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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순사건 집단 희생자 유골 발굴


입력 2007.04.11 16:30 수정        

여순연대, 학살지 주변 고속도로 공사 중단과 유골 발굴 요구

(사)여순사건화해와평화를위한순천시민연대는 10일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여순사건의 진상조사를 개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국의 무관심과 시민단체의 방심으로 주요 학살지와 매장 추정지가 전주-광양 간 고속도로 부지로 편입되어 사라질 위기에 있다” 고 주장했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후 이곳 순천시 서면 구랑실재에서 희생당해 4월 10일 묘소를 이장하게 된 고 양회일씨(당시 24살쯤) 유골

이에 여순연대는 시공사인 두산중공업과 도로공사가 발굴 전까지는 매장지 주변의 공사를 중단하고 또 과거사위원회는 발굴을 시급히 할 것과 순천시도 행정적 노력과 함께 유골이 발굴되었을 때 안장할 수 있는 묘역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여순연대는 “현재 고속도로 건설공사가 한창인 순천시 서면 구랑실재는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개전 초기 150~ 200명의 지역민이 집단 희생된 곳으로 여순사건 당시 순천북초등학교에 소집된 읍민 가운데 봉기군 협력자(부역자)로 분류된 사람 50여명이 1차로 희생된 곳이다” 고 주장했다.
 
또한 “사건이후 좌익협력자를 통제하기 위해 ‘보도연맹’을 만들었고, 6.25 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퇴각하면서 순천, 광양지역의 보도연맹원 100명~150명을 이곳에서 학살하였으며, 이들 중 먼 거리이거나 시신이 훼손되어 찾을 수 없고 운반하지 못한 경우에는 학살지 주변의 야산에 매장할 수밖에 없었다” 고 주장했다.

이렇게 희생당한 후 4월 10일 이장을 하게 된 고 양회일씨(당시 24살쯤)의 경우 여순사건 당시 순천동산국민학교에 근무하다 봉기군에 협력했다며 끌려간뒤 풀려나 친척집을 전전하다 자수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해 있던 중 1950년 7월 22일(음 6월 9일) 구랑실재에서 학살당했다.

이번 묘소 이장과 관련해 여순연대 관계자는 “과거사위가 매장지 조사를 하고 공식 발굴까지 하려고 하는데 유가족들과 제대로 연락이 이뤄지지 못해 개별적으로 이장하게 된 것은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 고 밝혔다.

한편, 여순연대는 5백여 시민과 재향군인회, 부모, 형제가 죽임을 당하고도 한마디 하소연조차 하지 못하고 반세기를 살아왔던 여순사건 유가족들의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해 2003년 8월 창립됐으며 여순사건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와 연구, 죽음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등을 위해 노력해왔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당시 여수에 주둔 중이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병사들이 4.3사건 발발과 관련 제주도 진압작전에 나서라는 명령을 어기고 우익계 장교 20여명을 사살하고 여수,순천,구례 등 일부 지역을 점령했으며 진압과정에서 수천명의 무고한 양민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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