中), 고등학교를 고중(高中)이라고 부른다.

4)샤먼대학은 중국의 20대 명문대학의 하나로 경제학과 무역학과 국제경제법학과가 유명하다.

5)옌타이는 프랑스 보로도 지방과 닮았다 하여 중국 최초의 와인용 포도농장과 포도주 양조장(와이너리)가 들어선 곳으로 유명함, 중국최고의 와인 메이커, ‘장위포도주’의 본사 소재지, 요즘 옌타이 아가씨라는 뜻의 브랜드 ‘옌타이 구냥(姑娘)’이라는 병모양이 예쁘고 맛도 좋은 옌타이산 배갈이 한국 애주가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음.

6)허저는 수호전 108호걸의 터전 양산박이 자리하던 지방이라는 설이 있어서 그런지, 역대 장수와 장군들을 많이 배출한 지방으로 유명,

7)황쥐 상무부총리는 2007년6월2일 병사하자 후임을 선출하지 않고 잔여임기를 우이(吳義 여) 부총리가 직무 대리하였음

글/강효백 경희대 중국법학과 교수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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