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민의 60%가 동원된 미국 대통령 국빈방문
<하재근의 닭치고tv>5만장 포스터, 11개 대형 아치, 19개 대형탑 등장
국가 외빈방문은 국빈방문(State Visit), 공식방문(Official Visit), 실무방문(Working Visit), 사적방문(Private Visit)으로 나뉜다. 국빈방문은 장차관급이 공항 영접을 나가고, 예포 21발을 쏘며, 청와대에서 공식환영식을 진행한다. 문화공연을 포함한 청와대 만찬도 대통령 부부가 주재한다.
이번 트럼프 미 대통령의 국빈방문이 1992년 아버지 부시 대통령 이후 25년 만이라고 알려졌다. 그런데 일부 매체에선, 미국 국무부 자료를 찾아보니 미국 대통령의 마지막 한국 국빈 방문이 1983년 레이건 대통령 때였다고 보도했다. 국가 간의 일에 이런 착오가 생기는 것이 당황스럽다. 우리 입장에서 워낙 미국의 국빈방문을 원하고, 또 그것을 정권이 홍보하려고 하다보니 우리 측에서 일방적으로 국빈방문이라고 정해버린 것은 아닌지 차후에라도 확인해볼 일이다.
최초의 미 대통령 국빈방문은 1960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 때였다. 한국전쟁 직후였던 만큼 어마어마한 환영이 있었다. 국무총리 부부와 국회의장, 대법원장 직무대행 등 3부 대표가 모두 김포공항까지 나갔고, 서울시청엔 아이젠하워 대형 초상화가 걸렸다. 방한 기념우표와 담배까지 나왔다.
1966년 린든 존슨 전 대통령의 국빈방문 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포공항에 직접 나가 영접했다. 이때 정부는 275만 명의 환영인파 동원을 계획했다. 실제로 동원된 건 200만 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시민이 350만 명 정도였을 무렵이다. 도로도 빈약하고 자동차도 별로 없을 때라서 이 정도 인원의 동원은 그야말로 국가적 대사업이었다. 5만 장의 포스터, 이동로에 11개의 대형 아치, 19개의 대형탑 등이 준비됐다. 서울 시청 앞에 평화대를 만들어 ‘미모의 아가씨’들과 수백 개의 국화꽃 화분을 배치하고, 시청까지의 진입로에도 수천 개의 국화꽃 화분을 배치해 시내에 꽃향기가 진동했다.
하늘엔 거대한 성조기와 태극기가 휘날렸다. 시청엔 존슨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초상화가 걸렸다. 이 엄청난 시청 앞 환영식 영상이 미국 등으로 나갔는데 미국 교포들이 깜짝 놀랐다. 조국의 시청 앞이 너무나 낙후된 슬럼가였기 때문이다. 청와대로 도심 재개발을 해달라는 탄원서를 보냈다. 정부도 서울 한복판 슬럼가를 두고 볼 수 없었다. 이 일을 계기로 소공동 재개발이 시작되는데, 1호 건물이 서울 시청 앞을 병풍처럼 둘러쳐 그 뒤가 안 보이도록 한 프라자 호텔이다. 한때 한국의 발전상을 소개할 때 으레 나왔던 바로 그 건물이다.
1974년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 국빈방문 때도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김포공항에 나갔고, 180만 명의 환영인파가 동원됐다. 1979년 지미 카터 대통령의 방한 때도 비슷했다. 카터는 후에 “해외에서 이런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라고 회고했다고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미국에 자신의 국빈방미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미국이 응한 것은 공식방문도 아닌 실무방문이었다. 실무방문으로 갔는데도 당시 우리 언론은 전두환 대통령이 미국에서 국빈 환영을 받는 것처럼 보도했다. 심지어 전 대통령이 가는 곳마다 단비가 내리면서 미국의 가뭄이 해갈됐다는 해괴한 보도까지 나왔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전두환 대통령의 국빈방한 요청은 들어줬다. 1983년에 방한했는데, 전두환 대통령 부부가 공항에 나가 영접했다. 성대한 환영행사를 준비했지만 미국이 레이건 대통령의 피로를 이유로 축소를 요구했다. 계속해서 무시당한 느낌이다. 어쨌거나 150만 명의 환영인파가 동원됐다.
민주화 이후에 떠들썩한 의전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1992년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방문 때는 정원식 총리가 영접했다. 카퍼레이드나 시민 동원도 없었다.
김영삼 정부 이후로 외국 정상의 국빈방문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의전에 공들이는 것을 허례허식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한을 실무방문 형식으로 하자고 우리가 먼저 제안했다. 미국도 국빈방문을 꺼리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상호간에 쉽게 합의됐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14년 방한 때 세월호 침몰 사고를 의식해 ‘화려하지 않은 일정’을 요구했다. 세월호 문제를 상기시켰으니 박근혜 전 대통령의 레이저를 맞았음직하다.
그리고 이번에 아버지 부시 이후, 또는 레이건 이후 최초로 미국 대통령의 국빈방문을 맞이했다. 영접을 나간 건 대통령도 총리도 아닌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었다. 전체적인 의전도 일본보다도 더 점잖은 분위기였다는 평가다. 일본은 총리가 트럼프의 비서 같았다는 평까지 들었다. 대체로 보면, 한국전쟁 직후엔 당연히 열정적인 환영이 있었고, 그후 정통성이 빈약한 군사정권이 미국 대통령을 결사적으로 환대했으며, 민주화 이후 점점 제자리를 찾기 시작해 오늘날의 점잖은 의전까지 왔다고 하겠다.
우리 대통령 중에선 이승만 대통령이 1954년에 처음으로 미국을 국빈방문했다. 이때는 냉전이 극에 달했을 시기이기 때문에 자유진영 최전방 지도자로서 환대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초기에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고 1964년에 서독을 먼저 국빈방문국으로 찾았다. 이때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면서 차관을 얻어냈다. 미국은 1965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국빈방문을 받아줬다. 베트남전 파병이 현안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실무방문으로 갔고, 공항에서의 환영행사도 없었다.
뭔가 우리가 미국에 많이 아쉬워하는 듯한 분위기다. 민주화가 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이런 불균형은 점차 사라져갔다. 1년에 단 두 명만 국빈방문으로 맞이하는 영국에도 노무현, 박근혜 두 대통령이 찾았다. 앞으로 국력이 더 강해지고, 민주주의가 공고해져 국가의 위신이 올라가면 우리 대통령이 더욱 ‘칙사 대접’을 받을 것이다.
글/하재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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